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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영 묘지명 번역(唐、新羅國故質子、蕃長、朝散大夫、試衛尉少卿、金君墓誌銘) 廣文館 進士 從侄良說撰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5.06.18|조회수66 목록 댓글 0

신라 김영 묘지명 번역(唐、新羅國故質子、蕃長、朝散大夫、試衛尉少卿、金君墓誌銘)

廣文館 進士 從侄良說撰

출처:澎湃新聞記者 王健(本文來自澎湃新聞,更多原創資訊請下載“澎湃新聞”APP)

2025년 6월 16일

 

 

지난 6월 16일(월) 뉴스와 신문에서 신라 왕족 무덤을 처음 찾았다고 알렸다. 몇몇 역사 연구자들도 간단히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에서 6월 14일(토) 섬서성 고고연구원에서 「陝西西安唐新羅質子金泳墓發掘簡報」와 「唐新羅質子金泳墓志考略」 2편을 발표한 뉴스를 옮긴 것이다.

 

물론 한국 연구자들이 앞으로 높은 연구성과를 상세하게 밝히리라고 기대하며, 현재 중국 섬서성 고고연구원 연구원 2명의 연구성과 발표를 참고하고 아울러 이들이 주목하지 못한 몇 가지 내용을 첨부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전체 내용은 신라에서 당나라에 볼모(質子)로 가서 황실에 숙위하던 김의양(金義讓)의 볼모 신분을 그의 아들과 손자 김영(金泳, 747-794) 및 증손자가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당나라 덕종 연간에 중흥에 힘쓸 때 신라 국왕이 당나라 황실에 김영을 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을 관리하는 번장(蕃長)에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거나 추천하였고 당나라에서는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의양부터 손자 김영까지 볼모와 번장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갖고 양국의 교류에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번장 임명은 신라국 국왕의 요청이 있다는 것이다.

 

김영의 정치적 활동은 당 덕종(德宗, 李适, 742-805, 재위 기간 779-805)이 태자일 때 세마에 되어 당나라 중흥의 기획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덕종은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에 38살(779)에 즉위하여 환관을 물리치고 문무관원을 믿었으며 양염(楊炎)을 재상에 등용하여 조용조(租庸調) 세제를 폐지하고 양세법(兩稅法)을 실행하였고 또 삭번(削藩) 전쟁을 일으켜 실패하였으나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시 말해 덕종이 중흥하려고 힘쓰기 이전부터 김영은 태자세마로서 앞장섰고 덕종이 즉위한 뒤 중흥에 힘쓰는 동안에도 김영은 신라와의 평화적인 외교에 힘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영의 혼인을 주목해보면 부인이 태원(太原) 왕씨이며 당나라 경기도(京畿道) 언사현(偃師縣) 현령(縣令) 왕천령(王千齡)의 딸이다. 왕천령은 당 현종의 폐위 태자 이영(李瑛)의 딸 동양군주(東陽郡主)와 혼인하여 자녀 1명(외동딸?)을 두었고 동양군주가 죽은 뒤에 양씨(楊氏) 부인을 다시 얻었다고 한다. 동양군주가 비록 폐위된 태자의 딸이고 군주(郡主) 신분으로서 낮았으나 황실과의 직접관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김영의 부인 태원 왕씨는 동양군주의 딸이라고 추측한다.

 

김영(747-794)은 당나라에서 유학(儒學)을 배운 유학자이며 관원이었다. 그는 한유(韓愈, 768-824, 792년 진사 등제)와 생졸연도가 2년 겹친다. 김영은 신라에 와서도 당나라 제도와 문화(禮義)를 적극적으로 알렸고 또 당나라 등주(登州)에 거류하던 신라인들에게는 신라의 풍속(風俗)을 널리 전파하여 문화 정체성을 공고히 하였다고 한다. 신라는 번국으로서 풍속이라고 말하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은 예의(禮義)라고 말하여 풍속과 예의를 구분하였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 아들 2명이 아버지 김영의 병을 낫게 하려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또 묘지명을 쓴 조카는 광문관에서 진사 시험을 준비하며 유학을 배웠다.

