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 지장보살의 툭담과 구화산 화성사 (費冠卿 九華山化城寺記)
2019년 12월 31일
* 신라시기 김교각(金喬覺, 696-794) 지장 스님께서 유가 6경과 도교 경전을 공부하셨지만 불교가 마음에 맞아 출가하셨고, 24살에 중국에 건너가 구화산 산봉우리 석굴에서 참선하여 수양공부를 하셨답니다. 지장 스님은 참선에 전념하셨고 시주를 받지 앉아 흙을 파먹을 만큼 가난하였습니다. 구화산 아래 사는 사람들(아마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보고 울면서 땅을 사서 드리고 참선하실 암자도 지어드렸습니다. 뒤에는 지방관이 존경하고 시주하고 화성사(化城寺) 이름을 중앙정부에 올려 허가를 받았고 부유한 상인들도 시주하였습니다.
신라에서 많은 스님들이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계신 스님을 찾아왔기에 양식과 옷이 부족하였답니다. 그래서 논밭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어 양식을 마련하고 삼을 심어 마의(麻衣)을 지어 팔아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셨답니다. 스님들께서 농업을 경영하여 자급자족하셨답니다.
지장 스님은 24살에 건너가 곧바로 구화산에 올라가서 99살에 입적하실 때까지 75년 동안 참선하셨습니다. 입적하신 뒤에도 몸이 부드럽고 굳지 않아 앉은 자세 그대로 상자에 넣어 보관하였고, 3년 뒤에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여전히 얼굴이 살아계실 때처럼 생기가 있고 골절들도 쇠사슬처럼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경에서 “부처와 보살 및 나한은 골절들이 쇠사슬처럼 연결되었고(鉤鎖骸骨), 골절을 두드려 나는 소리를 듣고 경지를 알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지장 스님이 보살이라고 판정하였습니다. 사실상 이런 현상은 지장 스님께서 오랫동안 깊이 참선하신 결과입니다. 불교에서 사망(死)과 멸진정(滅盡定)을 구별하고 멸진정 상태에서는 지장 스님의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툭담(tukdam)입니다. 지장 스님의 툭담은 3년 넘게 지속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설사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지장 스님의 참선을 존경한다는 뜻에서 “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고, “김지장(金地藏)”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부터 지장보살을 모신 구화산 화성사가 전국에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화산 화성사가 유명하게 되었던 근본 이유는 지장 스님의 참선과 툭담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양자강 남쪽 강가에 있는 구화산은 멀리 양자강 건너 서북쪽의 천주산과 양자강 남서쪽의 여산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육조시기에는 남경의 수도권 지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경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절이 되었습니다.
명나라 왕양명은 30대와 40대 나이에 구화산에 올라가서 화성사에 머물었고 시를 지었습니다. 구화산에 2번 올라갔는데 남은 작품은 많지 않지만 여러 소문들은 남아있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이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을 가졌는데, 불교에서는 지장보살, 도교에서는 도홍경을 동경하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는 유명한 절이 넷이 있는데, 보타산(普陀山)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아미산(峨眉山)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오대산(五台山)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구화산(九華山)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있습니다. 세 보살은 인도의 보살이고 지장보살은 신라 출신의 보살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지장보살은 한국과 중국의 불교신도들이 함께 모셔온 신앙입니다. 결코 출신이 한국이다 중국이다 문제를 따지면 안 됩니다. 지장 스님께서 오랫동안 참선하시면서 농업을 경영하여 비용을 충당하셨고 현지의 많은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운영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현지 스님들과 신라 스님들을 평등하게 받아들이고 가르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입적하신 뒤에 ‘지장보살’이라고 당시 사람들이 판정하고 지금까지 모셔왔습니다. 원나라시기 진암(陳巖, 1240-1299)도 말하였듯이 이것은 불교 입장에서 보면 문화정체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진암은 중화문화로 중국의 주변 민족들을 개화시킬 것이냐? 주변 민족들의 문화로 중국을 개화시킬 것이냐? 문제를 따지지 말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국 불교신도들이 구화산 화성사에 가셔서 지장보살께 참배하시더라도 중국문화도 존중하고 중국 신도들과 서로 화목하고 따듯하고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당나라시기 지식인 비관경은 진사에 합격한 뒤 은거한 문인이었고 어려서부터 구화산 화성사의 지장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지은 기록은 당나라시기 산문 가운데 뛰어난 문학작품이라고 평가 받습니다. 산문이기에 비유와 대구 모두 잘 짜여있습니다. 다만 번역하면서 살려내기 어렵기에 원문을 보시고 감상하길 바랍니다.
