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서산대사를 만나다

작성자김현거사|작성시간26.06.10|조회수26 목록 댓글 0

김윤수

5월 27일 오전 10:23 ·

 

[후기] 지리산에서 서산대사를 만나다

때 : 2026. 5. 23.

1.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지금은 내가 그로구나’. 서산대사가 입적하실 때 남긴 말이다. 나는 저 말을 듣고 서산대사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그 변화는 순환한다. 우주 만물의 운행 규칙, 그것을 우리는 이치라고 한다. 그 이치는 지극히 조화로우며 쉼 없이 순환한다. 따라서 존재의 본질은 이치이며 우리는 그 이치를 흔히 도(道)라고 한다. 깨달음이란 그 도를 아는 것이고 내 존재의 근원이 그 도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80년 전에 그가 나였으니 나는 존재하게 된 것이고, 지금 내가 그임을 알았으니 나는 그 존재의 근원을 알았다는 것이다. 내 존재의 근원을 알았으니 나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生과 死는 순환의 이치일 따름이니 그 이치를 아는 나는 시공을 초월하여 끊임없는 윤회의 고리를 벗어났으니, 서산대사는 해탈하여 열반에 든 것이다.

서산대사는 초년에는 지리산, 중년에는 금강산, 말년에는 묘향산에 주로 거처했다. 돌아가신 후에는 대흥사에 머무른다. 대사는 웅장하기는 지리산, 아름답기는 금강산, 웅장하고 아름답기는 묘향산이라고 했다. 지금은 금강산도 묘향산도 갈 볼 수 없다. 나 죽기 전에는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대사가 그리도 좋다고 하는 묘향산은 꼭 가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 직접 감각으로 느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내가 답사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

5월이 다 갈 즈음에 서산대사를 만나러 지리산을 찾았다. 대사가 자주 다녔던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에 이르는 서산대사길을 걷고 대사가 출가했던 원통암을 찾았다. 몇 번 간 길이지만, 봄에 가기는 처음이다. 간밤에 비 온다는 소식에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냥 흐릴 뿐 비가 오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이번 답사를 함께 한 사람은 모두 42명, 마산과 거창에 사는 두 사람은 버스 대신 각자 차로 왔다.

산은 역시 지리산이다. 그 웅장함이란, 품고 있는 사연들은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르러도 다함이 없다. 지리산 여기저기 좋아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그중에 제일 좋아하는 곳은 칠선계곡과 원통암이다. 칠선계곡은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힌다. 수려한 경관에 비해 험난한 산세로 인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20여 년 거의 매주 산을 다닌 내가 죽기 전에 꼭 걷고 싶은 곳 중의 하나가 칠선계곡을 통해 천왕봉에 오르는 것이다. 서산대사를 만나는 길은 두 가지이다. 먼저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4.2km를 계곡 따라 걷고, 의신마을에서 원통암까지 산길 1km를 걸으면 된다.

서산대사길을 걷노라면 곳곳에서 지리산의 속 깊은 정서를 느낄 수 있다. 틈틈이 보이는 민가에서, 작은 돌밭에서, 까치밥 달린 감나무에서, 그리고 걷는 내내 이어지는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에서 지리산은 긴 세월의 수많은 사연을 소곤소곤 들려준다. 사연 없는 존재는 없다. 산도 나무도 가녀린 풀 잎사귀조차도 사연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사연이 사연이라고 하지만, 세상에 그만한 사연 없는 이도 없다. 사연의 깊이는 실제적 크기가 아니라 사람마다 느끼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길은 우주에 가득한 사연들을 마주치는 소통과 공감의 통로이다. 빈 마음으로 오감을 열어젖히고 걸으면 온갖 사연들이 시나브로 스며든다.

