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현의 ‘옛 신문 속 강원도 읽기’] 12. 병자년 물난리 (상)
- 박미현
- 입력 2020.07.25
-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32994
원주 수해 이재민 모습·홍수로 섬처럼 변한 신촌 등 사진으로 소개
1936년 7월말부터 9월초 최대 568㎜ 호우 ‘아비규환’
강릉 남대천 제방 터져 시가지 침수·사망자 위령제 기사 자세히 담아
▲ 1936년 8월 16일자 매일신보 2면에실린 강원도 우량. 8월 10일부터 3일간 원주에 568㎜가 쏟아졌다.
어렸을 때 강릉에 살던 조부모로부터 ‘병자년 포락’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포락’이라는 단어가 생경했고,너무도 단단해 보인 강릉 남대천 제방을 무너뜨린 대홍수가 일어난 ‘병자년’은 도대체 몇 년이었는지 궁금했다.
한강 범람으로 서울 경기일대를 휩쓸고 강원,평안,영호남 등 전국을 강타한 단군 이래 최대 수재 참상을 빚었다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이은 강원도 병자년 물난리는 1936년 벌어졌다.
▲ 남대천 제방이 터지면서 강릉시가지 전체가 침수돼 망가진 가재도구를 거리로 내놓은 모습(위)과 반파된 강릉교(가운데), 물길로 변한 명주동 주택가(아래) 모습이 매일신보 1936년 9월 5일자에 실렸다.
병자년은 마라토너 손기정선수가 금메달을 딴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해다.그 해 여름 강원도 곳곳에서 벌이진 끔찍한 재난 재해 소식과 8월 1일부터 16일까지 열린 베를린올림픽 기사가 같이 실린 것이다.
일제강점기는 대홍수의 연속이라고 할 정도로 잦았는데 병자년 대홍수는 특히 강원도와 경상도가 큰 화를 입었다.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강원도는 ‘80년 이래 대재난’을 겪었다고 했는데,1936년에는 피해상황조차 제 때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내려앉았다.강원도 병자년 물난리는 7월 말부터 시작돼 9월 초까지 연거푸 지역을 돌아가며 벌어졌다.1차 때는 원주·횡성·영월·평창이 집중적인 타격을 입었으며,2차 때는 고성·양양·강릉·삼척 등 동해안 지역에 폭풍우가 쏟아졌다.
▲ 대홍수로 침수된 원주군청 앞 거리와 원주교 상판을 집어삼킬 듯 한 거센 물결, 원주읍교회 여성들이 주먹밥을 나눠주는 이재민 모습이 1936년 8월 18일 매일신보에 ‘참담한 원주 수해’를 제목으로 소개됐다.
1936년 8월 10일자 조선중앙일보에 따르면 7월 24일부터 30일까지 강원도에 최대우랑 442㎜가 쏟아졌다.춘천·인제·회양·화천·김화·철원·평강·이천이었다.8월 10일부터 12일까지는 원주 횡성 영월 평창지역에 집중적으로 폭우가 쏟아졌다.원주가 568㎜로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이 횡성 279㎜, 평창164㎜ 순이었다.원주는 수십 년 이래 처음 있는 대홍수로 원주 흥호리는 ‘전멸’상태로 아비규환의 참상을 빚고 있으며 이재민 1000여명이 거리에 방황하고 있다고 비보를 전한다.원주 소초면 의관리에 사는 24세의 이용구와 17세의 정씨 부부는 8월 11일 오전 9시 심한 폭우로 뒷산에 사태가 나기 직전 시아버지에게 나가자고 했으나 거절하던 것을 몇 차례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3명 중 2명이 압사당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14일자 2면 상단에 원주지역을 덮친 재난 사진 네 장을 ‘5도에 걸친 근래 희유의 대수란(大水亂)’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사진 아래에는 ‘강원도 원주에는 사망자 58명’을 제목으로 8월 13일 아침까지 원주지역에만 사망자 58명에 침수된 집이 1274호이며 떠내려간 주택은 217호,반쯤 무너진 집은 68호라고 밝히고 있다.
