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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사]-[위서]등애전

작성자[운영]허저|작성시간06.03.05|조회수280 목록 댓글 1

등애

등애(197∼264)는 자(字)가 사재(士載)이며, 의양(義陽) 사람이다. 《삼국지연의》 가운데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제107회이다. 위장(魏將) 하후패(夏侯 )가 촉한에 투항하여 강유에게 위나라의 정황을 알릴 때, 특별히 등애와 종회(鍾會: 225∼264)를 언급하면서 여러 차례 강조하여 말한다. 「만약 그들이 병마를 거느리고 온다면, 오와 촉으로서는 매우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이 두 사람은 정말 두려워 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정중하게 말하고 있으니 가히 사람들을 긴장시킬 만했으리라. 등애가 맨 처음 출현한 장면은 제110회이다. 용장 문앙(文鴦)이 군사들을 이끌고 사마사(司馬師)의 대본영(大本營)으로 쳐들어가 가는 곳마다 사마사의 군사들을 마구 무찌를 때, 『오직 한 장수만이 질풍처럼 문앙의 군사들을 휩쓸었으니,』 그가 바로 연주자사( 州刺史)로 있던 등애였다. 그가 위군을 지휘하여 앞뒤로 협공을 가하여 『문앙의 군사들을 죽이자, 졸개들은 각자 달아나 흩어지고, 단지 문앙만이 홀로 말을 타고 위나라 병사들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처럼 등애를 두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히 그 솜?
쒼?보통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유가 세 번째 북벌을 감행하여 위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대파하였을 때, 등애는 안서장군(安西將軍)의 신분으로 강유를 맞이하여 싸우고 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진태(秦泰)를 도왔다. 그가 교묘하게 의병(疑兵)을 설치한 뒤에 허장성세를 부리자, 강유는 그 허실(虛實)을 판단할 수 없어 황급히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리하여 포위되어 있던 왕경을 구하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안서장군이 되었다. 등애는 이 때부터 줄곧 위나라의 농우( 右) 지역을 진수하면서 강유의 주요한 적수가 되었다. 쌍방의 거듭되는 교전 중에 등애는 슬기로운 전략적 계책으로 대부분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문에 강유는 자신이 품었던 뜻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헛되이 전력만 낭비하게 되었다. 사마소(司馬昭)가 촉을 멸망시키고자 했을 때, 등애와 종회는 각각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당시 그는 위험을 무릅쓴 채 친히 군사들을 통솔하며 몰래 음평(陰平)을 넘어 부성( 城)을 기습하여 제갈첨(諸葛瞻)을 격파한 다음, 곧장 성도(成都)를 압박하였다. 놀란 유선이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가!
스스로 몸을 묶어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촉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등애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몇 차례나 등애의 나이까지 잘못 기술하고 있다―이것은 등애와 종회가 대체로 같은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나이도 비슷했을 것이라는 착오 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그러나 등애는 실제로 종회 보다 28세나 위였다. 게다가 종회는 현귀(顯貴)한 출신으로 비교적 일찍부터 명성을 떨쳤고, 미천한 출신의 등애는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 인물이었다. 어쨌거나 나관중 또한 일련의 줄거리를 통하여 등애의 걸출한 능력과 비범한 담략(膽略)을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심어 놓았다.
그런데 등애는 군사를 이끌고 적과 전쟁을 하는데는 재간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닥칠 후환을 미연에 방지하는 일에는 소홀하였던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촉을 멸망시킨 뒤, 그는 스스로 세상에서 으뜸가는 공로를 세웠다고 여겼는데,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이성을 잃어버렸는지 자나깨나 자화자찬만을 늘어놓았다. 이 때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또 남들에게 자신을 해칠 기회를 주게되었다. 종회는 재간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마음 씀씀이가 올바르지 못하여 등애를 매우 시기하게 되었다. 특히 위나라의 대권을 장악한 사마소는 음흉하고 잔악한 인물로, 등애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을 걱정하였으므로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전력을 다하여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권모술수가 배후에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등애는 도리어 자신의 주장을 과도하게 내세우는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유선을 촉중(蜀中)에 남겨 부풍왕(扶風王)으로 삼음으로써 오주(吳主) 손휴(孫休)를 유인하여 항복시키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사마소는, 「이 일은 반드시 황제께 보고해야 할 일이지 즉시 시행할 수 있는 일이 아!
니오」라 하였다. 등애는 그 말속에 번득이고 있는 음모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변방에 있는 장수란 때로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경우가 있지요」라는 말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어찌 사마소인들 등애가 스스로 영웅이라 칭하며 할거하려 한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종회마저 거짓 표문을 올려 모함하자, 등애가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혐의는 더욱 짙어졌다. 이리하여 끝내 등애는 영문도 모른 채 투옥되었고, 심지어 종회가 모반죄로 피살된 뒤까지도 여전히 누명을 벗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아무런 저항도 못한 가운데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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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趙]사마휘(덕조) | 작성시간 06.03.14 저 등애가 촉으로 진격할때 부성을 지키던 사람은 마막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면죽관이 제갈첨,제갈상 아닌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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