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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소개

본당 주보성인 - 성 프란치스코

작성자안드레아|작성시간10.01.03|조회수1,556 목록 댓글 0

 

 하기동 성당의 주보 성인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 4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안은 성 프란치스코 (무리요 作)

   (이미지 출처: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앨범>작성자:주호식신부님)

 

-오상(五傷)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Thomas Willeboirts Bosschaert 作)   

   (이미지 출처: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앨범>작성자:주호식신부님)

 

축일

10월 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부제, 설립자

활동지역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1181/1182년?~1226년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을 인정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레크 알 카멜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규칙을 확정짓고 승인을 받았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출처:굿뉴스>가톨릭 성인)

 

 

 

  

                     (이미지 출처: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앨범>작성자:주호식신부님) 

 

평화를 구하는 기도  

                                  

                                    -프란치스코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돼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 조직처럼 갖춰져 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의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한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 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 삼아 세운 것이고 그런 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로 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회」 개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 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임종이 다다르자 회원들은 성인의 원의에 따라 수도회 요람인 뽀르찌운꿀라로 모셨고 1226년 10월 3일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해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2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1. 수도회 창설자편 (3)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주연 기자]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탄절 구유

 

                                                                          -레오나르도 폴리(성 프란치스코회 수사) 

 
크리스마스를 불과 보름 앞두고 프란치스코는 폰테 콜롬보에 있는 그의 은둔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께 그의 규칙을 승인받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삼 년 뒤에 그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번이 그의 마지막 로마 여행인 셈이었다. 얼마 뒤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의 고통까지 겪게 된다.
 
어떻게 성탄을 경축할 것인가?  프란치스코는 성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왜 거기서는 구유를 꾸미지 않는 걸까?  그레치코 가까이에는 동굴이 있는데…….”
 
프란치스코의 친구로서 군인이자 그레치코의 영주인 죠반니(요한) 벨리타가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요한은 프란치스코가 가진 매력에 흠뻑 빠져 세상 모든 명예를 내팽개치고 프란치스코의 삶을 온통 닮고자 했다.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전갈을 보냈다. “만일 그대가 그레치코에서 주님의 축일을 지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준비하여 주시게. 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재현해 보고 싶다네. 나는 소와 나귀들이 서 있는 가운데 건초더미 위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던 그 고초들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란다네.”
 
요한은 곧바로 준비를 하였다. 횃불과 촛불들이 밤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동굴 안에는 구유가 꾸며졌고 소와 나귀도 데려왔다. 수사들의 은둔소에 도착한 프란치스코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이 되자 그레치코에서 손에 손에 횃불과 촛볼을 들고 줄지어 모여든 사람들의 노랫소리로 숲 속이 떠들썩하였다.
 
동굴 둘레에 사람들이 모이자 사제가 미사를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설교를 하였다. 프란치스코와 같은 시기 사람으로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느님의 성자(聖者)가 구유 앞에 서 있었다. 사랑에 가득 차 행복에 겨운 채로…… 그는 사람들을 최상의 선물로 초대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복음을 낭송하였다. 그리고는 가난하신 왕과 베들레헴 고을에 관해 아름다운 말로 이야기하였다.”
 
오늘날도 그레치코에 가면 사람들은 건초더미 위에 놓인 너비가 60cm, 높이가 90cm 되는 돌 하나를 볼 수 있다. 아래위가 모두 어두운 갈색을 띤 이 돌의 가운데에는 갈색 줄무늬가 있다. 위는 울퉁불퉁하고 얄은 V자 홈이 파여 있다.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한 것이 프란치스코가 처음은 아니나, 프란치스코는 매우 극적으로 이를 기념했다. 그는 예수께서 이미 아기 때부터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성 바오로의 대담한 표현처럼 그는 여인에게서 태어나 냉혹하고 거역하기만 하는 세상에 던져진 하느님의 아기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가난을 택하셨는지”를 깨닫도록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몸소 어떤 자금이나 보호책도 없이 공동체가 겨우 살아갈 정도로 극도의 가난을 택하였다. 성탄절 날에 그는 하느님께서 신성을 겨우 간직하신 채로 거기에 계신 것을 보았다.
 