 

「묘지명」에서는 김영이 신라에 사행을 간 연도가 대력 3년(768)과 정원 원년(785)이다. 그런데 『구당서(舊唐書)』,열전(列傳) 권99에는 대력 3년(768) 사행 정사(正使)가 귀숭경(歸崇敬, 720-799)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밖에도 『전당문(全唐文)』과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똑같이 기록하였다. 귀숭경은 신라에 사행 가서 뇌물을 요구하지 않아 신라 사람들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또 『신당서(新唐書)』 권58 「예문지(藝文志)」와 『옥해(玉海)』 권153에는 “대력 연간에 귀숭경이 신라에 사행 갈 때 고음이 종사관이었다.(大歷中,歸崇敬使新羅,愔為從事)”고 기록하였다. 귀숭경의 종사관 고음(顧愔)이 대력 3년 신라에 사행 다녀와서 『신라국기(新羅國記)』 1권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 연구(周斌,「唐人顧愔及其《新羅國記》考論」, 2016年第2期)에 따르면 김부식 『삼국사기』에서 『신라국기』 몇 곳을 인용하고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국기』를 지었다고 오류를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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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 온 신라국 볼모, 신라인 관리담당자, 조산대부, 위위시 소경 김영 묘지명

광문관 진사 조카 김양열 지음

 

당나라 정원(貞元, 德宗) 10년(794) 5월 1일 위위시(衛尉寺) 소경(少卿, 從四品上)을 지냈고 신라국의 당나라 볼모이며 당나라 거류 신라인 관리담당자(蕃長) 김영(金泳)께서 경조부 서쪽 지역 장안현 태평리(京兆府 長安縣 太平里)에 있는 관저(衛尉寺 관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홍려시(鴻臚寺)에서 사망을 보고하자 황제(덕종 황제)께서 애도하시고 특별한 대우를 내리시고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도독등주제군사(都督登州諸軍事), 등주자사(登州刺史) 관직을 추증하시고 부의금으로 비단을 내리셨고 장례 날에는 관청에서 차량(車轝), 만막(縵幕), 작업 일꾼(手力, 100人)을 보내주라고 시키시고 관곽(棺槨)과 묘지 등(明器 70-90事)을 내려주시고 제사 지내라고 조서를 내리셨다. 아울러 장안현(長安縣) 현령이 장례를 전담하도록 지시하셨다. 그해 8월 14일에 경조부 남쪽 장안현 영수향 필원(畢原, 長安縣 永壽鄕 현재 東姜村) 공동묘역의 북쪽에 아버지와 숙부 묘지 아래에 묻었는데 당나라 국법에 정한 예의(禮儀)에 따랐다.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영(泳)이다. 선조는 본래 신라국의 돌아가신 국왕(신라 제33대 성덕왕, 재위 702-737)의 사촌 형님이며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713-741) 초기에 당나라에 들어와서 황실을 지키는 숙위(長從宿衛 723년 조직)에 근무하였고 당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正三品)를 제수받고 태상시(太常寺) 시경(寺卿, 正三品)을 임시로 맡았고 이름은 김의양(金義讓)이며 돌아가신 분(金泳)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숙위에 근무하시는 동안에 아들 3명을 궁궐에 근무시키셨고 큰아들은 당나라에서 중산대부(中散大夫, 正五品上)를 제수받고 광록시 소경(光祿寺 少卿, 從四品上)을 맡았는데 돌아가신 분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계승자로서 볼모 신분을 이어받은 사람이 돌아가신 분이다.

 

