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경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짧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으로는 둘 다 내성적입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하나님은 물론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거의 없습니다. 수시로 흔들립니다. 물론 상황이 좋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조금만 나빠져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180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로 다양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완전 반대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은 물론 믿음도 넘칩니다. 넘치다 못해 지나치다고 할 정도입니다.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의 기준이 있습니다.
곧 자기만의 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정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잘합니다. 상황에 대한 변명에도 능통합니다. 다른 점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설명할 때는 잘 듣습니다. 달라지기까지 합니다. 그때뿐입니다. 곧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고단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담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꼭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는 하지만 나중이 걱정되어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만의 기준 곧 자기만의 의로 사람은 물론 환경까지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10:1)라는 증거에 따르면, 사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또 하나님께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동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가족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원하는 바εὐδοκία”는 입 밖으로 내뱉는 단순한 소망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입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고 설레기까지 하는 소망입니다. 벅찬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지향점입니다. 비교할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열망입니다. 불순한 의도나 목적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지극히 선한 뜻입니다.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는 사도의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만일 동족이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도 괜찮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중 돌에 맞아 실신하기도 하고, 무려 다섯 번이나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하고, 자주 먹지 못하고, 자주 자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고, 수고하며 애쓰는 온갖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안전과 유익보다 유대인의 구원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거짓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한편, 이어지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롬10:2)라는 증거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그야말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성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지극한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각종 정결 예식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난지 팔 일째 되는 날에는 열일 다 제쳐두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다 종교적인 공로는 물론 혈통에 대한 자부심까지도 넘쳐났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라는 고백에 따르면, 사도 역시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열심의 근거가 되는 지식이었습니다. “지식ἐπίγνωσιν”은 보통 사람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정보들을 취합하고 습득해서 갖게 된 지식이 아닙니다. 대상을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며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된 올바른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무식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도 알았고, 하나님도 알고 있었던 그들이 정작 중요한 지식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열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의 곧 자기 의를 얻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의 증거는 심지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라고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직 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 주실 수 있는 의를 가리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반면 “자기의”는 율법과 절기 준수, 성전 예배, 정결 예식, 할례, 기도, 종교적인 공로, 혈통적인 자부심 등을 통해서 쌓아 올린 자기 의입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을 자기 의를 인정받는 체계로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없었습니다. 굴복할 수도 없었습니다. 의지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자기 의를 붙잡겠다며 고집부렸습니다. 하나님 방식에 자신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정치적인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는 자기 의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흠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없는 죄를 만들어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라고 한다면, 흠투성이인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일은 거의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저와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소중한 형제를 대상으로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의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제를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돌이키지 못할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끔찍할 일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인은 “주의 눈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시143:2b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고 노래했습니다. 지혜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잠21:2)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행동, 동기, 상황 등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지극히 농후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정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보다 마음을 보십니다.
단순히 나타난 행동의 결과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떤 동기에서 나왔는지, 마음속에 어떤 의도와 욕망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누구도 속이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사64:6a)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남을 해치지 않았다, 나는 성실하게 살았다, 나는 힘에 지나도록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며 교회와 성도들을 섬겨왔으며 심지어 피 같은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마음의 구체적인 동기와 목적까지 보십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가장 강하고 신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자신만만하게 기도했습니다. 실상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에 대한 자랑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공로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아예 꺼내지 않았습니다. 꺼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세리가 의롭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아들은 사실 자기 의의 전형입니다.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보다 자신이 백번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저와 여러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면서 수고하고 애쓴 결과가 아닙니다.
은혜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누구보다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비교적 올바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높입니다. 반면, 복음으로 무장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또 기억하십시오. 자기의에는 증상이 있습니다. 비판과 정죄를 너무나 쉽게 합니다. 사과나 회개는 죽을 만큼이나 힘들어합니다. 남의 죄는 크게 보입니다. 자신의 죄는 보이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보다는 자기를 자랑합니다. 언제나 기, 승, 전, 나입니다. 결론은 언제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베풀어주신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기도보다 변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했다고 말하지만,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만 더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구원받기 위해 더 착해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자기의가 파괴될 때 비로소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교회를 수십 년 들락거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여전히 자기의를 붙잡고 있다면 신앙생활의 첫발도 떼지 못한 상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물은 상한 심령입니다. 주께서는 겸손하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51:17)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를 자랑하는 형식적인 제사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며 드리는 진실한 회개와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는 매사에 비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상황을 감사하게 만듭니다.
자기의는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는 겸손하게 만듭니다. 자기의는 정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랑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완전히 내려놓는 항복입니다. 유대인의 문제는 열심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열심은 넘쳐흐를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사이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죄를 너무나 많이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현재 자기 모습이 어떤지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혹 지금도 여전히 자기 의를 붙잡고 있다면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오늘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복된 삶,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지는 참된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까지 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