* 당나라 비관경(費冠卿)이 지은 「구화산 화성사 기(九華山化城寺記)」은 아래 서적 등에 남아있습니다. 송나라시기와 명나라시기에도 다시 기록하고 윤색하여 보존하였습니다.
『全唐文』,卷694,費冠卿,「九華山化城寺記」。
宋、贊寧(919-1001),『高僧傳』,卷20,感通篇,「金地藏傳」。
明、『神僧傳』,卷8,「地藏傳」。
『文苑英華』,卷817,「九華山化城寺記」。
『(民國)九華山志』,卷三,「九華山化城寺記」。卷四,「重建九華化城寺碑記」。
陳巖(1240-1299),「雙峯菴」:
(原注:山西九子峯下,唐末新羅僧建立,亦號新羅菴。)
江南九子雲深處,亦有新羅國裡人。
用夏變夷變夷夏,世間畢竟是誰眞?
* 하곡학연구원 카페 2019년 3월 28일
신라의 누런 쌀(黄粒稻) 종자를 중국 구화산(九華山)에 이식하였다는 지장보살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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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경(費冠卿),「구화산 화성사 기록(九華山 化城寺 記)」
(『전당문(全唐文)』,卷694):
당나라 사람 비관경(費冠卿)은 자(字)가 자군(子軍, 또는 一車)이며 지주(池州) 청양현(靑陽縣) 사람이다.(永泰元年, 765年에 青陽縣을 池州에 귀속시킴.) 원화(元和) 2년(808)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어머니 장례에는 묘소에서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지냈고, 구화산(九華山) 소미봉(少微峰) 아래에서 은거하였다. 장경(長慶) 3년(823)에 어사(禦史) 이인수(李仁修)가 효절(孝節)하다고 천거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관직을 받지 않았다.
冠卿,字子軍,青陽人。元和二年進士。母喪廬墓,隱居九華少微峰。長慶三年(823),禦史李仁修舉孝節,召拜右拾遺,辭不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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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화산은 옛날에 구자산(九子山)이라고 불렸고, 양자강 동쪽지역에서 가장 우뚝하게 높으며, 양자강 남쪽 서안에 있는 봉우리들은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바라보며) 서북쪽에 있는 첨산(灊山, 현재 天柱山이며 한나라시기의 남악이다. 『漢書、郊祀志』:“南嶽灊山於灊。”)과 서남쪽에 있는 여산(廬山)을 막아서있고, 깎아지른 듯이 높은 봉우리들은 구름보다 높이 솟아있고 산줄기들이 사방 1천리까지 멀리 펼쳐졌는데, 높은 봉우리들과 높은 고개들을 신하들처럼 거느리고, 높고 낮은 언덕들을 아들들처럼 이어놓았습니다.
우주가 창조될 때 원기가 응결되어 구화산이 되었고 지금까지 몇 만년이 지났습니다. (삼국시기 손권이 건강 建康, 현재 남경에 수도를 세운 뒤) 육조시기에도 수도가 되었고(육조시기 건강의 인구는 28만 호에 100만 명 인구) 구화산은 건강을 지키는 수도권 지역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구화산을 올려보고 우주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구화산은 세상 사람들 바뀌는 것을 굽어보고 세월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것을 압니다. 지금까지 훌륭한 임금들과 뛰어난 신하들이 읊은 구화산 노래들이 아주 많으며, 아직도 읊지 못한 노래들은 구화산에게는 섭섭하겠지요.