당나라 대종 대력 3년(代宗 大曆, 768)에 황제께서 파견 명령을 내려 선위부사(宣慰副使)로서 신라에 귀국하는데 장사랑(將仕郎, 從九品下)을 내려주시고 한왕부(韓王府, 李迥, 생졸 750-796, 代宗 李豫의 일곱째 아들이며 貞懿皇后 獨孤氏 낳음, 762년에 延慶郡王에서 韓王으로 改封함)의 병조참군(兵曹參軍, 正七品上)을 맡겼다. 선위사 직무를 마치고 다시 당나라에 복귀하였고, 대종 황제는 큰 상을 내려 우대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 從五品下)를 제수하고 태자세마(대종 長子 李适, 764년 태자에 책립, 太子洗馬, 從五品下, 虛職)를 맡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지내고 슬픔이 예절보다 심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정원(貞元, 德宗) 원년(785)에 본국 국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제2차 弔祭冊立 사절) 조제(弔祭)와 책립(冊立) 부사(副使)로 파견하면서 위위시(衛尉寺) 소경(少卿, 從四品上, 實職)을 임명받아 2번째로 사행(使行)을 왕복하면서 항해(航海)의 고통을 감수하였다. 마지막에는 본국 국왕(元聖王)은 당나라에 김영(金泳)에게 번장(蕃長)을 겸직하도록 아뢰었는데 까닭은 김영이 신라의 풍속(風俗)이 신라인들의 당나라 거류지(海隅, 실제로는 登州 지역)에서도 널리 퍼지도록 하고 또 당나라의 예의(禮義)가 동국 신라국에서도 크게 일어나도록 힘썼기 때문이었다.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48살이다. 위위시 소경과 번장을 맡은 뒤부터 당나라와 신라 양국의 사명(使命)을 담당하였는데 보는 사람마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고 동학이나 동료 모두 현명하다고 칭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70살(壽, 70-79살)까지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부인은 태원(太原) 왕씨이며 경기도(京畿道, 당 현종 21년에 京畿道와 河南道를 설치함) 언사현(偃師縣) 현령(縣令) 왕천령(王千齡, 唐玄宗의 廢太子 李瑛의 딸 東陽郡主의 남편이며 자녀 1명을 두었고 군주가 죽은 뒤에 楊氏 부인을 다시 얻음)의 따님이다. 부인은 귀족(姬姜) 집안의 따님들처럼 현명하였고 신분은 직사관(職事官) 경감(卿監, 九寺五監, 위위시 소경)의 부인이며 정원(貞元, 德宗) 4년(789) 4월 14일 위위시(衛尉寺) 관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경조부 남쪽 언덕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아들 9명을 두었는데 계승자 큰아들 사소(士素)는 명경과(明經科)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둘째 아들 사홍(士弘)과 셋째 아들 사열(士烈) 모두 아버지 질병을 낫게 하려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딸 3명을 두었는데 큰딸은 시집가서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나머지 딸들은 모두 어리기 때문에 아버지 관곽을 붙잡고 피눈물을 흘렸다. 묘지명을 쓴 저(金良說)는 돌아가신 분의 조카이며 돌아가신 분의 공훈과 업적을 기록하고 남기신 선행을 기술하여 후손들에게 효도하는 교훈이 되길 바라며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돌에 새겨 알려드립니다 :

슬픕니다! 높은 관직(月卿, 衛尉寺 少卿)을 맡으신 분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신이(神異)한 영혼(異靈, 神仙)이 되셨습니다.

당나라에 와서 볼모가 되셨는데 이제 영혼은 저승(幽冥 : 金泳은 유학자이고 두 아들은 출가하여 불교 스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경조부 남쪽 언덕에 무덤을 만들고 돌을 깎아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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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新羅國故質子、蕃長、朝散大夫、試衛尉少卿、金君墓誌銘):

廣文館 進士 從侄良說撰

 

維唐貞元十年五月壹日,試衛尉少卿、質子、蕃長金君終於京兆府太平里之館第。鴻臚以奏,聖上宸悼,錫以優例,詔賜使持節、都督登州諸軍事、登州刺史,賻贈疋帛。及葬日,官給車轝、縵幕、手力,兼賜詔祭棺槨、墓地等,仍令長安縣令專知葬事者。以其年八月十四日,窆於城南畢原之北,府君、叔父之次,禮也。

君諱泳,其先祖即本新羅國故王堂兄,開元(唐玄宗,713-741)初以差入朝宿衛,於皇朝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諱義讓,則君之祖也。因宿衛而有三男留於闕下,其長子皇授中散大夫、可光祿少卿,則君之考也。以父之胤而襲其質者,則君也。

大歷三(唐代宗,768),恩命差爲宣慰副使還國,授將仕郎、試韓王府兵曹參軍。宣命畢而復歸,恩命優加重賞,授朝散大夫、試太子洗馬。丁太夫人憂,居喪三年,哀過於禮。服闋,以貞元元年本國王薨,又差爲弔祭冊立副使,拜試衛尉少卿,再奉於使往來,勒勞滄海。遂本國王特奏官兼蕃長者,風俗廣通於海隅,禮義大興於東國。

因遘疾而不□(起?),春秋卌有八。嗚呼!君自爲卿長以來,兩國使命,見者無不稱其德,朋友無不稱其賢。不壽而終,時人惜也。夫人太原王氏,東畿偃師縣令千齡之子也,賢比姬姜之淑女,貴則卿監之夫人,其貞元四年四月十四日逝於同館,權厝於城南之原。

