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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역사

행주성당사-1899년 공소설립 이전 행주이야기 (16)

작성자vericari|작성시간08.01.19|조회수412 목록 댓글 0

행주와 행주성당 연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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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증기선]

 

행주나루와 행주마을 (3)

 

구한말(舊韓末) 행주나루를 거쳐 북쪽으로 향하는 뱃길은 해서(海西), 진남포, 용암포, 의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 향하는 뱃길은 강화, 인천, 태안, 군산, 목포, 부산까지 이어졌으며 물화집산을 업으로 하는 객주(客主) 소유의 황포돛배와 한강과 서해를 넘나들며 고기를 잡는 수많은 어선, 나중에는 한양호(漢陽號)등 증기선과 일본범선 등 많을 때는 하루에도 수백 척의 배들이 행주나루를 드나들었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초기 자본주의적 경제가 움트면서 한강의 행주나루 마포나루 등은 수운(水運)과 화물의 집산지로 번창했다. 구한말 조선의 국운과는 달리 행주는 많은 물자와 새로운 문화가 유통되는 하는 곳으로 번성하였고 사회경제적 비중도 지대한 곳이었다.

개항 후 일본 증기선이 개항장을 출입하면서 조선의 지배층은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량의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증기선, 즉 화륜선(火輪船) 즉 의 위력을 실감했다. 1882년에 들어서 지배층 내부에서 기선을 도입해 세곡을 운송하거나 해양 방위에 힘쓰자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정부는 1882년 10월 “각국과 통상시 민간인이 화륜선(火輪船)과 풍범선(風帆船)을 구매해 공사(公私)에 쓸 수 있도록 하라”고 주교사에 지시한 이래 1883년 이화양행의 남승호가 상해-부산, 인천-나가사키 항로를 월 2회 정기 운항하기도 했다. 외국 기선을 이용해 세곡을 운송하는 일이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기선을 구매해 직접 운송하는 방안을 모색되어1893년에는 정부 직영 기업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하여 증기선 5척으로 세곡 운송뿐만 아니라 일반 화물과 승객도 운송했다. 이운사 소유의 전운환은 제물로 수송된 미곡을 행주, 양화진, 마포, 용산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1894년 조세가 금납화(金納化)되면서 이운사의 주 수입원인 세곡운송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정부는 이운사의 운영을 민간상인에게 넘겼다.

