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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없는 우체통

[스크랩] 나는놀면서살았다 15-1 - 실패한 꿈은 또 다른 꿈을 낳았다

작성시간15.06.12|조회수52 목록 댓글 0

실패한 꿈(?)은 또 다른 꿈을 낳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찌 그렇게 생각도, 계산도 없이 뛰어들기부터 했는지?

부딪히고, 배우고, 엎어지고, 깨닫고...

아무래도 머리 나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다.

 

동남아에 리틀코리아를 만들고 싶다는 내 꿈은 실패로 끝났다.

잃어버린 1?

아니다.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름난 휴양지와 경관 좋은 섬들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땅을 보기 위해 오지를 골라 찾아다녀서

현지인들의 삶을 가까이 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외국 관광객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꾸미지 않는 날 것의 모습이었다.

해 보기나 해봤어?”

보고 느끼고 알게 된 몇 푼의 지식은

응용으로 풀 수 있는 수학문제처럼

살면서 부딪히는 위기상황과 희로애락에 대처하는 능력(?)이 됐다.

내겐 경험만큼 큰 배움은 없다.

 

유명 관광지만 다녔다면 절대로 볼 수 없고 느끼지 못했던 모습들...

그 안에서 내가 꿈꾸기 시작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나는 여러 개의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시기, 내 관심사는 민속골동품과 외국 공예품이었다.

중국무역의 쓰디쓴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든지 늘 현지인들이 자주 다니는 전통시장을 찾았다.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일반 관광객들이 살 수 없는 진기한(?) 공예품들을 사들였다.

여행을 많이 다닌 분이라면 자주 들었을 것이다.

 

핸드 메이드, 핸드 메이드 ^^”

한국 사람들이 핸드메이드라면 ~’ 가는 걸 어찌 아는지,

이건 비단 동남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억양은 다르지만,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헤이~ 코리안, 핸드 메이드 ^^

인구가 적은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핸드메이드는 어쩌면 경제논리다.

대규모 공산품을 만들어봐야 수요에 한계가 있으니,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하고 관광 및 농축산업에 의존도가 높다.

많은 인구에 인건비가 싼 동남아는 북유럽 선진국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역시 핸드 메이드의 천국이다.

 

<전통시장에서 횡재를 만나다>

동남아는 중국인이 거의 모든 상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하노이 인근 작은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좀 크다 싶은 상점에는 중국 물건이 가판을 차지하고,

현지의 물건은 한쪽 귀퉁이에 밀려나 있었다.

중국 물건은 워낙 많이 봐서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보는 둥 마는 둥 시장 모퉁이를 지나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이 있었다.

 

 

 

저게 뭐지?”

코스트! (커피잔 받침)

흙으로 만든 접시에 학생이나 아마추어 미술가들이 그림을 그려 구운 것이었다.

그림의 종류는 백여 가지로 투박하지만 순수한 아름다움이 묻어났다.

아마추어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면 개당 10만원은 넘을 것 같았다.

 

나의 유창한(?) 콩글리시로

한개 6천원 달라는 것을 구매 수량과 추가 주문을 미끼로

3천원에 100개를 샀다.

30만원 밖에 안 되지만 명품을 산 것 보다 더 기분이 좋다.

난 늘 작은 것에서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소탐대실할 스타일이라 그런가?

 

여행을 다녀오면 가끔 놀이판을 만든다.

동창회나 모임 날!

성규야, 이번에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왔어?”

모임을 더 즐겁게 해 줄 신나는 경매를 진행한다.

3만원에 낙찰 받은 미숙이가 지갑을 연다.

미숙이는 초딩 때 소시지란 것을 처음으로 맛보게 해 주었으니깐,

만원만 내라~.“

 

3만원에 낙찰 받은 영우가 성규야 ~ 여기 있다 3만원.”

니는 일마 시험칠 때 답 안 보여줬고, 너 연봉 꽤 높지? 5만원 안 주면, 유찰이다~”

에이 씨 **, 여기 있다. 5만원 ~ 퉤퉤 ㅋㅋ

부자증세는 내가 원조다^^.

 

며칠 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성규야, 코스트 좀 더 구해주면 안되겠나? 내 지인들이 사 달라고 난리다.”

그거 물 건너 온 거야. 몇 개씩 가지고 올 수가 없다. 주문량이 많으면 몰라도.”

며칠 뒤, 공동구매로 100개를 사고 싶다고 했다.

어디다 쓸려고 그렇게 많이 사니?”

