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生家)와 음택(陰宅)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명당(明堂)이 많기로는 충청도(忠淸道)에서도 남도(南道)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남도에서 천하 명산(名山)으로 손꼽히는 계룡산(鷄龍山)은 조선(朝鮮)이 창건되고, 천도(遷都)후보지로 낙점되면서 세인(世人)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예산(禮山)의 가야산(伽倻山) 지령(地靈)은 대원군(大院君)의 야심찬 지략에 의해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2대에 걸쳐 제왕(帝王)을 배출한 명산이 되었다.
또한 여말선초(麗末鮮初)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과 그 후손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조선의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 그리고 세조 때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成三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한용운(韓龍雲)스님, 윤봉길(尹奉吉)의사, 김좌진(金佐鎭)장군, 유관순(柳寬順)열사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사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삼촌으로 이승만 정권 아래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5·16 군사쿠데타 후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에서 당의장을 지낸 윤치영씨와, 제 5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대권(大權)에 도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전(目前)에서 좌절한 조병옥(趙炳玉)박사, 한때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을 누린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 등.... 그 외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이곳 충남에서 나왔다.
| 윤보선 생가위성도 |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196호인 충남 아산시(牙山市) 둔포면(屯浦面) 신항리(新項里)143 ‘새말’ 이다.
예전의 둔포는 군계천을 이용하여 배가 드나들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수로(水路)가 되었다.
45번 도로를 타고 약 2km를 전진하다가, 관대천 다리를 건너, 관대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신항리로 연결된다. 이곳에서 나지막한 고갯길을 넘으면 약간 언덕바지를 이루는 동남향(東南向)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나타나는데, 한때 이곳에서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윤씨들이 집중 조명을 받은 집성촌 고택 사이로 윤보선 생가(生家)가 터를 정했다.
| 생가전방의 안산 |
대문 앞의 안내판에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3년여에 걸쳐 윤 대통령의 부친인 윤치소가 건립하였다는 글귀가 보인다.
윤보선 생가는 보면 볼수록 크고, 당시에는 다른 일반주택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라 여겨진다. 하늘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문이 딸린 행랑채가 나타나고,
| 외당의 사랑채 |
다시 중문(中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가면 조선시대 마님이 거처하였음직한 안채가 나온다.
| 생가 솟을대문 |
| 솟을대문위의 문구 |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고택의 구조가 조금은 특이하다. 대문을 열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ㄴ" 字 구조의 벽면을 돌아 들어가도록 설계되었는데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내당(안채) |
행랑채 오른쪽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누각처럼 지은 별채가 보이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추녀와 지붕의 기와 등이 서울의 고관대작들이나 사용했음직한 재질과 기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보선은 이곳에서 8살까지 살다가 서울생활을 하였으며, 10살 때, 종로구 안국동 8번지, 100칸짜리 저택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터를 일으킨 지맥(地脈)은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나온,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일군 금북정맥(錦北正脈)의 줄기가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칠현산(516m), 청룡산(400m), 성거산(579m), 금성산(424m)을 지나서 국사봉(國師峰: 403m)을 솟구치고 다시 북진(北進)하는 용맥(龍脈)이 음봉마을을 지나 신항리로 들어와, 그 중 한 지맥(枝脈)이 북동진(北東進)하여 마을의 진산(鎭山)을 일으킨다.
이곳 형세는 주변 산들이 낮고 원만한 구릉(丘陵)아래로 여러 마을이 듬성듬성 터전을 일구었는데, 마을 뒤로 펼쳐지는 일자문성(一字文星)처럼 낮게 이어지는 언덕을 배(背)로 삼아, 앞쪽으로 전개되는 관대천의 넓은 평양지(平洋地)를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해평윤씨(海平尹氏)들의 고택은 중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1907년에 윤보선의 부친인 윤치소(尹致昭)가 지은 것으로 전하지만 정확한 건축시기를 놓고 여러 이설이 나돌기도 한다. 윤씨들의 본향(本鄕)인 해평(海平)이란 지명은 경북 선산지역으로 선산(조선시대)은 예전의 부(府)로, 선산부 안에 해평현(海平縣)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회원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자 사람들을 찾았으나 빈집처럼 모든 방문이 닫혀있고, 마루 아래에는 신발 몇 켤레가 덜렁 놓여져 있을 뿐 인기척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토록 큰 갑부(甲富)와 제왕(帝王)을 탄생시킨 지세(地勢)와 지령(地靈)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풍수를 연구하는 필자로서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도대체 터에 어떤 기운이 내재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터 중에서 윤씨 집안에 부귀(富貴)를 안긴 것일까?