황포돛배 등 무동력선만 오가던 한강에 동력선인 증기선이 등장한 것은1886년 마포, 행주, 제물포 사이를 운행하던 대흥회사의 세곡 운반선이다. 대흥회사가 1년 만에 문을 닫은 후 1888년 8월 조희연의 삼산회사의 소형의 증기선인 용산호(龍山號, 6t)와 삼호호(三湖號, 13t)가 제물포-마포 노선에 취항하였다. 삼호호는 1888년 11월경 강화에서 행주 쪽으로 오다가 좌초 되었다 [이미 언급한바 한강수로는 조수에 따라 강의 흐름과 수량이 바뀌고 모래톱과 암초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1889년에는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이 수입한 쾌속정 제강호가 제물포와 마포 사이를 정기 운항하며 일반화물과 여객을 수송했다. 그러나 제강호 역시 1889년 9월 강화도에서 행주 쪽으로 오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1891년 미국인 타우젠드(Taunsend)의 소기선 순명호가 제물포와 마포 사이를 운항하였다. 이로써 청나라 상인 등 외국인들이 한강을 통한 상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마포와 제물포 등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2,500명가량이 있다고 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보고서]. 특히 부산이나 외국으로 가는 사람들(주로 외국인)은 이 증기선을 이용하여 제물포로 가서 큰 선박으로 갈아탔다. 한강에 증기선의 왕래가 잦고 상거래 활동이 번성해지자 청나라는 자국의 상인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1892년에 계사국(稽査局)을 설치하여 각 도선장의 치안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청국인 거상 동순태(同順泰)는 원세개[袁世凱 1884년에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서울에 주재하면서 조선의 내정·외교를 조정·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신장시키고 일본세력에 대항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퇴한 뒤 청나라로 돌아갔다]의 권유에 따라 한양호라는 증기선을 사들여 이를 제물포와 용산 노선에 취항시켰다. 한양호는 100t 속력 8노트로 승객 100명을 한꺼번에 수송할 수 있는 배로 중국 양쯔강에서의 운항 경험을 토대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양호는 100톤에 이르는 그 규모나 성능에서 다른 증기선보다 탁월했다[예컨대,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0월 22일, “…(새벽 4시에 용산에서) 배에 오르다. 배는 거의 정시에 출발했으나 두세 번 모래톱 위에 올라앉기도 하고, 또 안개 때문에 멈추기도 하다. 결국 청국배 한양호에 추월당하고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4시 반경”]. 한강의 포구에는 한양호만을 위한 전용 소부두(小埠頭)까지 설치되어 있었다[경성부사, 제2권,1939, pp. 1001~2]. 그러나 이 한양호도 종종 고장을 일으켰던 것 같다[예컨대,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9월 13일 “마라발 신부가 (군복무를 마치고 오는) 부이용 신부와 함께 돌아왔다. 어제 아침 8시에 (제물포를) 청국배 한양호 편으로 출발한 이들은 자정에 용산에 당도하였다. (배의) 추진기관이 파손되어 용산에서 100리 되는 곳에서 모래톱위에 올라앉는 바람에 (그곳으로 부터 용산에) 도착하는 데에 여섯 시간이나 걸려야 했다”]. [이 한양호는 청일전쟁에 징발되었다가 일본군에게 접수된 전쟁 후 오사카에서 경매되었다. 뮈텔 주교 일기, 1894년 5월 9일: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해 한성호가 군인들을 수송한다는 기록, 8월27일: “우리는 한강에서 일장기를 단 한양호와 마주쳐 지나갔는데, 그 배에는 환자들 또는 부상병들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양호의 투입으로 한강 증기선 사업에서 청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 측도 용산호 등 선박을 취항케 하고, 청국이 설치한 소부두 옆에 일본도 소부두도 설치하는 등 청·일 양국은 한강 증기선 운항에서의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다. 1895년에는 인천환, 정중환, 순명호, 주강환 등 4척의 일본 소증기선들이 한강 운송업을 시작하면서 제물포, 행주, 마포, 용산 사이의 화물 및 여객 운송은 일본회사가 거의 독점해갔다.

한강 증기선들은 행주를 경유하기도 하였고 물때가 안 맞으면 종종 행주에서 몇 시간씩 어떤 때는 며칠씩 정박하기도 하였다. 한강 증기선의 운항은 인천의 상권과 한강의 상권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그 결과 용산, 마포, 행주 세 강에서의 콩·팥의 연간 수출도 3만석에 달했을 뿐 아니라 한강 상류 쪽으로 부터 반입된 우피(牛皮)·우골류(牛骨類)의 수출액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900년 전후 한강에는 일본범선도 등장한다. 청·일, 러·일전쟁 후 일제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마포ㆍ행주와 제물포 사이에 일본범선들이 운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범선은 대개 30∼50톤급으로 수송력이 철도 화차 2∼3량과 같았는데, 그 운임도 톤당 1원 25전으로 철도운임 t당 3원 50전에 비하여 거의 1/3 수준으로 저렴하여 철도수송에 위축되어 버린 증기선에 비해 다소 경쟁력이 있었다. 제물포로 부터 마포까지 일본범선의 운항 소요시간은 만 하루(한강 수위가 높은 사리 때)에서부터 3일 이상 까지 걸렸고 조금 때는 배가 행주까지만 들어올 수 있었다.