차받침으로는 아까워서 못 쓰고 장식용으로 사용하려고 해

 

난 여행을 다니면 가이드나 인솔자와 친하게 지낸다.

그들은 덕지덕지 붙은 가방의 항공택만 봐도 나를 알아본다.

저 사람은 진짜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이구나!’

또한 그들을 귀찮게 하기 보다는 도와주는 사람인 것을~~

 

가이드나 인솔자도 하나의 직업이다.

여행사간 과열경쟁으로 마이너스 여행상품을 내놓다보니,

관광객에게 쇼핑센터를 알선해주고 수수료를 받아

수입을 충당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어느 쇼핑센터를 데리고 가더라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들어준다.

일한 만큼 벌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원리 아니던가?

 

지금도 내 휴대폰에는 가이드나 인솔자의 전화번호가 꽤 저장돼있다.

베트남 인솔자에게 전화를 했다.

영규야, 이번에 하노이 누가 가지?”

다음 주 목요일 제가 나갑니다.”

그래. 하노이 **시장에서 코스터 200개만 가지고 온나.

개당 3천원 주면 된다.

상품 사진과 가게 전화번호 줄 테니깐 미리 주문하고 핸드캐리로 가져와.”

그리고 베트남 시장상인에게 전화를 한다.

아줌마, 내가 추가주문 한다고 했죠?”

상품의 양이 많으면 항공과 배편으로도 수입을 하지만,

웬만한 건 그냥 여행편으로 가져 오는 게 낫다.

가이드의 투잡이며 난 고정인건비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그 친구들에게 약간의 수고비와 더불어

가끔은 한 잔 술에 인생 상담도 덤으로 해주지만~

하지만, 이건 불법이다. ㅋㅋ

 

판매할 상품은 관세를 내어야 하는데

여행의 선물로 위장하여 반입하는 것이다.

이 칼럼을 보고 관세청에서 잡으러 오지는 않겠지~ㅋㅋ

100개는 친구에게 3만원에 팔고,

나머지 100개는 커피숍 오픈 때 사용한다며 인테리어회사가 가지고 갔다.

한번에 540만원 남는 게 꽤 괜찮은 장사지 않은가...

 

1년이 지난 어느 날,

대학교수로 있는 지인이 자연의소리에서 남은 코스트 2개를 사갔다.

정사장, 이것을 어디서 구입하셨습니까?

이 그림의 화가를 만날 수 있나요?”

 

오~ 마이 갓!!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찾겠는가??

이만하면 내 눈썰미도 꽤 쓸 만하네.’

그림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는 교수를 보면서 흡족하다.

 

물건을 사기전에 인터넷으로 비슷한 상품을 찾는 건 기본이다.

사고 싶은 상품은 사진을 찍어서 한국에 있는 직원과 지인 몇 명에게 전화한다.

국내에 비슷한 제품이 있는지 찾아보고, 1시간 안에 연락 줘.”

90%이상 한국에 없는 물건들을 찾아낸다면 믿겠는가?

이것도 중국에서 제조무역을 할 때 겪은 시행착오에서 길러진 것이다.

 

, 무역은 수입에서 소비자까지의 유통과정에서 10배는 기본이다.

너무 많이 남긴다라고 생각을 하는가?

무역을 해 보셨다면 아실 것이다.

재고, 불량률, 출장비, 물류비,관세 및 각종 세금을 제하면 본전인 경우도 허다하다.

 

젊은이들이여!

여행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그대들은 나의 해외바이어 육성 프로그램에 말려들었다.

자소 쇼핑몰 (www. zaso.co,kr )에 오픈마켓을 만들 것이다.

여행도 즐기면서 외국의 특색 있는 공예품을

자소몰에 공급을 하는 것이 어떠하신가?

 

리틀코리아 건설의 실패한 꿈은 또 다른 꿈을 꾸게했다.

외국 공예품. 아마추어작품.민속공예품의 쇼핑몰 탄생은

그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 여행에서 시간이 된다면 민가를 방문해보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숙박한 적이 있다.

다음날 아침 숙소로 돌아오기 전 동네를 돌면서 민가 구경을 다녔다.

 

원목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을 지나갈 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열심히 깎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 가까이 다가갔다.

높이 70cm에 폭 25cm 정도의 항아리를 깎고 있었다.

꼭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같았다.

 

기능공들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정교한 문양이 새겨지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솜씨에 반해 한참을 넋놓고 구경하다가 직접 깎아보는 체험도 했다.

컨테이너 하나를 빌려 종류별로 한국에 보내고 싶었지만,

당시는 말레이시아에서 무역루트가 끊긴 상태였다.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는 나무항아리를 9천원에 사서

한국까지 내내 들고 다녔다.

