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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스님의 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

작성자일송처사|작성시간19.01.18|조회수248 목록 댓글 0

▲ 화엄법사(華嚴法師) 춘성(春城)스님 (일명 욕쟁이스님) ...

    ♣ 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1960 ~70년대에 아주 걸죽한 스님 한분이 있었지요 일명 "욕쟁이스님"이라고 세간에 알려졌지만 한평생 탈속한 "무애도인(無礙道人)"으로 지냈으며 파격적인 육두문자로 설법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던 스님이지요 이 스님이 바로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의 유일한 상좌이며 화엄법사(華嚴法師) 춘성(春城1891년3월30일~1977년8월22일)스님 이지요 춘성스님은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통리에서 아버지 이인오(李仁五)와 어머니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성은 이씨로 속명은 창림(昌林)이고 본관은 평창(平昌)이지요 그가 태어날때 어머니 밀양 박씨는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였다 하네요 9세 되던 해에 모친을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서 출가할 뜻을 밝혔으나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수년을 기다렸다 출가했지요 1903년 그의 세속 나이 13세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하여 출가하게 되었다 하네요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으며 용성스님 밑에서 화엄경을 공부한 춘성(春成)스님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선(禪)지식인 이었지요 1919년에는 스님이 출가했던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북한산 망월사, 강화도 보문사, 금강산 석왕사 등 많은 사찰의 큰스님으로 계셨지요 한국 선종의 맥을 이은 선승이자 한평생을 탈속한 무애도인으로 살았던 춘성 스님의 진면목은 갖가지 기행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행한 호탕한 설법,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에서 찾을수 있어요 그의 욕은 <벽암록>을 뛰어넘는 진한 향기와 통쾌함 같은 것이었다 하는데 스님은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15분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에서 입적 했으며 당시 스님의 향년이 세수 87세, 법납 74세였지요 1977년 8월 24일 서울 화계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이 거행되었으며 유언대로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는데 그 사리는 매우 크고 영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 양복과 보시 춘성스님은 워낙 파격적인 분이라 많은 신도들이 따랐지요 신자들은 당시로선 고가인 양복을 가끔 해드리곤 했어요 그러면 춘성스님은 그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멋지게 매고 중절모를 눌러 쓴채 서울시내에 나가 지인들에게 곡차(막걸니나 맥주)를 얻어먹는 것을 즐겼다고 하지요 그러나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이 붙어있지 않았다고 하네요 헐벗고 남루한 얻어먹는 거지들에게 자신의 새양복을 모두 벗어주고 팬티차림으로 공중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한 밤중에 절에 돌아오곤 했다 하네요 ★ 내가 중대장이다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요 하루는 밤 늦게까지 지인들이 사주는 곡차를 얻어먹고 길을 나섰는데 방범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어요 "누구긴? 내가 중대장이다!!"라고 대답했지요 순경이 플래쉬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니라 까까머리 스님이었어요 "아니? 스님 아니시오? "라고 묻자 "허허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니 중대장 맞지 않느냐!!" 고 대답했다 하네요 ★ 무소유 정신 춘성스님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이 없었어요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하지요 그는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주변의 땅을 직접 개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그대신 그는 한알의 쌀밥을 남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네요 ★ 주소는 엄마 X지, 본적은 아버지 X지 그런 춘성스님이 6.25 전쟁중에도 혼자 망월사를 지켰고 전쟁이 끝나자 절 주변의 나무를 벌목하여 절을 중수하다가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형사 : 본적이 어디오? 춘성 : 우리 아버지 자X요. 형사 : 고향은? 춘성 : 우리 엄마 보X요 경찰이 고향을 묻자 "우리 엄마 보X"라고 대답했지요 경찰이 이번에는 본적을 묻자 "우리 아버지 자X(현두)"라고 대답했다 하는군요 경찰서장은 스님의 기개와 범상함을 보고 그냥 풀어 주었다 하지요 ★ 이불과 불심 스님은 평생 취침에 들때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어요 이유는 이불이 한문으로 말하면 이불(移佛)또는 이불(離佛)이 되어 부처와 불심을 떠난다는 의미가 되므로 그는 평생 이불을 덮지 않는 이유였다 하는군요 ★ 수행자와 상좌들 광복 이후 춘성스님이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때 젊은 동자승 상좌들이나 수행을 하러온 신도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이불을 빼앗기고 자다가도 벼락이 떨어졌다 하는데 "수행을 한다는 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수가 없다!" "야 ~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거라!" 