멀리 지리산역사관이 보이면 그곳이 의신마을이다. 의신마을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 상류 산간 분지에 터를 잡고 있다. 행정 구역으로는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의 자연 마을에 속한다. 의신마을은 처음에 마을 터에 의신사(義神寺) 등과 같은 암자들이 생기면서 사하촌으로 형성되었다. 의신사는 17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전해지며, 1611~1680년 사이의 어느 때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신마을에는 의신사 외에도 대승암, 고대승, 상대승, 동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 의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효온(1454~1492)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김일손(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보인다. 남효온은 1487년(성종 18) 10월 1일에 의신사를 다녀갔다. 한편 송광연이 1680년(숙종 6) 윤달 8월에 지리산을 기행하고 적은 「두류록(頭流錄)」에 의신사 옛터가 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 이미 의신사가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신마을이 있는 대성리는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대성리 북쪽에 지리산 토끼봉과 명선봉, 삼각봉, 형제봉, 벽소령,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등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데, 마을은 그 산골짜기 아래에 있다. 의신마을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의 은거지로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인근의 대성골은 빨치산이 몰살한 곳이며, 의신마을 위쪽에 있는 빗점골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망한 곳이다. 빨치산은 우리 민족의 크나큰 아픈 사연 덩어리다. 분단과 이념의 칼날 아래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상처받았는가. 그 빨치산이 제일 많았던 곳이 지리산이다. 아픈 사연을 품고 있으면 그 또한 아프다. 지리산은 얼마나 아플까.

의신마을은 동학 농민 운동과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의신마을은 벽소령을 통해 하동과 함양, 남원 등지로 이어지는 고개 길목에 자리한 탓에 전란 시에는 혁명과 의병 활동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1월 말,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항일 의병 100여 명이 의신마을에 내려왔다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 전사하고, 일부만 벽소령을 넘어 산청으로 대피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그때 숨진 항일 투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 산허리 양지바른 곳에 묻고 ‘무명항일투사묘지’를 조성하였다. 지리산 중에서도 의신마을은 아픔이 특히 많은 곳이다. 그 많은 아픈 사연들을 담고 살았으니 의신마을인들 온전한 정신이었을까.

3.

노루목 식당에서 27가지 나물 반찬으로 점심을 했다. 송이버섯과 능성어는 물론 지리산에서만 먹을 수 있는 나물들도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이 지역 특산 막걸리를 사서 테이블마다 돌렸다. 오지 답사 회원들은 情 많은 넉넉한 인심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동행하니 매번 답사가 모두 즐겁다. 나는 치과 치료 중이어서 막걸리 한 잔 마시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점심이 끝난 후 곧바로 원통암으로 향했다. 원통암 가는 길은 온전한 산길이고 대체로 돌길이다. 인적이 많지 않은 곳인데, 예전에는 사람들이 제법 살았고 지금보다는 많이 다녔을 것 같다. 의신마을에서 원통암 가는 길은 일찍이 서산대사가 걸었고, 지리산 남부군들과 토벌대가 걸었고, 수백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을 화전민들이 걸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엄숙해졌다. 서산대사길처럼 원통암 가는 길도 내내 물을 끼고 걸었다. 길이 험해서 그런지 이정표에 적힌 0.9km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경사가 심해지더니 햇볕이 들고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서 중생을 내려보고 있었다. 아! 여기가 원통암이구나. 원통(圓通)이란 ‘이르지 아니한 데 없이 널리 두루 통달한다’라는 뜻으로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관세음보살과 관련이 있다. 선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기가 선계(仙界)가 아닌가 싶었다. 지리산의 많은 사찰 중에서 가장 청정하고 고요한 암자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산이 크고 골이 깊은 지리산에는 사찰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원통암이 가장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화개천을 따라 서산대사길을 걷거나 이웃한 대성골을 찾는 사람들도 원통암은 잘 찾지 않는다. 서산대사가 생존했던 시기에는 이곳이 지금보다 더 첩첩산중이었을 테니 그가 이곳에서 출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오는 것만으로 이미 수행이고, 도착하면 이미 속세를 벗어났을 것이니 말이다.

많지는 않지만, 잘 가꾸어진 차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차나무는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마주 본다고 해서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 한다. 그나저나 절이 이처럼 깨끗한 것을 보면 원통암 스님의 성품은 겨울 개울의 얼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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