즐겁기도 했지만 얼마나 귀찮던지....

 

그 날도 손에 바리바리 든 짐을 들고 기내에 올랐다.

자주 보는 항공사 승무원이 방긋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도와 드릴까요?”

노 땡큐! 이륙하면 막걸리나 한 잔 갖다 주세요

자주 보이는데다

항상 큰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 내가 보따리 장사로 보였을 것이다.

 

바라만 봐도 장인정신이 넘치는 공예품이었다.

집에 오는 손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걸 어디서 샀어요? 너무 이뻐요.”

 

어느 날, 백화점에 쇼핑 갔다가 똑같은 항아리를 봤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24만원!!

혹시나 해서 규격과 색상 등을 확인했는데,

내가 산 것과 한 배에서 나온 형제였다.

무려 가격 차이가 25배였다.

년이 지난 지금도 말레이시아산 나왕항아리는

그 색깔 그대로 빛을 내고 있다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와 반대로 사는 재미>

나는 각 나라의 돌을 주워 모으는 취미가 있다.

수석 취미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난 발품만 팔면 된다.

동남아의 섬들은 거의 산호초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산호석이 부서져서 모래처럼 가루가 되어있는 해변의 하얀 백사장

 

민다나오 샤말섬에서 리조트를 만들려고 했던 땅 근처는

관광객이 한명도 오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 해변은 특이하게도 모래 대신 산호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주먹 만한 크기부터 차체만큼 큰 것 까지

며칠 동안 텐트를 치고 머물면서 산호석 5개를 주워왔다.

정말 특이한 모양의 산호석이었다.

하긴, 3일 동안 고르고 고른 산호석이지 않은가?

 

자연석이 몇 백만 원에 거래되는 걸 알고 있는가?

그 자연석의 가치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모양만큼은 훨씬 기이하게 생겼다.

사무실과 집에 전시를 해 둔 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난 이것만은 팔지 않으려고 했는데..

1년 동안 매달리는 지인들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작고 앙증맞은 두 개의 산호석은 자연의소리에 아직 있다.

 

친구가 돌을 가져가면서

성규야, 제주도 돌을 반출하면 불법인데, 이건 불법 아니가?”

불법인가걸려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

하긴, 반출한 것도 아니고 한국으로 반입을 한 것인데. 니가 애국자다~ ”

ㅎㅎ... 난 더 큰 애국도 했는데....”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

터키의 에페소.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등.

 

유적지 관리지역에서 벗어난 곳의 돌은 꼭 주워온다.

문양이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

혹시 누가 아는가?

유적에 사용된 돌일 지도.... ㅋㅋ

 

현지 관리인들이 돌을 줍는 모습을 보고도 별 제재를 하지 않는 걸 보면,

결과는 짐작되지만~ !

세계문화유산 1호인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보수공사를 몇 년째 하고 있다.

문화재 공사하는데 내가 가지고 온 문양의 돌이 꼭 필요하다면

그리스로 돌려줄 의사가 있다. ㅋㅋ

보관료 대신 한국어 안내서를 만들어 달라고 할까??

 

 

<여행의 개고생은 추억이 된다>

2008년 무렵 인도네시아에 갈 일이 있었다.

 

자카르타 뿐 아니라 수마트라섬까지 들어가야 하는 강행군!

나를 도와 줄 현지인을 찾던 중

평소 안면이 있던 차상무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정사장님, 우리 형이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데 같이 갈까요?”

. 그렇게 하죠.”

마침 휴가인 친구도 외국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저야 상관없습니다.”

성섭씨와 경찰인 친구 한수씨,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셋이서 인도네시아행 비행기에 탔다.

두 친구는 첫 외국나들이라 다소 들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마중 나온 성섭씨의 형과 인사를 하고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 인도네시아 음식은 익숙하지 않았겠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행님아, 인도네시아 엄청 발전한 나라네. 너무 좋다. 음식도 맛있고.”

 

식사 후 형님의 집에 도착했다.

자카르타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외국인 전용아파트인데,

형님 내외와 20살 초반의 현지 아가씨가 도우미로 살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 앳된 아가씨와 대화를 하는 게 신이 났는지,

안되는 콩글리쉬에 손발까지 써가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날, 김치와 된장찌개에 아침을 먹고 일이야기를 시작했다

형님, 사흘 일정으로 수마트라 섬에 가야 합니다.

현지인 가이드 1명과 한국인 통역을 소개해 주세요.”

