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하라. 그래도 희망하라. 끝까지 희망하라.”
제목은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금 당장 상황이 좋아질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희망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말라. 원하는 결과만 바라기보다는 희망할 수 있는 마음 자체를 지켜라. 희망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절대 절망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큼은 반드시 열어 두라.”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אַבְרָהָם(아브라함)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부자였습니다. 당시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고모라 지역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가던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야간에 급습하여 승리로 이끌 정도로 용맹한 군사들까지 거느렸습니다.
그야말로 부족함이 전혀 없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여호와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나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식을 하나도 점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내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내 집의 이 종밖에는 없지 않습니까?”(창14:2-3)라는 마치 절규 같은 그의 외침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대를 이어줄 후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이렇습니다. 누구나 어떤 부분이든 모자란 면이 있습니다.
영적일 수도 있고, 정신적일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일 수도 있습니다. 환경적일 수도 있고, 관계적일 수도 있습니다. 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가 그랬습니다. 우울증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지만 지극히 반항적이고 또 무기력해지기까지 하는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미 늙어버린 몸을 볼 때 아예 불가능한 약속이었지만,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이유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덥석 붙잡았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마음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간절하게 바라던 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열국의 조상으로 거듭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장 그만하라고, 그에게 주어진 경험 아니냐고,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적용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 아니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필요했던 자식이라는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주시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나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정색하며 외면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시인은 평생 고난이라는 고난은 다 경험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이 삶이었습니다. 삶이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거듭해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속으로부터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희망하라).”(시42:5a 11a, 43:5a)라고 노래했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자신의 기대와 바람과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절로 낙심되는, 아니 낙심이 되어 버리는 최악으로 치닫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희망하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희망하라). 나의 희망은 오직 그에게 있다.”(시62:5)라고 노래했습니다.
“잠잠히”는 체념이 아닙니다.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라”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명령입니다. “나의 희망은 오직 그분에게 있다.”는 하나님만 참된 희망과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해 같은 인생을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희망할 수 있는 근거는 환경도 상황도 조건도 아닙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그럴듯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넘어질 가능성을 넘치도록 충분히 가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어제도 그러시고, 오늘도 여전히 그러시고, 내일도 한결같이 그러시고, 영원히 변함없이 그러실 하나님입니다. 특히,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는 열리지 않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고, 우리에 있던 양 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 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합3:17-18)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무화과, 포도, 올리브, 곡식, 양, 소는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재산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없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한 해의 수확이 줄어든 상황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사회, 경제적인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 곧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희망할 수 있는 조건이 씨까지도 완전히 말라버린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켰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절망을 완전히 없애버릴 희망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렇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무조건, 필연적으로 사라질 희망의 근거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영원히 이어질 유일한 희망 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조상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현실을 희망의 근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시적인 희망이 모두 사라진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창세 전부터 당신 뜻의 계획에 따라 자신들을 작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작정을 반드시 이뤄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작정 곧 약속을 이뤄주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희망할 이유와 조건이 모두 다 사라져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희망했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희망을 희망하라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인위적인 긍정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사고도 아닙니다. 없는 희망을 간직하라는 고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약속해 주시고,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사도는 “그 어떤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창세 전에 저와 여러분을 작정해 주시고, 약속해 주시고, 쉬지 않고 일해주시고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희망 되시는) 하나님께 아뢰십시오.”(빌4:6)라고 외쳤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좋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가진 희망의 근거는 과연 무엇입니까? 자신이 소유한 좋은 조건입니까? 아니면 언제나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존재해 주시는, 지극히 자발적으로 쉬지 않고 일하여 주시는 하나님입니까? 여호와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성민 이스라엘을 향해서 “너희를 향한 내 생각은 내가 안다. (너희가 생각하는) 재앙이 아니다. (너희가 생각하지 못하는) 평안이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렘2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תִּקְוָה(티그바)”의 첫 번째 의미는 “기다리다.”입니다. 단순히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면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떤 결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연히 기대는 저와 여러분이 사모하는 바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의 계획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희망하다, 바라다.”입니다. 하나님 뜻의 계획에 따라서 작정 된 저와 여러분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신뢰 속에 바라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 의미는 “신뢰하며 기다리다.”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줄을 꼬다, (줄에 자신을 단단하게) 묶다.”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긍정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사고도,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하나님 뜻의 계획에 따라 창세 전에 작정 된 저와 여러분을 위한 미래의 약속에 자신을 단단히 묶어두는 행위입니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모든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에 자신을 꽁꽁 묶어 두는 행위입니다. 또 선지자는 “여호와를...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사40:31a)라고 외쳤습니다. “앙망קָוָה(카바)”은 희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우러르며 바라보다, 여호와를 기다리다, 여호와께 소망을 두다.” 등의 뜻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희망과 신뢰와 기대와 기다림 등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기대와 기다림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긴장감 있게, 목을 빼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희망은 현실 부정이 아닙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바라며 기대하는 기다림입니다. 또 지혜는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잠13:12)라고 외쳤습니다. 직역하면 “미루어지는 희망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생명나무와 같다.”입니다. “희망תּוֹחֶלֶת(토헬레트)”은 “기대, 희망, 소망” 등의 뜻입니다. 희망 자체보다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내면의 기대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뜻의 계획에 따라 작정 된 약속 곧 희망이 즉시 성취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늦어질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참된 믿음의 선배들은 희망이 생기면 마음에 품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희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을 희망하라고 외쳤습니다. 한순간도 희망 곧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희망을 놓지 않고 간절하게 바라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희망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긍정적 기대가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에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자신을 묶어 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희망은 상황이 좋아서 생기는 감정이 아닙니다. 약속에 근거한 결단입니다. 절망은 밧줄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희망은 밧줄을 단단히 붙잡은 상태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려라. 마음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라. 여호와를 기다려라.”(시27:14)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라. 강하고 담대하라. 다시, 여호와를 바라라.”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희망하라. 그래도 희망하라. 끝까지 희망하라.”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희망적인 상황을 간절하게 기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끝까지 희망하라는 말입니다.
희망의 하나님을 붙드는 희망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창세 전에 이미 당신 뜻의 계획에 따라 저와 여러분을 작정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단단히 묶어두라는 말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내내 절망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나병환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눈먼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죄를 저질렀길래 인생이 저렇게 꼬였는지 모르겠다며 판단하고 정죄하던 영혼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견디기 힘든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를 이기셨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영원한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환경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문제가 즉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상황은 비교 대상조차도 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눈물 흘릴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난받을 수는 있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고, 영원한 희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죄가 아무리 커도 저와 여러분에게 값없이 선물로 무한정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실패가 아무리 깊어도 세상 그 무엇도 끊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이 훨씬 더 깊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저와 여러분 안에 비춰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훨씬 더 밝고 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희망을 간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희망을 노래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희망하라고, 희망에 자신을 단단히 묶어두기로 결단하라고, 상황이 제아무리 많이 바뀌어도 개의치 말고 희망하고 또 희망하고 끝까지 희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희망이 사라질 때, 희망의 유일한 근거 되신 하나님을 붙들라고 말합니다. 고해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희망을 희망하는, 유일한 희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희망하고 또 희망하고 끝까지 희망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