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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롬5:12-19)

작성자|작성시간15.12.17|조회수573 목록 댓글 0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먼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의 순수한 의미는 마음을 바꾼다.”입니다. 통속적으로는 어떤 일에 대해서 후회한다.”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새로운 행실로 돌아온다.”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돌아온다.”입니다. 머리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불신앙과 우상숭배라는 영적 음행으로부터 돌아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적인 참회를 동반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철미한 변화를 요구하는 선지자적 외침입니다.

 

마음과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는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반드시 요청되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함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3:10b-18)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성령의 이끌림 속에서 전인적인 회개를 하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설교자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성령께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시고, 복종시켜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경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을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라기보다는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로 가르치는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타락과 믿음에 관련된 말씀 몇 구절을 인용한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권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시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의식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거짓 평안으로 잠재우는 사탄의 자장가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믿음은 한낱 피상적인 논리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주어지면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심지어 어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어떤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대적한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최대한 빨리 설득할 요량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입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딤전1:15)라는 말씀을 읽어줍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선포합니다.

 

그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6)라는 말씀을 읽어줍니다. 누가 세상에 포함되는지 묻습니다. “나와 당신, 모든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고 선포합니다. “믿을 수 있겠느냐?”라고 묻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원은 결단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설교는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전2:4-5)라는 사도의 고백과는 전혀 다릅니다. 단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거짓된 믿음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좋을 때는 몰라도, 고난이 닥치게 되면 흔적 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죄로 찌든 우리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은 결코 손을 씻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거룩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춰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일은마치 커튼을 걷기만 하면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큼 쉽지도 않습니다. 우상과 세상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키를 조종하여 배를 올바른 항로로 움직이는 것만큼 쉽지도 않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죄에 대해서는 매일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고,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심령을 유지하고, 믿음과 순종과 인내와 충성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바르고 친절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의 힘만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흉악하고 파렴치한 죄인인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끔찍한 일을 행하셨는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죽으셨는지 정확하게 깨달아 알게 해주실 수 있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한편, 구원에 대한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는 물론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와 자기 고집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병들고 왜곡된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의미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결코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외침을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가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참된 본질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왜곡되고 그릇된 구원의 믿음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아십니까? 얼마나 치가 떨리는 죄인인지 아십니까? 얼마나 자격 없는 죄인인지 아십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랑 없이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얼마나 깨달아 알고 있습니까? 오죽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는지 아십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허물과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울은 인간 존재와 관련해서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2:1-3)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사탄의 꼬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섬겨야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그랬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그렀습니다. 이렇게 죄는 곧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반역과 거역입니다. 수동적이지도 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능동적입니다. 적극적입니다. 활동적입니다. 의도적입니다. 흔히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중간 상태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버리고 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자유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 아담에게 허락하셨던 자유 의지는 타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할 수는 있어도, 의도적으로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배워서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그런 존재에 불과합니다.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영적으로 눈이 먼 존재에 불과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탄의 종에 불과합니다. 인류 전체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본질상 불순종의 자식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51:5)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되는 순간부터, 선악에 대한 어떤 의지도 가질 수 없었을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역시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7:18)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탁월한 선교사였습니다. 설교자였습니다. 신학자였습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끝내는 목이 잘린 상태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3:20)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신실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어딘가 모르게 부족함이 느껴지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직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현실적으로 죄를 대항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육신을 입고 있었습니다. 죄는 수시로 육신을 입고 있던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26:41)라는 주님의 지적은, 진리였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따르려고 결심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려고 결심해 보지만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육신을 장악한 죄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있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었습니다. 자신 안에 뿌리 내리고 있는 허물과 죄가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7:24)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라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because all sinned”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2:1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능동적이었습니다. 적극적이었습니다. 활동적이었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예고된 저주가 임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었습니다. 피조물들까지도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습니다. 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 후손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죄인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가 모든 사람들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특히 성경은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5:13)라고 고발합니다. 이는 삽입구입니다.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는 과연 존재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반론입니다. 답은 그렇다. 죄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엄연히 세상에 존재했었다.”입니다.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죄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율법으로 심판하지는 않으셨지만 세상에는 죄가 존재했었습니다. 죄인들은 아직 율법이 공포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죄로 인한 형벌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5:14a)라고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백성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였다.”(6:7)라는 말씀에 따르면, 에브라임과 유다는 아담과 똑같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패역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기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아담의 본성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세상이 그랬습니다. 세상은 죄로 충만했습니다.