정사장, 내가 같이 가줄게.”

그럼 저야 고맙죠. 현지 가이드 한명은 불러주세요.”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현지인의 일처리가 나았다.

성섭씨와 한수씨는 자카르타 관광을 하고 계세요.”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같이 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힘든 일정이라서...”

괜찮아요. 편안 여행보다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요?”

 

우리 셋과 형님, 그리고 현지인 가이드.

5명이 수마트라섬에서도 오지로 들어갔다.

마침 점심시간도 됐고, 근처 식당에 들렀다.

자카르타 시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지금 드셔야 합니다. 저녁에는 식당도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배 멀미와 식당의 강한 향에 두 친구는 아예 먹는 걸 포기했다.

대신 가지고 온 간식을 들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식사 후 다시 배를 타고 더 오지의 섬으로 갔다.

수공예를 만드는 현지인의 집에서 저녁과 아침을 먹었다.

두 친구는 입안에서 날아다니는 알랑미를 몇 번 씹다가,

이참에 다이어트나 해야겠어요. ㅎㅎ

이후 그들의 웃음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점심은 밀림에서 바나나로 때웠다.

꼬박 네 끼를 굶은 친구들은 강행군에 점점 초췌해져갔다.

그날 일을 마친 시간은 오후 5!

바나나로 때운 점심 탓에 시장기가 밀려왔다.

마땅히 갈 곳도 마땅찮고, 근처 낡은 식당에 들어갔다.

 

거기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10평정도 되는 식당 안은 온통 파리떼 뿐이었다.

바닥은 수십만 마리가 밟혀서 엉겨붙어 있었고,

심지어 테이블에도 수백 마리가 죽어서 엉겨붙어 있었다.

그리고, 정체 모를 노란 물이 담긴 그릇과 나뭇가지 몇 개들...

이 때 후각을 자극하는 느끼한 향신료 냄새~~

갑자기 배가 아파오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화장실로 갔다.

볼일을 다 보고 뒤처리 할 것을 찾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양동이에 담긴 물위에 떠있는 노란색의 덩어리들...

그걸 보는 순간 용도가 무엇인지 알았다.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를 수밖에~

왼손으로 뒤처리를 하고 양동이 물에 그 손을 씻었다.

 

그러나 손톱의 그것은...ㅠ.ㅠ

식당에 돌아와 테이블 위 그릇과 나뭇가지의 용도도 알 수 있었다.

왼쪽 손톱에 끼어있는 똥의 뒤처리용 나뭇가지와 물!!

내가 천연덕스럽게 나뭇가지로 손가락의 뒤처리를 하면서

방금 전 화장실에서 봤던 상황을 이야기 했다.

그것도 리얼하게 손을 씻어가면서~~~

~ ~

친구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토해내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을 먹지 못해서 나오는 것도 노란색 물이 전부였지만...~

 

주문한 돼지고기가 나오자, 나는 오른손으로 카레를 먹고 있었다.

맛은 아주 괜찮은 편이었다.

배고픔을 참다못해 친구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성규씨, 숟가락 없어요?”

내가 숟가락 있으면 이렇게 손으로 먹고 있겠어요. 그냥 드세요 ㅎㅎ

 

참고로 인도네시아는 왼손잡이들도 음식만은 오른손으로 먹는다.

왼손은 용변을 볼 때 쓰기 때문에

식사에는 절대 사용하지 않으며, 왼손으로  물건을 주는 것도 실례다.

 

물론 요즘은 웬만한 시내에서 모두 수저를 사용한다.

성섭씨가 오른손으로 카레가 들어간 밥을 집어든 찰나,

아뿔사~

현지인이 일어서려다 노란색 뒤처리용 그릇을 엎질렀다.

그런데 하필 그게 성섭씨의 카레접시에 쏟아졌다.

그리고는 진짜 똥이 줄줄 흘러나왔다.

~우웩~~

성섭씨는 노란색 물을 입에서 쏟아아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한수씨도 노란물과 함께 우웩 우웩 합창~~~

현지 생존력이라면 끝판왕인 나 역시도

그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그 다음날 두 친구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아무 것도 못 먹은 상태에서 강행군까지 겹치면서 기진맥진이었다.

겨우 자카르타에 건너와 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는 탈수증세가 심각하다며 최소한 사나흘은 입원하기를 권했다.

병원에서 링거로 지낸 두 친구는 사흘 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도 카레를 먹지 못하는 성섭씨와 한수씨..

두 사람에겐 평생 잊지 못할 첫 번 째 해외여행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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