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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팔자 이야기

명 태조 주원장 명조

작성자海印 철학|작성시간12.04.22|조회수935 목록 댓글 0

63 53 43 33 23 13 03 -- 水 水 水  / 水 : 명나라 태조 洪武帝 주원장 어조    

戊 丁 丙 乙 甲 癸 --- 丁 丁 壬 戊 / 甲 : 71세 乾命 (1328년 음력 09월 18일)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未 丑 戌 辰 / 寅 - 戌亥: 연공망. 申酉: 일공망

 

질문(質問)[관악(2004/07/29)]: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사주?] 안녕하세요. 고서에 나와 있는 위의 사주가 明나라 태조 주원장의 진짜 사주인지 궁금합니다. 상관격에 상관견관, 제살태과, 土多得病, 재성도 없고, 인성도 없고... 사주가 황제 사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辰戌丑未 四庫格이라서 그런지요? 그렇다고 四庫를 다 갖췄다고 누구나 大發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위의 사주가 진짜 주원장의 사주인지 궁금합니다. 서곡(西谷)님의 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松栢 생각]

 

 

 

63 53 43 33 23 13 03 -- 水 水 水  / 水 : 명나라 태조 洪武帝 주원장 어조    

戊 丁 丙 乙 甲 癸 --- 丁 丁 壬 戊 / 甲 : 71세 乾命 (1328년 음력 09월 18일)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未 丑 戌 辰 / 寅 - 戌亥: 연공망. 申酉: 일공망

 

 

<자평학> 으로 보면 상관패인격에 木이 용신이고 金水木이 희신인데, 용신이라고는 태월 甲寅밖에 없다. 그러니 과연 황제의 명조일까 의심이 들 수 있다.

 

=> 좋은 점은 천간으로 희신 水木이 있고 기신 丁火는 일부 化木하는 점이다. 사주 이론에 크게 병들고 약을 얻으면 대발한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해당되는 듯하다.

 

<삼명학>으로 보면 木人이 신약한데 납음 水가 많은 채 도와주는 점이 기특하다. 장인은 육친적으로 인수성이다.

 

 

@@@ 학인 여러분의 열띤 토론을 기대합니다. 참고로 과거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63 53 43 33 23 13 03 -- 水 水 水  / 水 : 명나라 태조 洪武帝 주원장 어조    

戊 丁 丙 乙 甲 癸 --- 丁 丁 壬 戊 / 甲 : 71세 乾命 (1328년 음력 09월 18일)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未 丑 戌 辰 / 寅 - 戌亥: 연공망. 申酉: 일공망

 

 

* 고아 출신 漢族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라 탁발승, 홍건적 참여 등을 하다가 곽자흥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주원장을 빈농 출신으로서 ‘난세의 거렁뱅이’이며 ‘난세의 호걸’이라고도 말합니다.

 

* 1328년 음력 09월 18일, 양력 10월 21일 안휘성 호주 봉양현에서 가난한 농부 주세진과 진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 후에 주흥종으로 개명했다가 주덕유로, 홍건적군에 참가하는 무렵에는 주원장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1398년 음력 윤5월 10일(양력 6월 24일)에 서거하였다고 위키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24세 乙丑대운 辛卯年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 다음해에 호주에서 반기를 든 곽자흥군에 참가하였습니다. 후에 곽자흥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 28세 乙丑대운 乙未年에 곽자홍이 죽자 郭軍의 지휘권을 장악하였고 홍건적군의 부장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양쯔강을 건너서 태평로를 장악하였습니다.

 

* 29세 乙丑대운 丙申年에 집경로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응천부를 근거지로 삼아 주변세력을 확장시켜 양쯔강의 남북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 41세 丙寅대운 戊申年에 응천부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明, 연호를 洪武로 정했다. 황제가 된 그는 특히 북방에 서달 등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현재 北京)를 점령하였고 원나라 順帝를 몽골고원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정벌하였습니다.

 

* 61세 丙寅대운 戊辰年에 중국 통일을 완성하여 한족의 정통성 유지 및 전제 정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홍무제는 처음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많이 답습하였습니다.

