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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하나님의 사랑Ⅲ(롬5:8)

작성자|작성시간15.12.17|조회수87 목록 댓글 0

 

청소년 영성훈련이 열렸습니다. 100명의 아이들은 첫날부터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나머지 40여명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거의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틀째 프로그램이 지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 모두 한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가정적인 아픔이 있거나,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삼일 째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답답하고 애가 탄 한 목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너희들 정말 그렇게 앉아만 있다가 갈래? 이 가운데 사탄의 자녀가 되고 싶은 사람 있어? 없지? 있으면 손 들어봐.”라고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준비했던 모든 일정이 다 지났습니다. 강사로 참석한 그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린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무심히 쳐다보는 아이에게 , 너 참 잘생겼다.”라고 서먹한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아이는 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가 넌 얼마나 힘드냐?”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이는 뭐가요?”라는 반문으로 응수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다 은혜 받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는데 너는 끝까지 나를 지켜야지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니 힘들지. 아무튼 잘 견뎌줘서 고맙다. 혹 여기서 들은 얘기들이 문득 생각나면 연락해. 잘 가라.”라고 말해 주고 나오려는데, 아이가 처음으로 잠깐만요.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뭐냐고 묻는 그에게 은혜를 받고 싶은데, 안 받아지면 어떻게 하죠?”라고 물었습니다. 재차 묻는 그에게 저도 예수님 만나고 싶은데, 안 만나지면 어떻게 하냐고요?”라고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아이의 질문에 마음이 시리도록 아팠습니다.

 

아이를 붙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어.”라는 설명과 함께 그런데 왠지 네가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지금 아니면 하나님을 못 만날 거 같고, 하나님을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여기를 못 떠날 것 같은 그 마음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니?”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주님께서 제 마음에 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맞아!”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눈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5분쯤 지났을 때, 간 줄 알았던 그 아이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친구한테도 똑같이 얘기해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자아이도 눈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나머지 아이들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역시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하나같이 주님을 영접하는 집단 개종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찾지도 않았습니다. 간절하게 부르짖어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찾아와주셨습니다. 먼저 잡아주셨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부어 사랑해 주셨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깨달아 알게 해주셨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내놓으신 끔찍한 사랑 안에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은혜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임신 초기, 산모는 자신의 몸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실감할 수 없습니다. 첫 주에는 거의 형태도 없습니다.

 

분열 증식을 시작한 수정란은 두세 주가 지나야 난관을 지나 자궁에 도착합니다. 착상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수정란의 한쪽은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태반으로 발달하고, 다른 한쪽은 태아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3주째가 되면 척수, , , 청각기관, 심장, 간장계통 등 각 기관이 분화되어 발육합니다.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사람 모양을 가진 태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물고기 같은 긴 꼬리와 네 개의 아가미를 가진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신장은 약 5-7mm 정도입니다. 5주째에는 척수가, 6주째에는 머리와 몸체가 형성됩니다.

 

비로소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7주째가 끝날 무렵에는 2등신 정도가 됩니다. 뇌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사람 같은 형태가 됩니다. 8주째에는 25mm 정도의 신장에 4g 정도의 체중을 갖습니다. 3개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손발, 머리, 몸통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3등신 체형으로 성장합니다. 손톱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관상 남녀를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산모는 이때 비로소 자신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봤자 신장은 겨우 61mm 정도, 체중은 약 10-14g 정도에 불과합니다. 손가락 세 마디 정도입니다.

 