당나라 개원(713-741) 말년에 장씨 성을 가진 단(檀) 글자 항렬의 스님이 지주(池州) 서성현(舒城縣)에서 구화산에 오셨는데, 청양현 지역유지 호언(胡彥)이 모셔왔고 많은 남녀들을 가르쳐 출가시키셨지만, 당시 지역 호족(豪族)의 미움을 받고 지방관이 사정을 모른 채 스님이 계신 곳을 불태워 없애버렸습니다.
이때 지장(地藏) 스님이 계셨는데 신라국 국왕 김씨 가까운 가족이며, 고개가 꼿꼿하고 풍채도 크며 큰 키는 196~219㎝(唐 1尺=0.280~0.313)이며 힘은 일반인 몇 명보다 세었습니다. 일찍이 평론하여 “유가 경전 육경은 속세 안을 벗어나지 않고, 도교 삼청은 도술 안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불교의 최고 진리만이 나의 뜻에 맞는다.”고 말하였답니다. 삭발하고 출가한 뒤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왔고 배를 내려 걸어오다가 구름 속에 솟아있는 구화산을 보고 1천리 밖에서부터 곧바로 왔답니다. 덤불을 헤치고 산봉우리를 넘고 골짜기를 건너 산속에 있는 평지에 도착하였는데 남향에 넓었습니다. 흙도 검게 기름지고 샘물도 물맛이 좋았습니다. 깨끗한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샘터에서 물을 길어 살았는데, 자신이 고결하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뱀에게 물린 적이 있었지만 정좌하여 뱀의 나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고 있었는데,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절을 올리고 약을 바치면서 “저의 어린애가 몰라서 스님을 물었습니다. 샘물이 나오게 하여 잘못을 보상해드리겠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스님이 말을 듣고 앉아있는 바위를 보니 바위 틈새에서 샘물이 철철 소리를 내며 솟아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부인이 구자산 산신이라고 여겼습니다. 스님의 평생소원은 4부 경전을 쓰는 것이었기에 산을 내려와 남릉현(南陵縣)가 갔는데 유(兪)씨와 탕(湯)씨(『嘉靖 池州府志』, 卷7, 「人物篇」에는 당나라시기에 湯씨 여러 명을 기록한 것을 보면, 蕩은 湯의 오자라고 생각함.) 등이 경전을 써서 바쳤습니다. 경전을 받아 구화산으로 돌아온 뒤에는 사람들 사는 속세에는 다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당나라 숙종(肅宗)의 지덕(至德, 756-758)연간 초년에 제갈절(諸葛節)과 몇몇 사람들이 산줄기를 따라 산봉우리에 올라갔는데 산이 깊어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구름에 흐렸다가 햇볕이 다시 비추자, 뜻밖에도 스님 한 분이 바위 굴속에서 눈을 감고 정좌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스님 곁에 있는 다리 부러진 솥을 보니, 솥 안에는 하얀 흙에 쌀을 조금 넣어 끓여서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 장로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스님께서 이렇게 고행하고 계신 것은 저희들의 큰 잘못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구화산을 내려와서 돈을 모아 얼마 전에 단(檀) 글자 항렬의 스님이 계셨던 땅을 사서 지장 스님께 드렸으나 받지 않으셔서 죽음을 각오하고 간청을 드리자 스님께서 억지로 따르셨습니다. 구화산 근처 사람들 가운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나무를 베어 집을 지어드렸고 참선하는 방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뒤에는 상좌승 승유(勝諭 일명 勝瑜) 등이 힘을 모아 여러 대(臺)과 전(殿) 등 건물을 지었는데, 큰 재목들은 구화산 땅에서 자랐으니 베어서 썼고, 좋은 돌들도 다른 산에서 가져오지 않고 구화산에서 마음껏 다듬어 썼습니다. 골짜기 물길을 파서 평지를 모두 논으로 만들고 물길을 살펴보아 넓은 연못을 만들어 방생지(放生池)로 삼았습니다. 중심의 큰 건물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불상 좌우도 잘 꾸몄고, 곁에는 붉은 대(臺)를 세우고 크고 좋은 소리 나는 종을 달았고, 몇 층의 문을 세워 절에서 제일 높게 지었습니다. 건물마다 붉고 흰 단청을 칠하였고, 건물은 층층이 높이 올려 하늘로 솟았습니다.