▲ 1932년 신축됐다가 4년만인 1936년 대홍수로 반파되면서 많은 생명을 앗아간 강릉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강릉교 준공 모습. (1932년 11월 13일 매일신보)
8월 18일자 2면 매일신보에는 ‘참담한 원주 수해’를 제목으로 원주교 상판을 위협하듯 거센 물결이 용솟음치는 광경과 침수된 원주군청 앞 시가지,홍수로 섬이 돼버린 신촌,원주예배당에서 이재민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는 현장이 사진으로 소개됐다.원주와 경기도 여주간 도로 불통으로 자동차 운행이 멈추자 여주우편소에서 원주까지 우편물을 노동자들이 일일이 지게로 져 나르는 사진이 8월 19일자에 이어 실리기도 했다.
1차 대홍수로 8월 18일까지 집계된 강원도 인명피해는 사망 115명,행방불명 85명,부상자 139명이었다.폭우에 휩쓸려 없어진 집만 913호이며 침수까지 합하면 5094호이고 긴급 구제를 받아야 될 사람만 7000여 명에 달했다.농작물 피해 등 물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1936년 8월 2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재난 원인을 지목하고 있다.’피해자의 대부분은 산과 바위가 무너져서 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는바 이것은 음료수와 세탁수의 관계 등으로 산 밑과 바위 밑에 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자가 많은 때문이라 한다.비가 내릴 때마다 일어나는 참해를 방지하기 위하여는 결국 전기와 같은 위험 개소에 부락을 형성치 못하도록 하여야할 것인데 음료수 세탁수 등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라고 썼다.수도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마실 물과 빨래할 물을 찾아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을 얻기 위해 산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비가 세게 오면 산사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지적이다.원주에서는 폭우 피해로 생명을 잃은 70여명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12월 12일 원주 법천사에서 봉행됐다.(1936년 12월 17일자 매일신보)
▲ 홍수로 자동차 운행이 끊어져 경기도 여주에서 원주까지 지게로 우편물을 나르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지게로 우편 운반 여주 원주 간’을 제목으로 1936년 8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실렸다.
8월 초순 원주를 중심으로 사정없이 덮친 폭풍우는 8월 하순 강릉과 고성,양양을 강타했다.8월 27일부터 강릉에 쏟아진 폭풍우로 남대천 제방이 툭 터져 나가면서 깊은 잠에 들었던 남문동 부근의 피난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반대편 마을 성덕면으로 피난하기 위해 남대천에 가로놓인 신축 강릉교를 건너기 시작했다.이미 남측의 다리 절반이 끊어진 줄 모르고 캄캄한 밤중에 자전거로 달리고 걷다가 그대로 다리 아래로 떨어져 많은 사망자를 냈다.강릉교는 견고하고 높아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못했던 또 한가지 사건은 1932년 준공돼 광대하기로 소문난 남대천 제방이 무너진 것이었다.폭풍우가 몰아치자 강릉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제방이 무너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설마 설마했던 것.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29일자에는 ‘강릉제방 각일각 위험’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결국 강릉의료원 앞부터 안목항까지 4㎞에 달하는 제방구간 중 강릉교 아래와 남문동,명주동 부근이 터져나가며 시가지 전역이 침수됐는데 망가진 가재도구를 거리로 내놓은 모습과 반파된 강릉교,물길로 변한 명주동 주택가 모습이 매일신보 1936년 9월 5일 11면에 실렸다.
같은 지면에 이재민의 상황도 실렸다.피난민 3000명에게는 8월 28일 아침부터 오전 7시와 오후 5시 두차례 주먹밥이 배급돼 겨우 연명하는 정도였다.살아난 사람은 몸에 비에 젖은 단벌옷만 걸치고,찬마루 위에 노숙하는 탓에 병마가 발생해 신음하는 사람이 많아 그 현장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현실 속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강릉에서는 성시를 이루던 한 마을이 휩쓸려 지금까지도 논바닥으로 남아있다.강릉시 연곡면 동덕리는 연곡천과 인접한 면 소재지로 정기시장인 연곡시장이 자리잡아 1930년 ‘연곡시장 대운동회’가 개최될 정도로 시장을 중심으로 번화를 자랑했다.
연곡천 제방이 터지고 연곡교와 도로 모두 유실돼 50여 채가 모여 살던 시장마을을 덮쳐 78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삶의 터전은 진흙밭으로 전멸됐다.인접한 주문진에서 숨진 3명까지 합해 81명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연곡시장 터에서 봉행돼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과 아픔을 달랬다.