 

* 53세 戊辰대운 庚申年. 1380년 호유용의 옥(獄)을 기화로 중서성을 폐지하고, 이때부터 재상을 두지 않고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습니다. 감찰 면에서도 어사대를 폐지하고 도찰원을 두어 어사의 지위를 낮추었으며 군사 면에서도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5군 도독부로 분할하였습니다. 지방의 통치는 행중서성을 폐지하고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 등 3권으로 분할하고 중앙에 직속시켰습니다.

 

* 54세 戊辰대운 辛酉年. 1381년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이갑제(里甲制)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혹독한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빈곤하게 성장한 홍무제는 민중의 도덕규범인 육유를 정했으며 교민방문을 반포하여 인민이 지켜야 할 본분을 가르쳤고 황제에게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유용의 옥(獄)에 이어서 1393년 남옥의 옥(獄)이 일어나자 많은 공신과 숙장들을 없앴습니다. 말년에 시의심이 생겨서 황태자 표(標)를 잃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가운데 병으로 죽었습니다. 묘호는 태조(太祖)입니다.

 

* 71세 己巳대운 戊寅年에 불귀객이 되었습니다.

 

 

=> 아래는 퍼온 원본 글입니다.

 

 

 

 

 

胎月癸丑

水水水木            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丁丁壬戊            건명(乾命). 1328년 음력(陰曆) 9월 18일생

未丑戌辰            신유공망(申酉空亡). 잡기상관격(雜氣傷官格)

      戊               상관견관(傷官見官). 진술축미(辰戌丑未) 구족(具足)

戊丁丙乙甲癸   금(金)이 용신(用神)이고 목(木)이 약신(藥神)인데 둘 다 없습니다.

巳辰卯寅丑子亥   (3運) 

 

질문(質問)[관악(2004/07/29)]: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사주(四柱)?] 안녕하세요. 고서(古書)에 나와 있는 위의 사주(四柱)가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진짜 사주(四柱)인지 궁금합니다. 상관격(傷官格)에 상관견관(傷官見官), 제살태과(制殺太過), 토다득병(土多得病), 재성(財星)도 없고, 인성(印星)도 없고... 사주(四柱)가 황제사주(皇帝四柱)라고 보기에는 무리(無理)가 있어 보입니다. 진술축미(辰戌丑未) 사고격(四庫格)이라서 그런지요? 그렇다고 사고(四庫)를 다 갖췄다고 누구나 대발(大發)하는 것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위의 사주(四柱)가 진짜 주원장(朱元璋)의 사주(四柱)인지 궁금합니다. 서곡(西谷)님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답변(答辯)해 주시면 감사(感謝)하겠습니다.

 

서곡(西谷)의 소견(所見)

 

반갑습니다. 위의 사주(四柱)는 “연해자평정해(淵海子平精解), 심재열(沈載烈), 명문당(明文堂)(1995), p132”에 나와 있는 것으로서 중국(中國)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홍무제(洪武帝)의 사주(四柱)라고 되어 있으나, 이 사주(四柱)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렵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古典)에 나와 있는 사주(四柱)에 대하여 올바르게 판단(判斷)하려면 그 시대(時代)의 상황(狀況)을 잘 이해(理解)해야 되므로 연구자료(硏究資料)로 활용(活用)하기에는 상당(相當)한 무리(無理)가 있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와 같이 국민투표(國民投票)에 의해서 선출(選出)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따른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님께서 지적(指摘)하신 바와 같이 진술축미(辰戌丑未)를 구전(具全)하였다고 해서 모두가 대격(大格)이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진술축미(辰戌丑未)를 구전(俱全)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大統領)의 사주(四柱)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님의 행운(幸運)을 빕니다.

 

서곡(西谷) 정대붕(鄭大鵬) 배상(拜上)

 

서곡(西谷)의 보충설명(補充說明)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중국(中國) 명(明)나라를 건국(建國)한 초대 황제(재위 1368~1398)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를 따라 홍무제(洪武帝)라고 합니다. 고아(孤兒) 출신 한족(漢族)으로 빈한(貧寒)한 환경(環境)에서 자라 탁발승(托鉢僧), 홍건적(紅巾賊) 참여(參與) 등을 하다가 곽자흥(郭子興)의 휘하(麾下)에서 활약(活躍)했으며, 주원장(朱元璋)을 빈농(貧農) 출신(出身)으로서 ‘난세(亂世)의 거렁뱅이’이며 ‘난세(亂世)의 호걸(豪傑)’이라고도 말합니다.