절 앞의 전망을 보면 바위 산줄기들이 줄을 지었고, 뒤쪽에는 소나무와 회나무들이 늘어섰습니다. 낮의 밝은 햇빛과 밤의 어두운 달빛이 돌아가며 단청의 색깔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하였고, 구름과 안개가 모였다가 흩어짐에 따라 절의 풍경을 다양하게 나타냈습니다. 소나무의 바람소리와 원숭이 우는 소리들이 서로서로 끊겼다 이어졌는데, 모든 풍경은 인간속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나라 덕종(德宗)의 건중(建中, 780-783)연간 초년에 지주군(池州郡) 군수 장엄(張嚴)이 취임하여 지장 스님의 높은 인격을 존경하고 많은 재물을 바쳤고 절의 이름을 화성사(化城寺)라고 고쳐서 중앙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지주군에 어진 군수가 취임할 때마다 모두 스님을 높이 존경하였습니다. 강서지역의 상인들도 구름 위에 솟은 구화산을 바라볼 때마다 비단과 돈을 시주하고 부처님께 향을 사르며 절하였고, 멀리 떠나서라도 부처님께서 스님이 공덕을 널리 베푸시는 것을 도와주시길 빌었습니다. 스님께 직접 법문을 듣고 배운 사람들이야 느끼고 깨달은 것이 얼마나 깊겠습니까! 인근 지역의 호족들도 구화산을 바라볼 때마다 절을 올리고 반드시 사원 경영에 도움이 될 자산을 기부하였습니다. 지주군 군수들이 어찌 예의에 벗어나서 스님을 존경하였겠습니까? 부유한 상인들이 어찌 재산을 가볍게 여겨서 기부하였겠습니까? 모두 스님의 도덕이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신라 본국에서도 스님의 도덕을 듣고 서로서로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 출신 제자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스님은 양식이 떨어질까 걱정하시고 돌을 들추어 흙을 파냈는데, 흙은 검으면서도 하얗고 밀가루 반죽처럼 고와서 돌멩이가 씹히지 않았습니다. 여름에는 밥 먹을 때 흙은 섞어 먹었고, 겨울에도 옷을 적게 입으려고 불을 가까이하였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절의 스님들은 모두 농사짓고 땔나무하여 자급자족하였습니다. (『宋高僧傳』:“절의 스님들은 지장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을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음식을 잘 먹어 건강하게 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짝 마른 스님들을 남쪽지역에서는 ‘장작개비 스님(枯槁眾)’이라고 불렀고 누구나 존경하였습니다.”)
해마다 지장 스님께서 스님 한 분을 데리고 남대(南臺)에 머무시며 손수 마의(麻衣)를 짜셨는데 60근이나 많이 짜셨고 침대에는 마의를 쌓아놓으셨습니다. 방생지 옆에 건물을 짓고 필사한 4부 불경을 보관하시고 하루 종일 향을 사르고 경전의 깊은 뜻을 이해하셨습니다.
99살 되시던 덕종 정원(貞元) 10년(794) 여름에 갑자기 스님들을 불러놓고 고별하셨고 어디로 가신다고 알려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산이 울리고 바위들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는데, 이처럼 의식이 없는 바위들도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입적하실 때에는 시중드는 스님이 찾아가서 말씀드리기도 전에 절에 있는 종을 쳤더니 종소리도 없이 땅에 떨어졌고, 방에 들어가니 서까래 3개가 무너졌는데, 모두 우리 지장 스님께서 신식(神識)이 신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까! 정좌하여 돌아가신 신체를 그대로 상자(函)에 담아놓았고 3년 뒤에 꺼내서 다비하여 탑에 모시려는데, 얼굴 모습이 살아계실 때처럼 살아있듯이 부드럽고, 골절을 수습하는데 골절들은 쇠사슬을 흔드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어 흔들렸습니다. 불경에 말하길 “보살의 골절은 쇠사슬처럼 연결되었는데, 쇠사슬처럼 연결된 해골을 두드려 나는 소리를 듣고 신식(神識)이 오도(五道) 가운데 어떤 도(道)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지장 스님의 골절이 쇠사슬처럼 연결되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보살’ 경지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스님의 탑을 쌓으려는 땅바닥에서는 불을 피워놓은 것처럼 빛이 나왔는데, 이것은 여래, 보살, 나한의 경지를 오르신 것을 나타내는 원광(圓光)입니다! 스님의 전신사리를 모신 건물은 많은 목재로 잘 지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호하였습니다. 절에 돈을 시주하면 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지장보살께서는 세상에 내려오시면 왕이 되시고 올라가시면 성지에 가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살아계실 적부터 스님의 불법을 보호하였던 높은 관원들부터 시주한 스님들과 시주한 사람들까지 모두 이름을 비석에 새겨놓았습니다.