정말로 작습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로부터 훨씬 더 작은 28mm에 불과한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건네받은 한 목사는 우주보다 더 큰 28mm”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바로 그 손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은 물론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 얻은 손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한 선교사 역시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손녀를 보면서 상실로 인해 주어지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에는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이유입니다. 한편, 사람들로부터 온갖 수치를 받고 있던 시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조롱합니다.”(22:6)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벌레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존귀함을 철저히 짓밟힌 상태에서 죽음 일보 직전에 몰려 있었던 시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모든 인생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자신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우주도 다 품을 수 없을 만큼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시던 예수께서는 천사보다 낮아지셨습니다. 심지어 벌레에 불과한 사람보다 낮아지셨습니다. 벌레에 불과한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 아니 종교라는 탈을 쓴 폭도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한때, 당신에게 면류관을 씌우려 했던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자비로 치료해 주셨던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셨습니다. 마치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처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자신을 짓밟는 사람들의 발밑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벌레처럼, 밟힌 상태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몸을 뒤틀고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벌레처럼, 저항할 어떤 능력도 없이 다만 주어지는 고통을 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벌레처럼, 그러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벌레처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대항 한 번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는 벌레처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신 주님은 한 마리의 벌레에 불과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대우는 고사하고, 사람다운 대접조차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혐오와 증오를 받으셨습니다. 철저히 짓밟히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냉정하게 외면하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떼어놓으셨습니다. 완벽하게 분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대우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을 죽임 당해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단절되셨습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향해, 벌레보다 못한 우리를 향해 넌 정말 귀한 존재란다. 넌 천하보다 귀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물론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우리인데, 왜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왜 허물과 죄도 없는 당신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어요?”라고 물어보면, 그보다 훨씬 더한 대답을 하십니다. “넌 나보다 귀하단다. 내가 죽는 편이 훨씬 싸게 대가를 지불한거야.”라고 대답하십니다. 아무리 양보해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이 되지도 않는 대답을 하십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말이 됩니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물려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려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없이 지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원망과 불평과 불신으로 가득 찬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당신 자신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벌레 취급까지도 얼마든지 당해 내실 수 있으셨던 이유입니다.

 

모욕, 조롱, 멸시를 당해 내실 수 있으셨던 이유입니다.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혐오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수 있으셨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라고 외쳤습니다. 타락한 교회를 따르지 않았던 청교도로서 찬송가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는 아이작 왓츠Issac Watts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 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감정이 잡히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느낌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하시기까지 자신을 한 단계 한 단계 낮추신 주님의 삶을 돌아보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혹독한 고난 하나하나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됩니다. 십자가에 함축된 의미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곰곰이 묵상하면 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셨습니다. 전혀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끊임없이 당신을 배신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인생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리고, 그냥 돌들로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셔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내 던지셨습니다. 버리셨습니다. 당신 안에 충만하게 넘쳐흐르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사랑 하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경건치 못한 우리 스스로는 영적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성이 죄로 오염되었고, 부패하였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몸부림친다 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두려운 하나님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일반적인 문화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사랑받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고 요구합니다. 긍휼을 원한다면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남들에게 대접받기 원한다면, 먼저 대접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인과론과 인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기 계발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로 대신 설명할 수 있는 성공철학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과 복을 받기 위해서는, 마치 어떤 기술을 쌓듯 반드시 덕을 쌓아야만 한다는 번영신학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상태에서 물신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세상의 경향 그대로입니다.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영적 훈련들을 소화합니다. 영적인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의무들을 쫓기듯 처리합니다. 노력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소란을 피웁니다.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 총애를 얻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자신의 쩨쩨함을 숨김 채 죄의식에 젖어 살면서, 자신을 고쳐보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시는 거 아냐? 성령께 맡기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라고 불평하면서도,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저주받아라! 너희 여호와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여호와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그 날은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5:18)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종말적 개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날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날을 고대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날이 도래하면,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해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을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깊은 어두움과 절망의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더 위험한 날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순례 절기가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 제사의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의 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5:21-23)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가 다 싫다고, 역겹다고, 당신 보시기에 넌더리나는 일이고, 당신의 사랑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라고, 그러니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두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구원과 복의 문제는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이 책임지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이 모든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결같이, 변함없이, 일관적으로 대우하십니다. 영원한 사랑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섬겨온 수없이 많은 신들 가운데 어느 신도 가질 수 없었던, 베풀 수 없었던,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완벽한 사랑입니다.

 

당신을 떠나 범죄 한,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버린, 경건치 않은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물론 이 진리는 너무나 놀랍습니다. 인과론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우리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구원과 복은 우리가 공로를 세운 결과가 아닙니다.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결과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할 일은 탁월한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숨겨진 능력을 계발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4:7)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길을 가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모모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 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게 중요한 거야.

 

그는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당장 주어진 일부터 하나씩 하라고 주문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4:13)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참된 능력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사랑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에 머물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께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수시로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묵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사랑부터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주어진 7월 하루하루를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올라오는 사랑으로 채워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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