 

1328년 음력(陰曆) 9월 18일, 양력(陽曆) 10월 21일 안휘성(安徽省) 호주(濠州) 봉양현(鳳陽縣)에서 가난(家難)한 농부(農夫) 주세진(朱世珍/仁祖淳皇帝)과 진씨(陳氏/淳皇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무렵의 이름은 주중팔(朱重八), 후(後)에 주흥종(朱興宗)으로 개명(改名)했다가 주덕유(朱德裕)로, 홍건적군(紅巾賊軍)에 참가(參加)하는 무렵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개명(改名)했다. 그리고 1398년 음력(陰曆) 윤5월 10일(양력 6월 24일)에 서거(逝去)하였다고 위키사전에 기록(記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첫째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위 사주(四柱)의 진위여부(眞僞與否)인데, 그렇다면 정확(正確)한 생년월일(生年月日)에 대해 확인(確認)해 봐야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네이버백과사전과 위키사전 등에서 확인(確認)해 보면 생년월일(生年月日)인 1328년 양력(陽曆) 10월 21일은 음력(陰曆)으로는 9월 10일이 되는데 위에서는 음력(陰曆) 9월 18일에 태어났다고 하였고, 음력(陰曆) 9월 18일은 양력(陽曆) 10월 29일이 되니 정확(正確)한 생년월일(生年月日)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1398년 양력(陽曆) 6월 24일에 서거(逝去)하였고 이날을 음력(陰曆)으로 윤5월 10일이라고 하였는데 음력(陰曆)으로는 윤5월 2일이 되며, 윤5월 10일은 양력(陽曆)으로 7월 2일이 되니 서거(逝去)하신 정확(正確)한 날짜도 어느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양력(陽曆) 10월 21일에 서거(逝去)하였다고 하기도 하니... 양력(陽曆) 10월 21일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이날에 서거(逝去)하셨다고 하니... 따라서 위의 사주(四柱)가 주원장(朱元璋)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참조(參照)하시기 바랍니다.

 

만약(萬若) 위의 사주(四柱)가 옳다는 전제하(前提下)에서 아래의 운로(運路)의 흐름과 비교검토(比較檢討)해 보시면 참조(參照)가 되실 것입니다.

 

을운(乙運) 24세인 1351년 신묘년(辛卯年)에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이 일어난 다음해에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에서 반기(反旗)를 든 곽자흥군(郭子興軍)에 참가(參加)하였습니다. 후(後)에 곽자흥(郭子興)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을운(乙運) 28세인 1355년 을미년(乙未年)에 곽자홍(郭子興)이 죽자 곽군(郭軍)의 지휘권(指揮權)을 장악(掌握)하였고 홍건적군(紅巾賊軍)의 부장(部將)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양쯔강(揚子江)을 건너서 태평로(太平路)를 장악(掌握)하였습니다.

 

축운(丑運) 29세 1356년 병신년(丙申年)에 집경로(集慶路/ 後의 應天府/ 南京)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응천부(應天府)를 근거지(根據地)로 삼아 주변세력(周邊勢力)을 확장(擴張)시켜 양쯔강의 남북(南北)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인운(寅運) 41세인 1368년 무신년(戊申年)에 응천부(應天府)에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國號)를 명(明), 연호(年號)를 홍무(洪武)로 정했다. 황제(皇帝)가 된 그는 특히 북방(北方)에 서달(徐達) 등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현재 北京)를 점령하였고 원나라 순제(順帝)를 몽골고원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정벌하였습니다.

 

진운(辰運) 61세인 1388년 무진년(戊辰年)에 중국통일(中國統一)을 완성(完成)하여 한족의 정통성 유지 및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홍무제(洪武帝)는 처음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많이 답습하였습니다.

 

1380년 호유용(胡惟庸)의 옥(獄)을 기화로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고, 이때부터 재상을 두지 않고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켰습니다. 감찰면에서도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어사의 지위를 낮추었으며 군사면에서도 대도독부(大都督府)를 폐지하고 5군 도독부로 분할하였습니다. 지방의 통치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을 폐지하고 포정사(布政司), 안찰사(按察司), 도지휘사(都指揮司) 등 3권으로 분할하고 중앙에 직속시켰습니다.

