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스버그 국립 전쟁공원 (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 을 방문했다. 펜실베니아 주 최남단, 메릴랜드 주와 경계 부근에 있는 공원을 방문하면서 느낀점은 남북 전쟁의 치열했던 헌적을 미국은 역사적으로 영원히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당시 게티스버그는 링컨 대통령이 역사 속에 길이 남은 연설, 링컨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로하며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구상에 영원할 것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이라고 했다. 근대 민주주의 정부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링컨의 케티스버그 연설이 행해진 장소이다.
1863년 여름 노예해방 저지하려는 남군과 이에 맞서는 북군이 이 곳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북군의 승리는 남북 전쟁 전체의 판세를 결정적으로 북군 쪽으로 기울게 했다. 당시 전투에서 양쪽 합쳐 모두 5만1000명이 전사했다. 푸른 초원같은 광대한 평야에 자리잡은 이 군사 공원에는 방문센터 옆자리에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 국립묘지(Gettysburg National Cemetry)가 들어서 있으며, 당시 전쟁을 엿 볼수 있는 각종 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다. 전투 지역이 워낙 광대하여, 방문센터 프리젠테이션(유료)과 차편으로만 대충 구경하는데,우리는 5시간을 소모했지만, 공원안내소에서는 3일 코스라고 말한다.
방문센터로 들어가는 길 목에는 박문센터 박물관과 전쟁에 관한 미디어 프리젠테이션을 마친다음 차트 버스를 이용하며 20여개의 박물관과 조형물등을 구경하기 위해 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방문센터 실내 전경
국립 공원 서비스 박물관과 방문자 센터는 게티스버그 국립 군사 공원 방문을 시작하는 장소이다. 공원 서비스 센터는 게티스버그 주위에 산재한 박물관, 전쟁유적지, 모형물, 국립묘지등의 정보를 안내 받을수 있다.
박물관에 설치된(총 22,300 평방 피트) 남북전쟁 게티즈버그 박물관,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전쟁을 커버하는 인터액티브 전시에서 재공되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유물 및 멀티미디어 프리젠 테이션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게티즈버그 전투와 그 끔직한 여파에 대해 설명도 하고있다. 방문센터에서 정보를 얻고 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하여 표를 구입하여 입장했다.
역사적 기록 영화도 상영하고..
센터는 Gettysburg-의 최종 분노 "피켓의 돌격"을 묘사 복원 된 게티즈버그 원형 파노라마, 나레이션 영화, "자유의 새로운 탄생" 도 볼수있다. 그 중에서 마음에 찡한 감동을 주는 원형 360도 파노라마는 국립공원 직원이 계획된 매 시간마다 전자 조명과 음향장치를 원격조정하며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고있다.
아래의 파노라마 전자 멀티미디어 장치는 그 당시의 실지 전투장면을 연상하는 조명과 음향장치가 그때 그 상항을 연상하기에 완벽한 느낌을 받았다.
153년전인 1863년 6월말 메릴랜드 중북쪽에서 멀지않은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 게티스버그(Gettysburg)에 무려 17만여명의 군인들이 모였다. 게티스버그 인구는 당시 고작 2,400여명. 17만여명의 군인들을 맞은 이 마을은 미국의 근대사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남북전쟁(Civil War)의 흐름이 여기서 바뀌었기때문이다.
남군(Confederate) 소속인 북버지니아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은 당시, 첸셀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직후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로 진격하던 남군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대규모 북군을 만난 곳이 바로 이곳 게티스버그이다.
6월30일 북군(Union Army)과 첫 소전투를 벌인 남군은 이후 7월1일부터 3일까지 3일동안 대규모 전면전을 펼치며 승리를 꿈꾸었으나, 승기는 북군으로 넘어가게 된다.
엄청난 숫적 우위 속에 조지 고든 미드 장군이 이끄는 북군은 남군을 대파하고 결국 7월4일 남군의 리 장군은 버지니아로 군대를 후퇴하게 된다. 이후 남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격적인 면모를 보이지 못하다가 패전을 맞게 된다.
당시 3일간의 전투로 총 5만1000여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게티스버그 전투 마지막날인 7월3일 1시간 동안 무려 5천명이 전사했다는 통계도 있다.
원형 파노라마 전자 지도 전시장에서 구경하는 할머니와 우리 손자
전투 이후 복구 작업에서 수많은 시신이 발굴되었으며, 민가며 상가며 탄알과 포탄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같은 상흔은 현재 게티스버그 국립 묘지를 비롯해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시내 어디를 가도 1863년 몇월 몇일 어느 스테이트에서 온 군대가 모였던 곳, 전투 했던 곳, 묵었던 곳 등의 안내 문이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준다.
원형 파노라마 전자 지도 전시장, 360도 돌아가며 조명과 음향장치가 실지 전투상항을 보여 주고 있다.
원형 파노라마 구경을 마치면 아래층에 있는 전시벽에서 장소와 지형지물에 관한 전투 설명을 하고 있다.
소역사로 당시 전쟁중에 남군과 북군 지휘관으로 만나 고향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친형제의 이야기도 있다. 한국전쟁의 상처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사용했던 총기와 무기 수백정이 진열되어 있다.
실제 군인들이 어떻게 탄알을 장전해 전투에 나섰는지를 알려주는 비디오도 상영한다.
게티스버그는 이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마을 전체가 역사 유적지이다. 여기서 수집된 수많은 화기(장총, 권총, 탄알 및 대포, 의복, 장구 등)를 비롯해 당시의 문화상도 알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다.
당시 마을 모습, 전투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림, 군인들의 계급과 이름, 출신 지역도 망라되어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리드(LEED, Lead 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 금상 벽보판이 선명히 눈에 보인다. 미국 그린 빌딩 협의회(U.S. Green Building Council)가 인정한 게티스버그 공원 국립방문센터 건물은 엄격한 친 환경 열관리 기준을 통과하여 금상(LEED Gold)을 받았다.
글/사진 손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