하며 호통을 치고 기어이 젊은 승려들이나 수행자들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하네요 그러면서 그 자신도 평생 이불을 덮지 않음으로서 언행이 일치함을 보였다 하는군요 ★ 졸음한테 항복 받았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중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스님은 정진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어요 한 겨울에 법당뒤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지요 엄동설한 참선수행하다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얼음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을 했어요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스님은 쾌재를 불렀어요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 내 좆을 믿어라 "죽은 부처 믿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 믿어라 !!" 춘성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탓어요 그 당시에는 "예수 믿으면 천국! 예수 안믿으면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녔는데 때마침 피켓을 든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전차 칸에 우르르 올라타더니 그중 한사람이 웬 늙은 중이 앉아 있는곳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어요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 갑니다 !!" 그러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 졌어요 춘성스님이 기골이 장대하기 때문에 필시 싸움이 일어날 걸로 생각하였지요 춘성스님이 그 말을 한 사람을 가만히 올려다 보더니 물었어요 "부활이 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스님도 예수님을 믿으시오!!" 춘성스님이 다시금 그 사람을 뻔히 쳐다보더니 물었어요 "죽었다가 살아나는게 부활이라?" "그렇소 ~ " "그럼 너는 내 X을 믿어라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죽었다가 도로 살아나는 것은 내 X밖에 보지 못했다 내 X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X하고 똑 같으니 너는 내 X을 믿거라!! ~"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은 한바탕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였다 하지요 ★ 부처는 똥이고 똥통속에도 있다 춘성스님이 어느날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목사님 이었어요 목사는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지요 그러자 춘성스님이 물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데가 없다는 말이오?" "그렇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속에도 있겠네?" 이말은 들은 목사는 춘성스님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쓰다니 .. " 하면서 화를 내며 물었어요 "그럼 부처님은 없는데가 없습니까?" 그러자 춘성스님은 태연스럽게웃으며 "허허 부처님은 없는데가 없지요!! " "그러면 부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요?" "허허 맞어!!"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 말할 것이 뭐 있어? 허허 ~" ★ 뽀뽀나 하자 춘성스님이 강화도 보문사에 주지로 있을때였지요 육영수 여사가 기도하러 왔다가 인사를 했어요 춘성스님은 대뜸 "뽀뽀나 하자"고 달려 들었지요 육여사는 당황하지않고 웃으며 잘 대응했는데 육여사가 청와대로 돌아와 박대통령에게 그 얘기를하니 "근래 보기 드문 큰스님이 나왔구먼" 했다 하네요 ★ 생일날 법어 "지 애미 X지에서 응애하고 나온날" 얼마후 춘성스님은 육영수 여사의 생일날 청와대에 초대되어 간적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대통령과 육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몇번 사양하다가 일어섰지요 그런데 춘성스님은 마이크앞에 다가 가서는 아무말도 않고 그냥 잠자코 서 있기만 했어요 10여분이 넘도록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요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고관대작과 귀부인들이 술렁이기 시작 했어요 그러자 춘성스님은 법문 한마디를 하였지요 "오늘은 우리나라 국모이신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X에서 응애하고 나온 날입니다" 좌중은 찬물을 끼언듯 썰렁해 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시며 "과연 큰스님 이시구나 ~ " 하셨다 하네요 ★ 내 큰것과 네 좁은 곳? 매사에 마음이 아주 좁은 딸을 둔 노보살이 있었어요 하루는 이 장성한 딸을 춘성스님 에게 보내서 마음이 넓어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하였지요 춘성스님이 소갈딱지 없는 딸에게 말했어요 "내 그 큰것이 네 그 좁은곳에 어찌 들어가겠느냐?" 이 말은 들은 딸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뛰어 나왔지요 집에 돌아와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며 "큰 스님은 엉터리"라고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는데 그러자 어머니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같은 크고넓은 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 하며 혀를 찼다 하지요 딸은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속깊은 법문을 잘못 이해한것을 알았다 하네요 ★ 시집.장가에는 보X와 자X가 제일이듯 춘성스님이 망월사 주지로 있을때 였는데 서울근교 어느 비구니사찰 중창불사(重創佛事)를 위한 법회에 초청을 받아 갔어요 사찰 중창불사 법회란 돈을 모으기 위한 법회이니 돈을 내라는 파격적인 법문을 남겼지요 "시집 장가가는 데는 자X와 보X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다 !!" "오늘 이 법회에 온 귀부인 년들아 ~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ㅎㅎ ★ 떨어져 봤어야 알지 하루는 제자가 스님에게 물었어요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 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야 ~ 이 씨발놈의 중놈아 ~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 ★ 저에겐 은사가 안계십니다 춘성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만해스님도 춘성을 늘 자랑했고 춘성 또한 만해스님의 제자임을 당당히 여기고 있었어요 만해스님이 3.1운동으로 형무소에서 엄동설한에 고생할때 제자 춘성은 정성을 기울여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드렸지요 그런데 제자가 만들어온 새 솜바지 저고리를 넣어드리자 만해스님이 제자에게 물었어요 "이것 보아라. 