 

1381년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이갑제(里甲制)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국(中國) 역사상(歷史上) 가장 혹독(酷毒)한 독재체제를 확립(確立)하였다. 빈곤(貧困)하게 성장(成長)한 홍무제(洪武帝)는 민중(民衆)의 도덕규범인 육유(六諭)를 정했으며 교민방문(敎民榜文)을 반포하여 인민이 지켜야 할 본분을 가르쳤고 황제(皇帝)에게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유용(胡惟庸)의 옥(獄)에 이어서 1393년 남옥(藍玉)의 옥(獄)이 일어나자 많은 공신(功臣)과 숙장(宿將)들을 없앴습니다. 말년(末年)에 시의심(猜疑心)이 생겨서 황태자(皇太子) 표(標)를 잃었고 정신적(精神的)으로 불안(不安)한 가운데 병(病)으로 죽었습니다.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입니다.

 

사운(巳運) 71세인 1398년 무인년(戊寅年)에 불귀객(不歸客)이 되었습니다.

 

한국(韓國)에서도 이름만 이야기하면 알 만한 분께서 위의 사주(四柱)을 써놓고는 거지로부터 왕(王)이 된 사람은 최초(最初)로서 명(明)나라의 황제(皇帝)가 되었지만 위의 사주(四柱)를 명쾌(明快)하게 왜 그런 지위(地位)까지 갔는지를 모른다고 하시면서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을 비판(批判)하셨다고 하여 상기(上記)의 글을 올리게 되었으므로 양해(諒解)바랍니다.

 

정말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部分)은 시중(市中)의 서적(書籍)에 있는 내용(內容)이라고 해서, 또는 인터넷에 있는 내용(內容)이라고 해서 검증(檢證)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무분별(無分別)하게 맹목적(盲目的)으로 믿는 점(點)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冊)에 있는 내용(內容)이라고 해서 모두가 옳은 것도 아니며, 사전(事典/辭典)에 있는 내용(內容)이라고 해서 모두가 맞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事實)을 모르고 있는 점(點)이 더욱 측은(惻隱)하게 여겨졌을 뿐입니다. 학문(學問)하는 태도(態度)는 책(冊)의 글자에 끌려다니는 독서가(讀書家)가 되지 말고 책(策)의 내용(內容)을 내려다보면서 비판(批判)할 줄 아는 지식인(知識人)‧지성인(知性人)으로서 읽어가는 것이 올바른 것일 것입니다.

 

네티즌 여러분!

더운 여름철 건강(健康)에 유의(留意)하시기 바랍니다.

 

서곡철학원장(西谷哲學院長)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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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각 12.04.21. 18:07 new

종아로봐야될거 같습니다...
인성도 없고 관도약하니
 
松栢 조흔 12.04.21. 20:54 new
댓글 감사합니다.
 
 
海印철학 02:46 new

 

63 53 43 33 23 13 03 -- 水 水 水  / 水 : 명나라 태조 洪武帝 주원장 어조    

戊 丁 丙 乙 甲 癸 --- 丁 丁 壬 戊 / 甲 : 71세 乾命 (1328년 음력 09월 18일) 

巳 辰 卯 寅 丑 子 亥 --- 未 丑 戌 辰 / 寅 - 戌亥: 연공망. 申酉: 일공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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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엄청나게 치밀꼴잡하구나! 사람심리 및 다루는 데는 귀신이구나!

그래도 동서남북을 다 알고 하는 짓이니 그것이 대의명분이 되는구나!

 

정화일간이 술월미시에 나서 조열한데 정관임수를 합했으니 귀할 조짐이고, 사고를 깔아 그 그릇이

매우 크며, 삼백호에 년상관 무토로서 정관을 치니 역성혁명인데, 정임이 목을 발생시키고 무토가

정화를 보호하니 백독불침이다. 

 

33이후 목운에 패인하고 강휘상영 삼기순수로 황제등극에 하자나 손색이 전혀 없고, 53이후에

의심병이 발동하여 애맨 사람 많이 잡았겠구나! 기사운 71무인년에 금수를 모두 멸하여 종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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