참석한 수천여명 중에는 흰 당기를 들고 상복을 입은 유족 70여명이 자리했다.눈물로 바다를 이루고,영전에는 향을 태우는 연기가 몽몽한 중에 산천도 눈물지고 초목도 슬퍼하는 듯했다고 1936년 9월 23일자 매일신보는 전하고 있다. 수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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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현의 ‘옛 신문 속 강원도 읽기’ ] 13. 병자년 물난리 (하)
- 박미현
- 입력 2020.08.08
https://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034794
1936년 8월 최악의 폭풍우로 744명 목숨 잃어
양양·고성 등 동해안 어촌마을 강타
7000여 가구 침수·어선 222척 파손
당시 1000만원 피해·현 1조원 규모
'병자년 물난리’를 주제로 기사 작성을 준비하는 동안 강원도에 폭우가 덮쳤다.출장지인 홍천과 인제 곳곳에서 탁류는 교각을 휘돌아 무서운 속도로 구비치고,둑을 무너뜨릴 기세로 넘실거렸다.지역 경계를 넘을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기상예보와 재난 위험정보가 속속 들어오는데도 도로 위 불안감은 하늘과 같은 잿빛이었다.
1936년 여름 그 때는 그 어떤 방비와 지원도,정보도,예고도 없이 맨 몸으로 대홍수 재난을 맞닥뜨려야 했다.양양에서는 8월 27일 하루 폭풍우로 한꺼번에 542명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겼다.졸지에 수중으로 생이 마감된 안타까운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살아남은 자의 비통과 오열 속에 1936년12월에 이어 1년 뒤인 1937년 8월 26일에도 봉행돼 그 숫자를 기억하고 기릴 정도로 충격을 던졌다.
1936년 8월 26일부터 강원도 동해안을 기습한 폭풍우 실태는 매일신보 8월 30일자 호외로 발행돼 긴급소식으로 다뤄졌다.호외 머리기사 제목은 ‘태풍폭우에 해소까지 600호 양양읍 참화’이다.신문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이번 폭풍우로 인한 동해안 일대의 참상은 토막토막이어서 근근이 전하여 오는 소식만으로도 상상 이상으로 비절참절을 극한 몸서리치는 소식이 들어온다.’
이어 실린 기사이다.‘동해안에는 홍수, 태풍, 해소 등 이중 삼중의 피해로 교통은 물론 전신전화의 피해로 그동안 소식을 몰랐던바 30일 오전11시 원산체신분장국장으로부터 강원도당국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양양읍은 500여 호가 있는 곳인데 현재 3호를 제외하고는 절멸되어 하여간 읍의 지형은 전부 진흙 바다로 되고 있는 거짓말 같은 참말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원인을 추측하건대 남대천의 남파제방의 결궤된 데다가 홍수,태풍,해소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그와 같이 된 모양인데 양양읍은 전부 파묻혔고 읍에서 좀 떨어져있는 임천리와 서면 일대도 전부 파묻힌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직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인명의 사망은 적어도 육칠백명에 달하리라고 추측된다.’
1936년 8월 27,28일 이틀간 내린 우량은 고성군이 503㎜로 가장 많고 통천 369㎜,양양 363㎜,강릉 361㎜였으며,삼척도 288㎜로 300㎜에 육박한 수치였다.(부산일보 1936년 9월 13일자 5면) 이 때 내린 비는 바람을 동반하고 있어 신문기사 제목처럼 ‘태풍폭우’였다.
양양 남대천은 다리를 놓기 힘들 정도로 강폭이 워낙 넓은 곳으로 28일 새벽2시 캄캄한 지경에 철옹성으로 여겼던 제방이 사정없이 무너지면서 성난 물결이 내달리며 양양읍내를 휩쓸어 순식간에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동해바다와 가까운 남대천 지리 관계로 행방불명된 사람도 많았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사망과 행방불명 합쳐 800여명으로 보도됐다.
8월 초 원주·횡성·영월 일원의 1차 대홍수에 이어 동해안을 강타한 2차 대홍수는 폭우에 큰바람,해일까지 겹친 풍수해로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1928년 준공된 강릉 남대천 제방이 터지고,양양 남대천 제방이 붕괴된 것은 물론 고성 남강,삼척 오십천 범람으로 시내 대다수 물에 잠기고 휩쓸리고 떠내려갔다.고성군은 남강이 범람해 읍내 사망자는 127명에 달했다.파괴되고 떠내려간 집은 190채,반 이상 절단된 집도 219채였다.