그 해답은 윤보선 집안의 적덕(積德)과 공덕(功德)이 함께 어우러진 유명한 일화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윤보선의 한참 윗대가 호남지방으로 낙향(落鄕)하여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나왔는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다가 스님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 즉,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공양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또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다름없이 옆집에서 꾸어다가 보시를 한다. 세 번째 방문 역시 그러한 성의가 이어졌는데, 그 고마운 마음씨에 감동한 스님이 보답으로 명당자리 하나를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에 조상 묘를 쓰고 한참 후대부터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다음은 내포지역의 세간(世間)에서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다.
조선 후기 공찬(恭贊) 벼슬을 지낸 윤보선의 고조부 윤득실이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았는데, 그는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에게 선행(善行)을 당부하며 죽는다.
아들 대에 와서는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득실의 3남 교동(윤보선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궁핍한 살림 살이었지만 죽을 쑤어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해 적선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교동(취동공)이 외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길가에 빈사 상태로 쓰러진 스님을 발견한다. 날씨는 추운 겨울철이었고, 그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방 하나를 내어주고, 극진히 보살핀다. 여러 날 취동공의 보호를 받은 스님이 원기를 회복하자 떠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기에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도리였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 푼 없는 무일푼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취동공에게 제안을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고 떠나는 것이 도리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소생이 배운 것은 터를 잡아주는 것 밖에 없으니, 묏자리를 하나 잡아드리는 것으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한다.
스님은 취동공과 함께 이산 저산을 살피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오더니 제왕지지(帝王之地)란 터를 점지해 준다. 풍수를 잘 알지 못한 취동공은 무엇보다 한겨울에 춥지 않고, 바람이 잠잠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양지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후 뒤늦게 아들도 낳고, 가계가 펴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들 영렬이 지방 군수가 되고, 점점 재물이 모아져 만석궁의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은 것과, 명당을 얻으려면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 윤보선 묘소 용맥도 |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비룡산(飛龍山)으로 답사코스를 선정하고, 산길을 따라 오르자 묘소를 오르는 계단이 나타나고, 좌측 공터에 오래된 비각(碑閣)이 이방인을 반기는데,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이 쓴 '경천효친(敬天孝親)' 이란 글귀의 현판과 함께, 현판 좌측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전국이 술렁이던 1980년 7월에 윤보선 전 대통령이 손수 썼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라는 글씨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 비각 |
비각 안에는 윤 대통령의 조부인 윤영렬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그 옆으로 부친인 윤치소의 불망비(不忘碑)가 각각 두 개씩 서 있고 비각 옆에도 2기의 비석이 또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계단을 따라 묘역을 오르는데, 이곳 묘역의 성두(星頭)에서 후부(厚溥)한 음룡(陰龍)으로 이어지는 주맥(主脈) 맨 아래쪽에 그의 부친인 윤치소의 묘가 나타나고, 그 위로는 증조부인 윤교동(尹敎東), 그리고 또 그 위에는 고조부인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가 합장(合葬)된 묘소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윤보선 선영에서 바라본 조안산 |
윤보선의 집안에 발복을 안겼다는 윤득실의 묘에서 격룡(格龍)한다. 간룡입수(艮龍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이다.
| 윤보선 묘소 |
묘역의 맨 위쪽을 점한 윤 대통령의 음택은 영부인 공덕귀 여사와 합장된 소위 역장(逆葬)을 한 묘소인데, 묘역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조상이 귀여운 손자를 무등 태웠다고 적어놓았다.
그리고 조상들 중에서 조부인 윤영렬의 묘만 이곳에 있지 않고,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 산자락 아래에 부인과 합장(合葬)묘로 조성되어 있다.