有男九人:嗣者士素,應明經舉;次曰士弘;次曰士烈,尊君痼疾,願爲父出家。女子三人,長者已適事人。餘者悉幼,而乃抱棺泣血。良說忝爲從姪,故錄其功列,述茲遺行,冀宣孝訓,不飾其文。

銘曰:

哀哉月卿,化爲異靈。

舊質聖朝,魂寄幽冥。

卜地南崗,鎸石記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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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논문 :

 

1. 「陝西西安唐新羅質子金泳墓發掘簡報」,『考古與文物』,第六期,2022年6月,陝西省考古研究院。

2. 陜西省考古研究院,夏培朝、魏鋮,「首個考古發掘的新羅質子墓,揭示了什麼?」,2025年6月13日

3. 周斌,「唐人顧愔及其《新羅國記》考論」,『西華師範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16年第2期

 

4. 范恩實 (中國社會科學院),「『唐人顧愔及其「新羅國記」考論』評議」,제1회 한·중 인문학포럼 발표자료집 제1권,2015.10,수록면145-146(2page)

 

5. 陝西省考古研究院研究員,李明,「陝西「洪瀆原」考古再有新發現、出土文物跨逾二千年,續寫半部隋唐史」,『副刊』,2022-05-06

 

 

참고 자료 :

 

廣文館 進士︰

六學一館︰武德初,開設國子學、太學、四門學;貞觀初,先後增設書學、算學、律學;天寶九年(750)創建廣文館隸屬國子監,以進士科三場考試帖經、雜文、時務策爲課業,准下第鄉貢士人學焉。

 

『新唐書』,卷四十四,志第三十四︰

天寶九載(750),置廣文館於國學,以領生徒爲進士者。舉人舊重兩監(長安國子監洛陽國子監),後世祿者以京兆、同、華爲榮,而不入學。十二載,乃敕天下罷鄉貢,舉人不由國子及郡、縣學者,勿舉送。是歲,道舉停老子,加周易。十四載,復鄉貢。

 

『資治通鑑』,卷二一六,唐紀三十二︰

玄宗天寶九載(庚寅,公元七五O年),秋,七月,乙亥,置廣文館於國子監,以敎諸生習進士者。

 

金泳 使行 餞別詩︰

김영이 신라에 사행을 떠난 연도는 대력 3년(768)과 정원 원년(785)이다. 당나라 시인 장적(張籍)의 생졸연도가 대략 772-830년이며 799년에 韓愈(768-824)의 추천을 받아 진사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김영이 대력 3년(768)에 신라에 사행 갈 때 장적이 송별시를 썼다는 것은 옳지 않고 더구나 김영이 785년에 사행 갈 때에 장적이 겨우 열서넛 살이며 관원도 아니었기에 송별시를 써주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장적이 송별시를 써준 소경(少卿)은 김영이 아니고 다른 사람일 것이다.

 

唐、張籍(772?-830?),「送金少卿副使歸新羅」︰

雲島茫茫天畔微,向東萬里一帆飛。久為侍子承恩重,今佐使臣銜命歸。

過海便應將國信到家猶自著朝衣。從前此去人無數,光彩如君定是稀

 

朝鮮、成海應,『硏經齋全集』,外集,卷三十九,「三國觀風錄」︰

金少卿,大曆時,以副使還國。張籍送詩曰︰到家猶自著朝衣

 

衛尉寺 少卿︰

官名。北魏置,隋、唐、五代爲衛尉寺次官。協助衛尉卿掌供宮廷、祭祀、朝會之儀仗帷幕,通判本寺事務。隋初置一員,正四品上;煬帝加一員,從四品。唐代爲從四品上。高宗、武後時,皆隨本寺改稱司衛少卿,後復舊。

 

質子︰

質子的來源各異,在唐朝所享受的待遇也各有差異。外部質子的待遇優於內部質子。

 

蕃長︰

唐宋時廣州、揚州等地外商入口貿易,設蕃坊以供聚居其掌理公務者名曰蕃長”。

 