이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라면 수월찮게 돈이 들어야 할 텐데 그대가 무슨 돈이 있어 이 비싼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왔느냐?" "사실은... 달리 돈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절에 딸린 텃밭을 팔아 그 돈으로 이 솜바지 저고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걱정 말고 입으십시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만해스님은 "네 이놈! 절에 딸린 텃밭은 부처님 재산이거늘 그걸 감히 네 마음대로 팔았단 말이더냐?" "텃밭은 나중에 다시 사면 될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될 소리! 너는 부처님의 재산인 사중 땅을 사사롭게 쓰기 위해 함부로 팔아 먹었으니 죄중에도 큰 죄를 지었다 나는 너 같은 상좌를 둔일 없으니 오늘부터 당장 내 제자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말거라!" 만해스님은 이렇게 매섭게 제자를 꾸짖고 정성들여 만들어온 솜바지 저고리를 철창 밖으로 내 던졌지요 그 후로는 누가 물어도 춘성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에게는 은사가 안계십니다" ★ 내 어찌 따뜻한 방을 쓰랴 춘성스님은 만해 한용운스님이 기미 독립선언서에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하여 33인 중의 한분으로 왜정에게 체포되어 갇히자 지극 정성으로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어요 솜바지 저고리 마져도 입지 않으신 스승님을 위해 춘성스님은 스승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엄동설한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은채 냉방에서 견디고 있었지요 마침 그 절을 찾아왔던 다른 스님이 돌아보니 절에는 뗄감도 많이 있는데도 불을 때지 않은채 냉방에서 자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춘성스님에게 물었어요 "아니, 저렇게 땔감이 많이 쌓여있거늘 어찌하여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덜덜 떨면서 자는게요?" "그야 물론 장작이야 넉넉히 있지요. 허나 스승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형무소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시는데 제자인 내가 감히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결코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겨우내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 신도 위해 살았느냐? 춘성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들이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물었어요 "열반에 드신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나올까요?" 하고 묻자 "나는 그런것 필요없다!! "라고 말하였지요 그러자 후학이 다시 물었어요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라고 하자 춘성스님 왈 "이 씨발놈의 중놈아! 내가 언제 신도위해 살았느냐?" 그러면서 스님은 입적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를 세우지 말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하였지요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간 그를 보내는밤 명진(봉은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였다고 하네요 춘성 스님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은 없었어요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욕쟁이 스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죽한 욕설을 무차별로 쏟아내는 스님이었지요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채 으시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춘성 스님은 아무리 지체가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즉석에서 “이 씨부랄 년!”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고 값비싼 털옷을 입고 온 여자의 털옷을 벗게 한뒤 가난한 보살에게 주워버리는 일까지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거침없이 쏟아내는 춘성 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 스님의 욕설에서는 천박한냄새가 나는게 아니라 상큼하고 속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죽하고 질퍽한 춘성스님의 육두문자와 욕설속엔 파격적인 선지(禪旨)가 담겨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 춘성스님이 입적하기전 마지막 게송(偈頌) 만월청산무촌수(滿月靑山無寸樹)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 팔십칠년사(八十七年事) 칠전팔도기(七顚八倒起) 횡설여수설(橫說與竪說)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만월 청산에 나무 한그루 없으니 절벽에서 손을 놓으니 대장부구나 팔십칠년의 일이 일곱번 넘어지고 여덟번 일어나 횡설수설 했으니 붉게 달아오른 화로의 한 조각 눈이구나.

    -* 언제나 변함없는 일송처사 *-

    ▲ 춘성스님의 법문을 듣고 웃으시는 모습(박대통령과 육여사) ...

    ▲ 독립선언 33인중 한분인 만해스님과 백담사 ...

    ▲ 1919년 춘성스님 나이 30세가 되던해 백담사를 떠나 설악산 신흥사(神興寺)주지로 취임하고 1925년 금강산 석왕사 주지가 되었지요 ...

    ▲ 그후 망월사와 보문사 주지도 하셨지요 ...

    ▲ 설악산 신흥사 극락보전 ...

    ▲ 금강산에 있는 석왕사는 조선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만난곳으로 조선시대때는 왕사로 번창하였으며 지금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지요 춘성스님은 이 사찰의 주지스님도 하셨다 하네요 ...

    ▲ 춘성스님이 계셨던 도봉산 망월사 ...

    ▲ 강화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 ...

    ▲ 예수천국 불신지옥 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니 ...

    ▲ 부활하는것은 내 X밖게 보지 못했으니 내 X을 믿으라고 일갈하신 춘성스님ㅎㅎ ...

    ▲ 춘성스님의 젊었을때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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