윤보선은 1960년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경무대의 주인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청와대(靑瓦臺)" 란 명칭으로 대통령궁의 이름을 변경하였는데,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실각되면서, 결국 글자가 간직한 오행(五行)의 영동력처럼, 서쪽사람(景武臺의 ‘武’ 字는 서쪽을 상징함)이 자리를 동쪽(靑)태생(박정희)에게 양보한 비운(悲運)의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도 국토의 서쪽보다, 동쪽출신들이 청와대란 영성을 등에 업고 대통령궁의 주인으로 입성하는 추세이다.
이곳 윤보선의 묘소는 예전에는 별로 꾸밈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봉분을 두 배 정도 키우고,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소 앞에는 단촐한 와비(臥碑)와 함께, 운치가 베어나는 조경수 두 그루가 산객을 마중한다.
| 천혈에 조성된 윤보선 음택 |
이곳 묘소는 삼재정혈법(三才停穴法)상 천혈(天穴)에 해당한다.
삼재정혈이란 혈이 위치한 곳을 산 높이에 따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상정(上停), 중정(中停), 하정(下停)이라 하기도 하고, 천혈(天穴), 인혈(人穴), 지혈(地穴)로도 분류한다.
천혈(天穴)은 혈이 산정(山頂)부분에 맺기 때문에, 발복은 주로 귀(貴)로 나타나며, 단점이라면 풍취(風吹)를 갈무리하는 사격(砂格)의 유무가 관건이다. 이곳처럼 묘역의 전후방(前後方)을 둘러싼 주변의 사격들이 터보다 높게 호종(護從)해야 점혈(占穴)이 가능하다. 또 천혈을 개혈(蓋穴), 압살혈(壓殺穴)이라고도 하며, 산꼭대기에 맺는 혈을 앙고혈(仰高穴), 산정 아래 산기슭에 등을 대고 앞을 바라보듯이 조성하는 것을 빙고혈(憑高穴)이라 하는데, 윤보선의 묘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보선의 묘역은 부모봉(父母峰)에서 급경사(急傾斜)로 낙맥(落脈)하여 몸통을 묶어 과협(過峽)을 일구고는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성두(星頭)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산등성이를 깊게 개착(開鑿)하여 묘역을 조성하였고, 묘소 좌측보다 우측으로 높은 사성(莎城)을 둘렀는데, 아마도 전반적인 국세가 청룡자락에 비해 부실한 백호방(白虎方)의 장풍(藏風)을 고려한 비보(裨補)차원으로 당판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 백호방이 허전하다보니 백호쪽의 사성이 더 높다 |
묘소에서 나경(羅經)으로 격침(格針)한다. 간인(艮寅)으로 치오른 주룡이 간입수(艮入首) 성봉(成峰)하여,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좌향(坐向)을 놓아, 음룡(陰龍)에 양향(陽向)이 되어,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불배합(不配合)이다. 수법에 의한 파구처(破口處)는 우선수(右旋水) 정미파(丁未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자손(子孫)들이 번성하고, 부귀발복(富貴發福)을 이루는데, 차자(次子)가 장자(長子)보다 먼저 발복(發福)을 이룬다는 향법(向法)이다.
|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청룡방의 사격들 |
전방(前方)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사격(砂格)들이 특이하다. 아래쪽 윤득실의 묘소에서는 조망하기 어려운 길사(吉砂)들이 이곳 묘소에서는 서로 키 재기를 하는 듯한 모습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바로 전방의 안산(案山)은 손을 펼치면 닿을 듯이 정겹고, 그 뒤로 겹겹이 연이어지는 조산(朝山)이 세 겹을 이루면서, 감싸는데, 맨 앞의 안산의 모습은 방정(方正)한 토성체(土星體)이고, 바로 뒤의 조산은 둥그런 형상의 금성체(金星體), 그 뒤 조산은 물결처럼 너울대는 수성체(水星體)의 형상을 이루며, 혈장의 기운을 배가(倍加)시킨다.
| 이기와 형기가 연주체로 연결되며 어우러진다. |
그리고 주봉에서 낙맥한 후룡(後龍)은 비룡(飛龍)으로 치올라 탐랑(貪狼) 목성체(木星體)의 성두(星頭)를 일구면서, 입수처(入首處)로 공(供)하고, 혈장의 좌(坐)는 간좌(艮坐)가 되어 삼합오행(三合五行)의 화(火)로 매김되며, 성두에서 좌(坐)로, 좌에서 안산과 조산으로 상생하는 이기(理氣)의 기운과 형기(形氣)의 흐름이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를 이루는 연주체(聯珠體)로 이어진다.