1911년 기준으로 제물포로부터 마포나루를 출입했던 선박의 수는 2,115척이었으며, 한강 하류지방(행주)으로부터[옛 사람들은 행주나루 그 아래는 바다로 보는 경향이 짙었다] 마포나루를 출입했던 선박의 수는 1,725척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행주나루에는 연간 적어도 5000여척의 배들이 통과하거나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배를 운항하는 사공들, 선주, 객주들과 어부들로 인해 행주의 시장 및 유흥경기도 대단하였다. 행주에는 새우젓, 웅어젓, 조기, 북어, 황석어 등 수산물을 거래하는 어물전 물론, 쌀을 비롯한 콩·팥 등 미곡류를 매매하는 미곡점, 어물과 미곡을 함께 파는 가게들, 고기를 팔던 육곳간 등시장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생집을 포함한 술집, 음식점, 숙박시설, 무당집 등이 즐비했으며, 파출소 등 관청과 얼음창고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되어 1895년 폐지된 주원(廚院), [즉 사옹원(司饔院) 한 분장(分掌)인 웅어를 잡아 왕가(王家)에 진상(進上)하던 葦魚所(위어소, 웅어소)]가 행주 외성동의 용정(龍汀) 서쪽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李錫禧, 高陽郡誌, (영조 31년, 1755).] 특히 김장철에는 새우젓 및 웅어젓 등 젓갈거래만으로도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

행주에서는 상업이 활발하다보니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세력가들의 도고(都庫) 즉 매점매석행위가 또한 기승을 부렸다. 고종 즉위 후 대원군 등이 수차례 거듭해서 행주에서의 잡세의 철폐를 명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의 자금줄을 차단하고 서울로의 물자공급의 원활화와 행주에서의 상업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내수사(內需司)에서는 명색 없는 세를 만들어 내어 행주(幸州)에서 여러모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니 그 폐단은 다 극도에 달하였다….갑자년(甲子年) 정월…고양(高陽)의 행주강(幸州江)에는 내수사(內需司)가 명색 없는 세를 만들어 내어 덮어씌우는 바람에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니 즉시 모두 폐지하라고 지시하고, 이어 묘당(廟堂)에 신칙하여 각 도에 공문을 내어 각 포구(浦口)의 잡세와 재물을 가지고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안착하게 하였다”[고종실록, 고종 027 27/08/30(정묘) / 대행 대왕 대비의 지문과 행장]. “행주(幸州) 강가에서 세금을 거두는 일을 시작한 김정규(金定奎) 등은 형조(刑曹)로 이송(移送)하여 엄히 형신(刑訊)하고서 원배(遠配)하며, 그 당시 그 일을 담당했던 내시(內侍)도 간삭(刊削)의 형률을 적용하라” [고종실록,고종 1권, 1년( 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1월 21일]

그러나 한강을 통한 수운은 겨울철의 동결과 수량부족으로 인한 불편[예컨대 1894년 겨울(2월 말)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나가사키에서 일본 증기선 히고마루(一向丸)호를 타고 15시간동안 항해하여 부산에 도착한 뒤 다시 뱃길로 3일 항해하여 제물포에 다다른다. “제물포는 서울의 강나루인 마포로부터 9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강하구에 있으나 한강은 물살이 강하고 곳곳에서 매우 얕아지며 모래톱이 조수를 따라 옮겨 다녀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비숍여사는 6명의 가마꾼이 메고 가는 교자를 타고 7시간 걸려 마포가 건너다보이는 곳에 도착한 후 거룻배로 한강을 건너 비로소 서울로 들어서게 된다], 1894년 조세의 금납화로 세곡운송의 중단, 그리고 1910년 이후 철도망이 전국적으로 구축되어감에 따라 쇠퇴하게 된다. 특히 경인선의 개통으로 인천 제물포와 서울간의 화물 수송은 선박보다는 철도가 담당하게 되었다. 한강 수운의 급격한 감소에 비례하여 행주나루의 경기도 차츰 침체되어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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