프란치스코가 끊임없이 몰두한 것은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신 그분의 겸손이었다. 그는 오직 베들레헴과 갈바리아만을 생각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삶의 중심은 가난과 겸손과 순명의 덕이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으니,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얻어 주신 유산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주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가난에 대해 묵상하며 눈물을 짓곤 하였다.”고 첼라노는 말한다. 이 축제를 지낸 다음해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 것과 똑같은 다섯 상처(五傷)를 그의 몸에 받는다.
 
프란치스코 시대 이전, 5세기 초엽에, 로마에 있는 성모 대성전에는 베들레헴의 동굴과 비슷한 기도실이 있었다. 실제로 그 기도실 때문에 이 대성전은 “구유가 있는 성모 성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관례적으로 교황은 성탄 첫미사를 여기서 봉헌한다.
 
11세기에 부활 시기의 수난극을 본뜬 성탄극이 생겨났다. 프란치스코 바로 전 세기에는 성직자들이 산파와 동방 박사, 목동들 그리고 성탄 이야기에 나오는 다른 인물들처럼 분장을 하기 시작했고 살아 있는 동물까지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단순하고도 강렬한 예식으로 가톨릭 신자들을 감동시킨 이는 프란지스코였다. 1226년 그가 죽은 뒤, 성탄 구유를 꾸미는 풍습은 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멋지게 번쩍이는 오늘날의 구유를 보고 웃을 것이며, 아마도 살아 있는 동물들과 함께 바깥에 서 있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 앞에 서서 설교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즐거운 광경보다 더 깊은 것을 바라보십시오.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여러분들의 영원한 음식이 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보십시오. 수놓인 옷도 없이 헝겊 조각에 싸인 힘없는 아기를 보십시오. 초라한 옷을 입은 아기의 부모님을 바라보십시오. 작은 불씨만이 비추이는 춥고 더러운 동굴을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사랑과 처절한 고통을 아는 인간의 마음을 취하시어 죄인과 나병 환자를 팔로 끌어안으시고, 볼에 흐르는 눈물을 못에 뚫린 손으로 닦아 주시는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가난하고 겸손하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경배하십시오.”
 
(“Catholic Digest” 1990년 12월호에서 배봉한 옮김)[경향잡지, 1992년 12월호]참조
 (출처: 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자료실>작성자:주호식신부님)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五傷)                                                                                               

 
(그림 설명)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조토, 1295~13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교회, 상부 바실리카의 프레스코.
그리스도의 묵은 상처와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상처 사이에 다섯 가닥의 빛줄기가 이어져 있다. 프란치스코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전날 밤에 가슴에서 금화 셋을 꺼내어 주님께 바쳤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빛나는 덕목이었다. 그림 오른쪽 귀퉁이에는 오상의 기적을 목격한 레오 수사가 앉아 있다.
 
 
“또 한분의 그리스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기적

9월 14일은 골고타 언덕에 십자가를 세운 일을 기억하는 날(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알베르나 산에 있었다. 알베르나는 시커먼 침엽수가 드문드문 있는 바위산이다.

그는 마흔 날 동안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서 단식하고 금욕과 절제의 약속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신비에 대해 묵상하다가 문득 극적인 신비 체험을 겪는다. 하늘에서 날개 여섯 달린 세라핌과 그 한복판에 빛으로 휩싸인 그리스도를 목격한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환시를 경험하는 동안 산꼭대기가 훤하게 빛나는 바람에 인근의 노새꾼들이 아침이 밝은 줄 알고 서둘러 안장을 얹었다가 나중에 동이 다시 트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기적은 환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입으신 손과 발, 옆구리의 다섯 상처가 프란치스코에게 옮겨진 것이다. 그의 고통스런 체험은 그리스도를 닮으려 애쓰던(imitatio) 프란치스코 성인이 수난의 아픈 흔적을 나눔으로써 주님과 하나되는(conformitas)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일은 또 훗날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성인을 기억하면서 「또 한 분의 그리스도」(alter Christo)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프란치스코가 처음으로 오상(五傷)의 신비를 겪은 것은 아니다. 우아니(Oignies)의 성녀 마리아라든가 다른 성인들도 그보다 앞서 같은 체험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상의 사례가 무려 400건이 넘는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오상의 육체적인 현상을 곧바로 깨달았다는 점, 그리고 십자가 책형과 고문의 상처를 그리스도의 환시와 더불어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된다.