이곳 형국은 비룡산(飛龍山)이란 산 이름에 걸맞게 몸통을 위로 치오르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성두 아래에 묘역을 조성하다 보니 호화스러운 석물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거나 간소하게 치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 부모봉에서 낙맥하여 과협처에서 몸통을 묶고 비룡으로 치오르는 용맥 |
아마도 그러한 연유는 하늘을 나는 비금수(飛禽獸)형국의 경우, 묘소 주변에 무거운 돌을 놓거나 비석(碑石), 석물(石物) 등을 호화스럽게 설치하게 되면, 날짐승의 경우, 날지를 못하고, 새둥지에 해당하는 경우, 알이 깨질 위험 등이 있다는 연유(緣由)로 해석할 수 있다.
윤보선 생가(生家)의 좌향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대문(大門)의 위치가 남쪽인 이방(離方)으로, 동사택(東四宅)구조와 함께, 뒤가 높고 앞이 낮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전형적인 배치와 함께, 일조(日照)와 배수(排水)가 용이하도록 대지(垈地) 또한 방정(方正)한 모습이다.
그리고 대문과 사랑채, 중문과 안방의 위치가 바로 보이지 않고, 서로 비껴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담장도 적절한 높이가 되어 시골말의 정취가 물씬 베어 나온다. 내당(內堂)앞에 담장을 따라 일구어놓은 화단의 규모도 적절하여 전체적인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한 가상(家相)이다.
예전의 가옥구조는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 보기어렵지만 바로 옆 윤일선(전 서울대 총장)이 살던 집과 윤보선 생가사이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큰 곳간이 있었는데, 추수가 끝나는 가을철이면 전국의 소작인들이 보내는 곡식을 실은 수레가 줄을 이었는데, 창고는 물론, 집 안팎까지 쌓고도 남아, 마을의 공터와 심지어는 인근 온양역까지 곡식이 넘쳐난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한다.
이 터의 지령(地靈)을 이어받은 윤보선은 1897년 윤치소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경천(敬天)이라 하였고, 호는 해위(海韋)이다.
윗대 조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요직으로 등과(登科)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소(尹斗壽: 1533~1601)를 들 수 있다.
윤두소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여러 대신들이 조정을 함흥으로 옮기자고 주청하여 선조가 그 뜻에 따랐는데, 윤두수만 함흥보다 방어하기가 유리한 영변(寧邊)으로 옮길 것을 강하게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그의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한 것으로 전하는 인물이다. 윤보선은 그의 10대손이다.
또한 조부(祖父)는 구한말에 안성군수 겸 삼남토포사(三南討捕使)를 지낸 윤영렬(尹英烈)인데, 지방관직으로 재직 시 많은 선정을 베풀어 당시 주민들이 세운 선정비(善政碑)와 공적비(功績碑)만도 4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전한다. 결국 그 소문이 왕에게 알려지면서 어사(御使)를 겸하였다. 관직 생활을 끝낸 조부는 말년에 지금의 둔포로 정착하였는데, 그 시대에 태어난 손자가 윤보선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고 한다.
윤보선은 8살 때에 서울로 올라와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공부에 전념한 뒤 귀국하여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呂運亨)과 이시영(李始榮) 등을 만나고, 그들의 권유로 다시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6년여의 공부 끝에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귀국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방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한다.
해방이 되고, 허정(許政), 김도연(金度演) 등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그 후 상공부 장관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낸 윤보선은 정치계로 진출하였는데,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승(壓勝)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서,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간접)에서 민주당후보인 윤보선이 민정당 후보인 김창숙을 208대 29란 압도적인 표 차로 4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다.
자료출처 : 한국자연풍수지리언구회장 채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