저와 같은 지식인은 병이 나서 앓다가 죽을 때까지 커다란 공적을 세워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지도 못하고, 또한 재산을 많이 모으지도 못하여 남는 재산을 선뜻 내놓아 죽은 뒤의 좋은 인연을 쌓지도 못하고, 다만 살생하여 고기를 먹고 처자식을 돌보고 있는데, 살아있을 때는 남들의 비난을 받고 죽어서는 귀신들의 질책을 받습니다. 정말로 슬픕니다!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계사년(813)에 나는 구화산 아래에 한가히 살고 있었고 어릴 때 보고 들었던 것들을 정리하여 가을 음력 7월 보름에 기록을 썼습니다.
費冠卿,「九華山化城寺記」(『全唐文』,卷694):
九華山,古號九子山,崛起大江之東,揖灊、廬於西岸,儼削成於天外,旁臨千餘里,高峰峻嶺臣焉。連岡走隴子焉。自元氣凝結,幾萬斯年,六朝建都,此爲關輔。人視山而天長,山閱人而波逝。其間聖后賢臣,詠歌疊興,言不及者,茲山屈焉。開元末,有僧檀號,張姓,自郡舒至,爲鄉老胡彥請住,廣度男女,時豪所嫉,長吏不明,焚其居而廢之。
時有僧地藏,則新羅國王子金氏近屬,項聳骨奇,軀長七尺,而力倍百夫。嘗曰:“六籍寰中,三清術內,唯第一義,與方寸合。”落髮涉海,捨舟而徒,睹茲山於雲端,自千里而勁進。披榛援藟,跨峰越壑,得谷中之地,面陽而寬平。其土黑壤,其泉滑甘。巖棲澗汲,以示高潔。曾遇毒螫,端坐無念,有美婦人,作禮奉藥,云:“小兒無知,願出泉補過。”應視坐石,石間潗濬,時人謂九子神焉。素願寫四部經,遂下山至南陵,有俞蕩等寫獻焉。自此歸山,跡絕人里。
逮至德初(756-757),有諸葛節等自麓登峰,山深無人,雲日雖鮮明,居唯一僧,閉目石室。其旁折足鼎中,唯白土少米,烹而食之。群老投地號泣:“和尚苦行若此,某等深過!”已出泉布,買檀公舊地,敢冒死請大師從之。近山之人,聞者四集,伐木築室,煥乎禪居。有上首僧勝諭(『文苑英華』 권817에는 勝瑜라고도 함)等,同建臺殿。楩柟豫章(樟),土地生焉,斷而砍之。珷玞琪瓊,不求他山,肆其磨礱。開鑿溪澗,盡成稻田,相水攸瀦,爲放生池。乃當殿設釋迦文像,左右備飾。次立朱臺,掛蒲牢於其中,立樓門以冠其寺。丹素交彩,層層倚空。岩巒隊起於前面,松檜陣橫於後嶺。日月晦明,以增其色。雲霞聚散,而變其狀。松聲猿嘯,相與斷續,都非人間也。
建中初(780),(池州郡)張公嚴典是邦,仰師高風,施捨甚厚,因移舊額,奏置寺(化城寺)焉。本州牧賢者到寺,嚴師之敬。江西估客於雲外見山,施帛若干匹,錢若干緡,焚香作禮,遙以祈佑師廣德焉。況親承善誘,感悟深哉!旁邑豪右,一瞻一禮,必獻桑土。豈諸牧不合禮焉?富商大族輕其產哉?道德感也!本國聞之,相與渡海,其徒實眾。師憂無糧,發石得土,其色青白,不墋如麵。夏則食兼土,冬則衣半火。無少長,畬田采薪自給。(『宋高僧傳』:“其眾請法以資神,不以食而養命,南方號爲枯槁眾,莫不宗仰也。”)中歲領一從者,居於南臺,自緝麻衣,其重兼鈞,堂中榻上,惟此而已。池邊建臺,厝四部經,終日焚香,獨味深旨。時年九十九,貞元十年(794)夏,忽召衆告別,罔知攸適。但聞山鳴石隕,感動無情與!將滅,有尼侍者來,未及語,寺中扣鍾,無聲墜地。尼來入室,堂椽三壞,吾師其神歟?趺坐函中,經三周星,開將入塔,顏狀亦如活時,舁動骨節,若撼金鎖。『經』云:“菩薩鉤鎖,百骸鳴矣。”基塔之地,發光如火,其圓光與!