京兆府太平里︰

京兆府,唐朝開元元年(713)設置的府,這是府作爲行政區劃的開始。唐玄宗把長安所在的雍州改爲京兆府,京兆府的首長爲京兆尹。領萬年、長安、新豐、渭南、鄭、華陰、藍田、鄠、盩厔、始平、武功、上宜、醴泉、涇陽、雲陽、三原、宜君、同官、華原、富平、櫟陽、高陵二十二縣。

長安城內的朱雀大街將城市一分爲二,西邊是長安縣,東邊是萬年縣。這兩個縣的治所也都設在長安城內。此外,京兆尹也負責管理整個區域的事務。

 

鴻臚寺︰

唐代中央主管民族事務與外事接待活動及凶喪之儀的機關,政令仰承尚書省禮部。

神龍元年(公元705年)復稱鴻臚寺。設卿一人,從三品:少卿二人,從四品上。鴻臚卿掌賓客及凶儀之事,領典客、司儀二署,下設丞二人,從六品上;主簿一人,從七品上;錄事二人,從九品上。及府五人,史十一人,亭長四人,掌固六人,編制爲二百五十五人。

 

使持節︰

晉朝的持節都督權力區別:

(一)假節:平時沒有權利處置人,戰時可斬殺犯軍令的人。

(二)持節:平時可殺無官位之人,戰時可斬殺二千石以下官員。

(三)使持節:平時及戰時皆可斬殺二千石以下官員。

(四)假節鉞(或假黃鉞):可殺節將(含假節、持節、使持節)。

 

登州︰

唐初曾在文登置登州,不久廢除。如意元年(692年),於牟平(牟平區)復置登州。唐神龍三年(707),登州移治蓬萊,蓬萊升縣,省黃縣入之。

 

縵幕︰

唐、顏真卿,「崔孝公宅陋室銘記」:“﹝崔﹞薨於位,春秋六十有七。玄宗震悼,贈禮部尚書。葬日,量借手力、幔幙。”

唐、封演,『封氏聞見記、道祭』:“玄宗朝,海內殷贍,送葬者或當衢設祭,張施帷幙,有假花假果粉人面粻之屬。”

 

手力︰

『唐會要』,卷三十八,服紀下︰

大曆五年五月十五日,勅應准勅,供百官喪塟人夫、幔幕等︰三品已上,給夫一百人,四品五品五十人,六品已下三十人。應給夫須和雇,價直委中書門下同義處置。其幔幕,鴻臚、衛尉等供者,所須載幔幙張設人,並合本司自備。如特有處分,定人夫數,不在此限。

 

明器︰

『唐六典』,卷二十三,將作監︰

凡喪葬,則供其明器之屬(别敕葬者俱,餘並私備)︰三品以上九十事,五品以上六十事,九品以上四十事。當壙、當野、祖明、地軸、誕馬、偶人,其高各一尺。其餘音聲隊與僮僕之屬,威儀、服玩,各視生之品秩所有,以瓦木為之,其長率七寸。

 

金紫光祿大夫︰

文官,隋唐以後爲散官。唐代爲正三品。

 

太常寺 寺卿︰

唐制,太常寺卿一人,正三品。朝廷舉行大禮時由太常寺卿贊引。

 

中散大夫︰

唐、宋爲文散官,正五品上,爲文官第十階。

 

光祿寺 少卿︰

唐因之,從四品上。高宗、武則天時曾隨本寺改名司宰少卿,司膳少卿,尋各復舊。

唐朝時期,光祿少卿的品級爲從四品上,並曾隨本寺改名司宰少卿、司膳少卿,但不久又恢復原名。

 

唐朝韓王︰

李迥(750-796)是唐代宗李豫第七子貞懿皇後獨孤氏所生

出生後就封延慶郡王。因爲母親貞懿皇后的緣故,被父親寵愛,在唐代宗剛剛即位的寶應元年(762),李迥就改封韓王。大曆十年(775),與睦王李述、郴王李逾、忻王李造等皇子領節度使,李迥領汴、宋等節度觀察處置等大使。貞元十二年(796)七月初九,李迥去世,時年四十七。

 

歸崇敬(720-799)︰

『舊唐書』,卷一百四十九,歸崇敬傳第九十九︰

大歷初以新羅王卒授崇敬倉部郎中兼御史中丞賜紫金魚袋充弔祭冊立新羅使至海中流,波濤迅急,舟船壞漏,眾咸驚駭。舟人請以小艇載崇敬避禍,崇敬曰:“舟中凡數十百人,我何獨濟?”逡巡,波濤稍息,竟免爲害。故事使新羅者至海東多有所求或攜資帛而往貿易貨物規以爲利崇敬一皆絕之東夷稱重其德使還,授國子司業,兼集賢學士。與諸儒官同修《通志》,崇敬知《禮儀志》,眾稱允當。