매일신보 9월 4일자에는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노변이나 강변에서는 시체가 속속 발견됨에 따라 부모를 찾는 아이,아이를 찾는 부모,처자를 잃고 가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의 곡성이 창천하고 있는데 그 보다도 방금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가련한 수십만 이재민의 장래가 우려된다’고 참상을 전했다.다음 날 신문에는 폭풍우로 고성군 삼일포역이 비참한 형상 속에서도 웃음이 나올 만큼 기괴한 형상이 됐는데 역 부근의 철둑이 무너져서 기찻길이 아예 없어져버리고 큰 연못이 됐으며 역 대기실은 탁류에 휩쓸려 방향까지 틀어져 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양양 수해 참적’ 제목의 기사(매일신보 9월 13일자)는 남대천 둑 붕괴로 읍내를 휩쓸고 간지 열흘이 지난 후의 현지 상황에 대해 ‘제일 참혹한 것은 비가 개이고 물이 빠진 오늘까지도 겨우 살아난 가족이 자기 부모처자의 신체를 찾지 못하여 괭이와 삽을 가지고 산지사방하여 집 떠나간 자리로 헤매면서 신체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수 백 명이나 된다’고 전하고 있다.
매일신보 9월 12일자 5면 머리기사는 8월 26일부터 시작된 대폭풍우로 인한 강원도내 인명 피해를 집계했는데 사망 744명,행방불명 688명,부상 874명에 달했다.동해안 지역에 타격을 입히면서 선박과 수산업 피해도 컸다.동해 연안에 있는 대다수 어촌마을이 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 9월 8일까지 파악된 선박 유실 및 전체 파손은 221척이었다.행방불명된 배는 145척,반파된 배도 222척에 이르렀다.강원도내 집 피해는 7000여호,경지와 농작물 피해는 1000만원에 가까웠다.당시 하루 노동 임금이 60전으로 현 6만원으로 쳐도 당시 1000만원의 피해액은 현 1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월 26일부터 통천·고성·강릉·삼척·울진 등 동해안 지역에 폭우가 잇따랐다.2차 풍수해로 복구가 채 되기도 전에 재난을 당한 것.강릉은 남대천 물이 올라가면서 집 1000여호가 침수됐으며 옥계천 범람으로 옥계시장 부근 40여 호가 떠내려갔다.울진은 240호의 집이 잠겼으며,삼척 오십천 물이 불어나면서 30여 호가 침수됐다.1936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위기일발의 고성읍’기사는 고성읍을 흐르는 남강 제방을 방어하는 사진이 실렸다.하지만 고성군 수동면에서는 한 동네에서만 무려 81명이 목숨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제가 10월 19일 유점사 승려 홍수암씨를 초청해 거행됐다.양양에서는 1936년 12월 14일 양양읍내 불교포교소에서 사망자 위령제가 거행됐다.
일제 식민치하에서는 대홍수와 폭풍우를 뚫고 천운으로 살아난 사람에게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논밭이 흙으로 매몰돼 농작물이 모두 파묻혀 백사장이 된 강릉과 양양의 가련한 사람들은 ‘호미를 가지고 반이나 파묻힌 벼이삭을 파내어서 베어다가 훑어 먹으며 겨우 연명을 하는 형편’이라는 소식이다.(1936년 10월 27일자 매일신보 11면)
막노동 일거리를 찾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로 이사하거나 심지어 낯선 간도 땅으로 떠나야 하는 이웃도 있었다.1936년 9월 13일자 매일신보 5면에는 ‘생활에 길을 찾아 고향 떠나는 이민 강원도 수해지 160가족 북선 각 공사지로’라는 기사가 실렸다.영월 120,원주 30,횡성 10 가족 이재민은 대대로 지켜온 터전을 터나 시멘트공장 등 공장지대나 토목공사 현장으로 일거리를 찾아 이주했다.영월에서는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6일간 매일 20가족씩 충북 충주로 가서 기차로 이동했다.원주에서는 여주 이천을 거쳐 청량리역에서,횡성에서는 양평역을 거쳐 역시 청량리에서 북한 방면으로 떠나갔다. 수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