프란치스코는 알베르나 산에서 겪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감춘다. 손과 발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형제 수사들이 그의 수도복과 바지를 빨기 위해 가져가다가 다섯 상처의 핏자국을 보고 눈치채자 어쩔 수 없이 털어놓는다. 그의 상처는 신기하게도 덧나지도 않았지만 낫지도 않았다. 끊임없는 고통을 주었을 뿐이다. 그 고통은 바로 프란치스코가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었다.

『그의 손과 발은 가운데 부분들이 못으로 관통된 것 같았다. 즉, 둥글고 검은 색의 못의 머리가 손바닥과 발등의 살 밖으로 나와 있었고, 못 끝은 손등과 발바닥까지 너무 깊숙이 관통하여 쑥 나와 휘어, 구부러진 못의 양끝 사이로 손가락을 쉽게 집어넣을 수 있는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이와 똑같이 오른쪽 옆구리에도 창에 찔린 자국이 나타나, 살이 헤어져 붉게 피가 맺혀 있었다. 그의 거룩한 가슴에는 여러 번 선혈이 흘러나와 수도복과 바지를 적시곤 하였다』(「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 2부 3장).

이탈리아 화가 조토는 알베르나 산의 기적을 동화처럼 맑은 눈빛으로 설명한다. 알베르나 산의 왼쪽 마루에 보이는 붉은 색 움막은 프란치스코가 단식하며 기도하는 장소다. 그의 여윈 얼굴과 헐렁한 겉옷에는 고행의 자취가 역력하다. 성인의 친구 첼라노가 쓴 기록을 보면 프란치스코는 원래부터 몸집이 크지 않았다고 한다.
『체구는 우람하다기보다 아담했고, 머리는 작고 둥근 편이었다. 얼굴은 약간 길고 홀쭉한데, 이마는 반듯했지만 높지 않았다. 크지 않은 눈에 검은 눈동자가 맑았다』

밤의 푸른 눈꺼풀이 허연 바위산을 투명한 이불처럼 덮고 있는 이곳에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허약한 믿음을 책망한다. 「미천한 작은 벌레이며 쓸모 없는 작은 종」인 자신의 존재는 무엇인지 탄식하면서 큰 소리로 주님을 찾는다.

『내 사랑하는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이때 대답이 들려온다. 미천한 벌레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찬란하고 불타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 천사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은 모상을 가졌는데, 그의 날개 중 두 개는 머리 위로 뻗쳤고, 둘은 날 수 있도록 펼쳐져 있고, 다른 둘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프란치스코의 잔 꽃송이」 2부 3장).

여기서 세라핌은 하느님을 모시는 천사다. 예언자 이사야도 세라핌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 씩 달린 스랍(세라핌)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이사야 6, 1).

가까이 날아온 세라핌을 보면서 프란치스코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미소지으며 자신을 내려다보시는 그리스도의 다정한 얼굴을 뵙고는 한없는 사랑에 기뻤지만, 수난의 상처를 목격하고는 비탄과 연민을 가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알베르나 산에서 겪은 사랑과 연민의 기억을 오래 간직한다. 그가 다섯 군데 상처를 달래고 자신의 믿음을 쓰다듬으면서 불렀다는 아름다운 노래가 한 편 전해진다.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의 고백은 이탈리아 최초의 종교시로도 알려져 있다. 프란치스코는 하늘의 무지개 다리에 걸친 고귀한 태양과 달과 별들, 바람과 구름으로 하여금 입술을 열어서 주님을 찬양하게 하고, 숨쉬는 자연을 자신의 형제와 누이로 끌어안는다. 또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한 샘물과 밤을 밝히는 고마운 불 그리고 강인하고 친절한 대지의 착한 품성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칭찬한다. 프란치스코의 마음자락은 얼마나 넓고 너그러운지 죽음조차 다정한 누이로 끌어안는다. 죽음조차 그에게는 오상의 달콤한 기억을 깨우치는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누이인 육신의 죽음을 통하여 찬양합니다. 살아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 법. 무거운 죄악을 벗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자, 참으로 가련합니다』(태양의 노래).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7일](글:노성두님)참조
 