 

『新唐書』,卷一百六十四,歸崇敬傳第八十九︰

大歷初授倉部郎中充弔祭冊立新羅使海道風濤,舟幾壞,眾驚,謀以單舸載而免,答曰:“今共舟數十百人,我何忍獨濟哉?”少選風息先是,使外國多賫金帛貿舉所無崇敬囊橐惟衾衣東夷傳其淸德還,授國子司業、兼集賢學士。

坐史給稟錢不實貶饒州司馬德宗立召還復拜國子司業稍遷翰林學士左散騎常侍充皇太子侍讀又兼晉王元帥參謀封餘姚郡公。田悅、李納稟命,持節宣慰,稱旨。表歸上冢,寵賜繒帛,儒生以爲榮。遷工部尙書,仍前職。年老,以兵部尙書致仕。年八十八贈尙書左僕射謚曰宣論撰數十篇。子登。

 

歸崇敬著有《歸崇敬集》二十卷。

顧愔,『新羅國記一卷,大曆中,歸崇敬使新羅,愔為從事。

 

唐、李商隐,「殘雪」︰

嶺霽嵐光坼,松暄翠粒新。

(顧愔,『新羅國記』︰松樹大連抱有五粒子形如桃仁而稍小皮硬浸酒療風『酉陽雜俎』︰松凡言兩粒、五粒,粒當言鬛,五粒松,皮不鱗。李賀有「五粒小松歌」。)

 

畢原︰

根據《史記》《括地誌》等文獻記載,畢原在漢唐時期仍作為長安城南的墓葬區,現存唐代墓誌實物佐證其地理範圍。地理特徵表現為渭河南北岸台原地貌,南北延伸數十里。

唐代該地仍為重要墓葬區,1980-2000年間在長安區出土的13件墓誌均明確記載葬於“萬年縣鴻固鄉畢原”或“長安縣永壽鄉畢原”。關於畢原具體位置存在兩派學說。

 

倉部郎中︰

唐以後均為戶部所屬四司之一,掌管全國倉儲出納之政令。

唐朝置為戶部倉部司長官,從五品上。高宗、玄宗時曾隨本司改名司庾大夫、司儲郎中,旋各復舊。開元(713—741)以後以他官為出納使,漸奪其權。

『新唐書、百官志』:“倉部郎中員外郎各一人,掌天下軍儲出納、租稅祿糧倉廩之事,以木契百合諸司出給之數,以義倉常平倉備凶年,平谷價。”

 

御史中丞︰

唐、五代、宋均大夫與中丞並置,唯大夫極少除授,仍以中丞為長官。

唐代的御史台的最高長官是御史大夫,御史中丞為其副手。其中御史大夫的主要職責是:對國家的法律實施負總責,“御史大夫之職,掌邦國刑憲、典章之政令”;履行司法職責,“凡天下之人有稱冤而無告者,與三司(指由御史大夫、中書令、門下省侍中組成的聯合辦案機構)詰之”;履行行政彈劾職責,“凡中外百僚之事應彈劾者,御史言於大夫,大事則方幅奏彈,小事則署名而已”;履行禮儀監督職責,“凡國有大禮,則乘輅車以為之導”。御史中丞,在會昌二年前基本上為正五品上,會昌二年後升為正四品下,作為御史大夫的助手,職責基本相同。

根據『唐會要』卷六十:“御史中丞為大夫(御史大夫)之貳。緣大夫(御史大夫)秩崇。官不常置。中丞為憲台之長。

 

紫金魚袋︰

唐、宋官銜常有此名,紫指紫衣;金魚袋,用以盛鯉魚狀金符。一般佩於腰右。

官服分別顏色,從唐代開始是:三品以上紫袍,佩金魚袋;五品以上緋(大紅)袍,佩銀魚袋;六品以下綠袍,無魚袋。官吏有職務高而品級低的,仍須按照原品服色。如任宰相而不到三品的,其官銜中必帶賜紫金魚袋;州的長官刺史,亦不拘品級都穿緋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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