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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 오분전 ~~

작성자녹림처사|작성시간24.04.12|조회수49 목록 댓글 0

 개판 오분전 

 

얼마 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애견용품 박람회가 열였지요

그 입구엔 이렇게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어요

“개같이 벌어 개한테 쓴다.”

처음에는 우습게만 여겼는데 곱씹을수록

그럴듯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돈 버는 일은 점점 더 힘들고 개 키우는 사람은 줄곧 늘어나고 있어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니 개 먹이고 치장하는 게 낙이라고 할수 있지요

설령 개같이 벌더라도 그 돈을 개한테 쏟아 부을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그 플래카드의 의미는 내돈내산,

아니 ‘개벌개쓴’의 세계로 입장하고 있어요

 

말 그대로 인산견해(人山犬海), 사람 반 개 반이었지요

축구장 한 개 반 크기인 3400여 평 전시장에

개 용품 판매점들이 가득 들어찼고 개를 끌거나 안거나

이른바 개모차에 태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통로를 따라 움직이려면 퇴근 시간 지하철역 플랫폼에서처럼

어깨가 부딪혔지요

개모차가 없는 사람들은 우리 개가 사람들 발에 밟힐까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들 남의 개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 이었지요

 

개보험 판매점을 필두로 개옷과 개밥, 개목줄, 개모차, 개집, 개장난감,

개샴푸, 배변패드와 똥봉투까지 개와 관련된 상품들이 무궁무진했어요

한의대에서 녹용과 침향으로 만들었다는 개보약도 있었고

애견신문사도 부스 한 곳을 차지했지요

개 화장실도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사람 화장실은 전시장 밖에 있었어요

무엇이든 개가 우선이었지요

 

작은 토끼만 한 개부터 망아지만 한 개까지,

돌아다니는 개들도 다종다양이었지요

개들은 다른 개들의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고

모두들 신이 나서 꼬리를 치켜들고 달달 흔들었어요

개 견(犬) 자에 괜히 점이 찍힌 게 아니었지요

 

특히 작은 개들은 다들 메이크업이라도 받고 온 것 같았어요

머리통을 공 모양으로 깎은 놈, 리본을 묶거나 염색을 한 놈,

긴 털을 스트레이트펌이라도 한 듯 곱게 늘어뜨린 놈들이 즐비했지요

개버리를 어디서 얼마에 샀네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힐끗 보니

개가 버버리 무늬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에 비하면 어떤 개는 낼모레 입대하는 놈처럼 털을 바짝 깎고

(개털 깎는 비용은 짧을수록 싸다) 헐벗은 몸에 덜렁 가슴줄만 찬

기초생활수급견이었지요

 

요즘은 개 목줄도 많이 달라졌어요

‘하니스(harness)’라고 부르는 가슴줄은 목 대신 개 몸통에 둘러

개줄을 묶을 수 있는 장비이지요

눈에 확 띄는 가슴줄이 있어 가격표를 보니 10만원이 넘었어요

이탈리아산으로 아주 가볍고 ‘견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됐다고 하지요

몇 군데 돌아다니다 결국 튼튼하고 채우기 쉬운 국산 가슴줄을 장만했는데

그 역시 5만원에 육박했어요

사실 5만원짜리 가슴줄은 비싼 축에 끼지도 못하지요

‘개모차계의 에르메스’라는 일제 개모차는 20% 할인을 받아도

100만원이 넘었고 개가구 전문점에서는 50만원쯤 하는 개소파를 팔고 있었어요

 

세계 최악의 저출생 국가인 한국에서 개 키우는 인구는 크게 늘고 있지요

작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조사해 보니 반려동물 양육 인구는

전체 인구의 28.2%였어요

이 조사를 처음 한 2010년(17.4%)보다 약 62% 증가했지요

반려동물의 75.6%가 개였어요

작년 한 온라인 쇼핑몰에선 개모차가 유모차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하지요

3년 전만 해도 개모차 33%, 유모차 67%였는데

작년엔 57% 대 43%로 역전됐어요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반려동물이 느는 건 외국도 마찬가지이지요

작년 합계 출생률이 1.0으로 내려간 중국은

2018년 이미 반려동물 수가 2억 마리를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어요

대만에서는 반려동물 수가 15세 이하 아이들 수보다 더 많다고 하지요

 

그런데 애견용품 박람회에 온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았어요

여자끼리 또는 여자 혼자가 절반 넘는 것 같았고

부부 또는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그 다음으로 많았지요

남자 혼자 온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지난달 영국 BBC는 한국 여성들을 심층 취재해

‘아이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어요

경력 단절, 독박 육아, 높은 노동 강도, 비싼 집값과 사교육 등이 이유로 꼽혔지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결혼과 출산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설파하지요

그걸 포기하는 세태를 못마땅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어요

그러나 젊은 세대가 외로움이 좋아서 혼자 살고

아이가 싫어 낳지 않는 게 아니지요

죽어라 일해도 삶이 나아지리란 희망이 없으니 자신이 없고 두려운 것이지요

개같이 벌어봐야 쓸 대상도, 물려줄 사람도 없어요

그래서 개같이 벌어 개한테 쓴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렇듯 사람보다 개가 우선인 나라가 되어가고 있지요

바야흐로 애완의 시대에서 반려의 시대로 변해가고 있어요

동네엔 24시간 애견 편의점에 이어 강아지 모발건강까지 챙기는

토털 애견 뷰티숍이 생겨나고 있지요

‘우리 집 막내’라는 키워드를 치면 아기보다 강아지가 더 많이 나온다는

빅 데이터 전문가의 말에 놀란 게 3년 전이지요

 

강아지는 마음으로 낳아 지갑으로 키운다는 우스갯소리 뒤에는

아이를 낳아 학원 뺑뺑이를 돌며 맘고생 하느니

반려동물과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이제 아이가 채워야 할 정서적 공간은 강아지가,

아이가 사라진 물리적 공간은 개 병원으로 채워지고 있지요

의대 증원을 반대하는 의협 회장이 요즘 노인은 건강해서

의사가 많이 필요 없고, 지역에는 오히려 환자가 없다고

설득하는 기사를 봤어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지역에 환자가 없는 게 아니라

많은 환자들이 KTX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것이고,

노인이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진료를 받아서

만성질환자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어제는 동네 의원에 갔다가

“요즘에는 절대 아프면 안 됩니다!”라는

위로와 충고 사이의 말을 들었어요

 

어쩌다가 사람이 개보다도 못한 세상이 되었는지

세상사가 온통 뒤죽박죽이지요

범죄자들이 선량한 국민을 다스리고

몰상식이 상식을 이기고 있어요

그래서 ‘개같이 벌어 개에게 쓴다’는 말이 나왔으니

이게 바로 “개판 오분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一松) *-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애견용품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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