 

세상에 충만한 죄의 세력은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습니다. 사망이 왕권을 잡았습니다. 왕 노릇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도 사망이 인류를 지배해 왔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했던 노아시대 사람들을 홍수로 완전히 쓸어버리셨습니다. 음란한 죄로 충만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리셨습니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방법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에녹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외적 심판이 아니더라도 다 죽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던 사람들이 시한부 인생을 살았습니다. 죄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존재였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죄로 물든 세상에서 왕 노릇했습니다. 누구도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2:14)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에게도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는 율법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죄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를 죄로 여기셨다는 증거입니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규정하지 않더라도 죄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십니다. 죄로 대우하십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죄는 죄입니다. 죄는 그렇게 지극히 역사적이었습니다. 동시에 지극히 보편적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정죄는 율법 이전에도 분명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단순히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법에 저촉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근본적인 죄가 모든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인류 전체가 사망의 지배를 받아왔고, 현재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지적인 행동으로 불순종할 수 없는 영아들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죄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범법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지른 죄라는 의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공포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문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5:14b)라고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접하는 순간,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한 아담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은 물론 우리 인류에게 끼친 영향 역시 너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 곧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의 발명도, 불의 발견도, 인쇄술의 도입도, 컴퓨터의 개발도, 핵의 발견도 아닙니다. 물론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담을 통한 인류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속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 명제 앞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5:15a)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5:15b)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5:16)라고 말씀합니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르렀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17)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8)라고 말씀합니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희생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으로 정해지다.constitued”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정해 졌다. 또는 죄인으로 돌려졌다put down, 또는 죄인으로 여겨졌다.” 등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인류의 머리요 대표인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인으로 정해졌습니다. 죄인으로 돌려졌습니다.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결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동시에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정해졌습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의인으로 돌려졌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의인이 되었습니다. 역시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아담이 죄의 시조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가 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의 상징인 아담은 의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type”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아담과 제휴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제휴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죄인으로 규정된 아담 안에서 불명예스러운 종말을 맞을 것인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는 물론 영생까지 누릴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21-22),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3:36)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거합니다. 지속적으로 활동합니다. 육체의 행실을 행하도록 자극합니다. 겉으로는 조용한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매우 활동적입니다. 죄의 물줄기는 외관상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류의 움직임이 심한 깊은 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방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맞서 싸워야 합니다. 또 죄는 마치 무덤 같습니다.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극단을 추구합니다. 마음의 정욕을 자극해서 가장 큰 죄에 이르도록 유도합니다. 가능하면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불의하고 과도한 탐심은 반드시 우상숭배로 유도합니다. 불신앙은 무신론으로 유도합니다. 죄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유도합니다. 죄의 행동과 속삭임은 처음에는 매우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일단 우리의 마음속에 그 뿌리를 내리면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더 큰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반드시 죽이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이유입니다. 또 죄는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하고 무력화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영적인 틀로부터 마음을 떼어놓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내쫓아 버립니다.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영혼으로 하여금 다른 것을 사모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사모하는 영혼의 갈망, 소망, 경외하는 마음 등이 죄로 물들게 합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 당신 한 분만 나의 유일한 기업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언제든지 죄와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한편, 죄를 죽이는 일은 죄를 완전히 도말하거나 근절시키고 파괴시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죄를 죽이는 삶은 분명 그런 목표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를 완벽하게 뿌리 뽑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도록 억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죄의 위험은 평생 마음의 평화는 물론 힘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은혜 언약의 위대한 약속의 핵심입니다. 우리 영혼은 이 평화와 힘을 통해서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평화와 힘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땅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할지라도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이렇게 참된 평화와 힘을 빼앗아갑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이든 다 동원해서 죄와 맞서 싸워야할 뿐 아니라, 죄라는 죄는 다 뿌리째 뽑아 죽여 없애버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두고 보실 수 없는 죄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낮고 천한 인간을 입으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다 받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를 죽이고 또 죽였던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짓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8:34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릴리John Lyly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열렸다. 의인을 구원하는 사역이 완성되기까지는 극심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싸움과 두려움, 세상의 유혹과 박해, 육신의 무력함과 실패, 사탄의 불화살 등 많은 시련을 거쳐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의인은 영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극복해야 할 고난, 어려움, 유혹도 많고 소멸해야 할 죄도 많다. 구원의 문은 너무 좁고 구원의 길은 협착하다. 의인은 구원받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처음에는 온갖 힘든 난관을 각오하라.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와 도움을 베풀어 주신다. 믿음의 경주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2:10)(라고 약속해 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혐오할 만한 죄인인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 된 불신앙의 삶을 살아온 죄를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아담 이후, 인류의 왕 노릇했던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삶,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충만한 삶,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풍요롭게 하시고 기름지게 하시고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영혼의 기쁨과 만족까지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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