佛廟群材締構,眾力保護。施一金錢,報一重果。下爲輪王,上登聖地。昔有護法良吏,洎施一僧、檀越等,具刻名於石。
士疾歿代,不能立殊績以濟眾,又不能破餘財,崇勝因緣,啄腥羶,顧兒婦,生爲人非,死爲鬼責,悲哉!
時元和癸巳歲,予閑居山下,幼所聞見,謹而錄之,孟秋十五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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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雲日:구름 끼었지만 구름 사이로 잠깐 비추는 햇볕.
唐、裴迪,「茱萸沜」詩:“雲日雖回照,森沉猶自寒。”
楩枏豫章:
『淮南子·齊俗訓』:“伐楩枏豫章(樟),而剖棃之,或爲棺槨,或爲柱梁。”
桑土綢繆:比喻勤於經營,防患未然。
『詩、豳風、鴟鴞』:“迨天之未陰雨,徹彼桑土,綢繆牖戶。”
朱熹集傳:“我及天未陰雨之時,而往取桑根以纏綿巢之隙穴,使之堅固,以備陰雨之患。”
兼鈞:30斤×2=60斤
三十斤爲鈞,四鈞爲石。
顏狀亦如活時,舁動骨節,若撼金鎖:
『雜阿含經』,「伽摩比丘所問經」:
“捨於壽、暖,諸根悉壞,身命分離,是名為死。滅盡定者,身、口、意行滅,不捨壽命,不離於暖,諸根不壞,身命相屬,此則命終、入滅正受差別之相。”
菩薩鉤鎖,百骸鳴矣:
『菩薩處胎經』、「五道尋識品」:
“佛告彌勒:汝觀鉤鎖骸骨,令一切眾,知識所趣,分別決了,令無疑滯。
爾時,彌勒菩薩,即從座起,手執金剛七寶神杖,攬鉤鎖骸骨,聽彼骨聲。……
佛告彌勒:過去未來現在諸佛,舍利流布,非汝等境界所能分別。何以故?此舍利,即是吾舍利。”
圓光:
『廣弘明集』,十三,釋唐、法琳,『辨正論、喻篇上』:“如來,身長丈六,方正不傾,圓光七尺,照諸幽冥。項有肉髻,其髮紺青,耳覆垂埵,目視開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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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贊寧(919-1001),『高僧傳』,卷20,感通篇,「金地藏傳」:
『大正藏』,第50冊,No.2061
* 붉은 글자는 『全唐文』의 「九華山 化城寺記」와 다른 부분입니다.
