《나무 위에 그린 그림》
식당에 들른 것은 식사를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전라남도 신안을 다녀오는 길이니
고속도로를 따라 곧장 집으로 오는 것이 편했지만,
일부러 충청남도 금산에 있는 식당을 찾았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적한 도로 옆에 위치한 식당은 자연과 어울리며 자연의
일부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식당을 장식하고 있는 소품들도 주변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용했지
싶은 물건들이어서 정겨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식당 안 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은
식당 안의 온도보다는 마음을
편안하고 정겹게 해주었습니다.
식당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얕은 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라 장맛일지도 모릅니다.
버섯을 넣어 끓여 낸 된장국의 맛이
깊고 그윽했습니다.
따로 묻진 않았지만 인근의 밭에서
일일이 땀 흘려 키워낸 우리 콩으로
메주를 쑤고,
양지바른 항아리에 담아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손님들이 적지 않은데도 조금의
서두름도 없이,
일삼아 하는 기색 없이 서빙을 하는 모습에도 여유와 격조가 느껴졌습니다.
일부러 식당을 찾은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식당의 주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연도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오래된 그림으로, 나무 판 위에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저기 흠집이 많은 나무 판은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데,
그림도 다를 것이 없어 형태가 온전하질 못합니다.
퇴색되고 지워진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콘 성화에서 보았던
예수의 얼굴입니다.
주인으로부터 듣는 그림의 내력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대둔산에는 당나라 정관 12년,
무왕 39년인 638년에 세워진
신선암이 있습니다.
사람이 지내는데 필수조건인 물이
솟았기에 굴법당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종교의 벽이 아주 높지 않아
타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했습니다.
덕분에 신선암에는 불교신자는 물론
도교와 동학을 공부하고 따르는
이들도 거주했고, 신앙의 박해를
피해 찾아온 천주교 신자들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이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처럼,
이 땅 최초의 순교자로 참수 당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삶도 이 지역과 무관하지를 않습니다.
나무 판에 그려진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물을 불법으로 증축했다는 민원에
따라 결국 신선암은 헐리게 되었는데,
당시 신선암에는 두 개의 방과 하나의 창고가 있었습니다.
창고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어지럽게
쟁여 있어 정리가 필요했는데,
물건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 바로
그림이 그려진 나무 판이었던 것입니다.
불교 암자에서 나온 오래된 예수상,
의아함 속에서도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암자로 피신한 천주교
신자 중 누군가가 예수상을 가지고
피했을 것이고, 본래 그림은 언어
소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양의 선교사가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은 것입니다.
하나의 그림 속에 담긴 수많은 사연들을 헤아려보는 시간,
어느새 시간이 저만큼이었습니다.
[글쓴이 : 한희철목사/ 정릉감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