 
 
프란치스코 성인과 성 다미아노 십자가

  

 이콘은 오랫동안 아시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 있었기에

“성 다미아노 십자가”라고 불리어졌다.

이 십자가는 12세기에 시리아 수도자에 의하여 그려진 비잔틴 양식의 이콘이다.

풍요로운 의미가 담긴 이 이콘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의 모든 신비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이콘은 분명 요한 복음에 기초를 둔 요한계 이콘이다.

가시관 대신 놓여진 영광의 관은 이것을 입증하는 분명한 표이다.

여기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영광으로 변모되어 있다. 예수님의 오른쪽 옆구리 상처 역시 사랑하는 사도 요한에 의하여 표현된 신앙고백의 하나이다.


이 이콘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주는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요한의 독특한

표현을 빌어 그리스도, 하느님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말해준다.

요한 복음은 빛과 어두움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1, 5).

이 이콘에서 이 마지막 싸움의 결과가 두드러진다.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몸이 어두운 배경(즉, 검은 색은 빛에 반대되는 상징, 불신앙의 상징, 죄의 상징)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더욱 더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한편, 붉은 색은 사랑을 상징하며, 이콘에 관한 모든 것을 뒷받침해 주고, 어두움을 극복한 빛과 사랑의 승리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1205년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십자가의 주님으로부터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즉시 이 성당의 보수에 착수하였고, 이후 성 베드로 성당과 뽀르찌웅꿀라의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도 보수하였다.

주님의 이 말씀이 교회 재건을 의미함을 그는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에 있어 중대한 전기를 마련해 준 이 십자가는 타우 십자가와 더불어 프란치스칸들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이 십자가는 1260년 성 다미아노의 글라라 자매들의 이전과 더불어 성녀 글라라 대성당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작은형제회 유기서원소 홈페이지 참조)

(출처: 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자료실>작성자:주호식신부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바쳤던 기도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프란치스코 성인과 타우 십자가

 

 

 

타우(T)는 십자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히브리어 알파벳의 22번째 글자, 즉 마지막 문자이다.

타우는 성서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타우로 표시되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 타우 표시에 대하여, 에제키엘서(9,1-11)에서 말하고 있다.

“이마에 표(타우)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 …”(에제키엘9,6). 

이 구절에 나오는 타우 표는 그 옛날 이집트에서 어린양의 피가 묻은 문이 히브리인들을 살리는 힘이 되었듯이

(탈출 12,21-28 참조), 타우의 표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표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가 이 타우의 표를 알게 된 것은 1215년의 일이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3세께서 제4차 라떼라노 공의회를 공고하는 편지에서 이 타우 표를 참조하셨던 것이다. 교황은 그 시대 모든 크리스찬의 열심없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실 때, 에제키엘서 9,1-11에 나오는 모시옷을 입은 사람이 했던 것을 당신께서도 자신의 시대의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고자 이 성경 구절을 적용하셨던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는 그때부터 이 타우 표를 싸인으로도 쓰고, 형제들의 침실의 문을 이것으로 꾸미기도 하고(이집트 과월절의 히브리인들의 문처럼), 기적을 행하기 전에도 사용하였다.

 

요즘은 이 타우 표를 성 프란치스코 1, 2, 3 회원들의 뱃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타우의 표는 하느님의 것이란 뜻이며, 타우의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믿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홈페이지 참조)

(출처: 굿뉴스>가톨릭성인>성인자료실>작성자:주호식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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