釋地藏,姓金氏,新羅國王之支屬也。慈心而貌惡,穎悟天然,七尺成軀,頂聳奇骨,特高才力可敵十夫。嘗自誨曰:“六籍寰中,三清術內,唯第一義,與方寸合。”於時,落髮涉海,捨舟而徒,振錫觀方,邂逅至池陽,睹九子山焉,心甚樂之,乃逕造其峰,得谷中之地,面陽而寬平。其土黑壤,其泉滑甘,岩棲澗汲,趣爾度日。藏嘗爲毒螫,端坐無念,俄有美婦人,作禮饋藥,云:“小兒無知,願出泉以補過。”言訖不見,視坐左右間潗㵫然。時謂爲九子山神,爲湧泉資用也。其山,天寶中,李白遊此,號爲九華焉,俗傳山神婦女也。其峰多冒雲霧,罕曾露頂歟。藏素願持四大部經,遂下山至南陵,有信士爲繕寫,得以歸山。至德年初,有諸葛節,率村父自麓登高,深極無人,雲日鮮明,居唯藏孤然,閉目石室。其房有折足鼎,鼎中白土和少米,烹而食之。郡老驚歎曰:“和尚如斯苦行,我曹山下列居之咎耳。”相與同構禪宇,不累載而成大伽藍。建中初,張公嚴典是邦,仰藏之高風,因移舊額,奏置寺焉。本國聞之,率以渡海相尋,其徒且多,無以資歲。藏乃發石得土,其色青白,不磣如麵,而供眾食。其眾請法以資神,不以食而養命。南方號爲枯槁眾,莫不宗仰。龍潭之側,有白墡硎,取之無盡。以貞元十九年夏,忽召眾告別,罔知攸往。但聞山嗚石隕,扣鍾嘶嗄。如趺而滅,春秋九十九。其屍坐於函中,洎三稔,開將入塔,顏貌如生,舉舁之動骨節,若撼金鎖焉,乃立小浮圖於南台,是藏宴坐之地也。
時徴士、右拾遺、費冠卿序事存焉。大中中,僧應物亦紀其德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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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성조,『神僧傳』,卷八,「地藏傳」:
(『新修大正藏經』,Vol.50, No.2064)
* 붉은 글자는 『全唐文』의 「九華山 化城寺記」와 다른 부분입니다.
문장은 대체로 송나라 『高僧傳』의 「金地藏傳」을 베꼈습니다.
釋地藏,姓金氏,新羅國王之支屬也。慈心而貌惡,穎悟天然,七尺成軀,頂聳奇骨,特高才力可敵十夫。嘗自誨曰:“六籍寰中,三清術內,唯第一義,與方寸合。”於時落髮涉海,拾舟而徒,振錫觀方,邂逅至池陽,睹九子山焉。心甚樂之,乃逕造其峰,得谷中之地,面陽而寬平。其土黑壤,其泉滑甘。巖棲澗汲,趣爾度日。藏嘗爲毒螫,端坐無念。俄有美婦人,作禮饋藥,云:“小兒無知,願出泉以補過。”言訖不見,視坐左右間潗㵫然。時謂爲九子山神,爲湧泉資用也。其山,天寶中,李白遊此,號爲九華焉,俗傳山神婦女也。其峰多冒雲霧,罕曾露頂歟。藏素願持四大部經,遂下山至南陵。有信士爲繕寫,得以歸山。至德年初,有諸葛節,率村父自麓登高,深極無人,雲日鮮明,居唯藏孤然,閉目石室。其房有折足鼎,鼎中白土和少米,烹而食之。郡老驚歎曰:“和尚如斯苦行,我曹山下列居之咎耳。”相與同構禪宇,不累載而成大伽藍。建中初,張公嚴典是邦,仰藏之高風,因移舊額,奏置寺焉。本國聞之,率以渡海相尋。其徒且多,無以資歲。藏乃發石得土,其色青白,不磣如麵而供眾食。其眾請法以資神,不以食而養命,南方號爲枯槁眾。莫不宗仰。龍潭之側,有白墡硎,取之無盡。以貞元十九年夏,忽召眾告別。罔知攸往。但聞山嗚石隕,扣鍾嘶嗄。加趺而滅,春秋九十九。其屍坐於函中,洎三稔,開將入塔,顏貌如生,舉舁之動骨節,若撼金樔焉。乃立小浮圖於南臺。是藏宴坐之地也。
時徴士、右拾遺、費冠卿序事存焉。大中中,僧應物亦紀其德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