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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권과 재상권의 경쟁 및 “왕과 사는 남자”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6.03.20|조회수42 목록 댓글 0

군주권과 재상권의 경쟁 및 왕과 사는 남자

2026320

 

 

 

하곡학연구원에서는 2025115일부터 지난 318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논어20편을 읽고 설명하였습니다. 현재 한국 민주사회 관점에서 공자와 논어에 반영된 지배층(제후와 경대부) 입장을 비판하고 이해하고, 특히 역사학 관점에서 춘추전국시기 역사적 추세를 이해하고 공자와 논어를 비판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기부터 모택동 문화대혁명까지도 공자 유가를 비판해왔는데 한국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비판에는 이것들도 참고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네 가지 영역에서 민주사회의 평등 가치를 확인하려는 뜻에서 논어읽고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주사회 회복에 도움이 되길 바라고 읽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일부 엘리트 계층이 알량한 학벌 권위를 내세워 이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민주정치를 흔들거나 또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적 신앙이나 미신을 내세워 신자들을 포섭하고 정치사회의 자원을 얻으려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엘리트 계층의 권위와 종교인들의 미신은 민주적 정치사회에 관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조선시기의 유학이나 성리학에 대하여 막연히 좋다고 여기거나 공자를 성인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경복궁과 문화재를 복원하여 조선시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선시기 양반사회의 폐해도 이해하고 극복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논어를 읽으면서 조선시기의 유학이나 성리학을 계승하거나 부흥시키려는 것도 틀렸고 또는 중국 유학을 한국에서 재현하려는 것도 틀렸습니다. 조선시기 성리학과 예의(禮儀)를 복원하다가 우연히 발생하는 중국화(漢化) 경향도 버려야 합니다.

 

조선시기 학자와 관원들은 정주학 관점이 지나치게 반영된 사서(四書)를 읽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북송시기 인종 연간에 범중암(范仲菴, 989-1052)의 신정(新政)을 비롯하여 신종 연간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의 취지와 실패를 연구하지 않았고 오로지 개혁을 반대하고 당쟁을 일으켰던 사마광과 소식 및 이정(二程) 등 구법당 학자들과 관원들의 주장조차 깊이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남송시기에도 지속된 당쟁에서 구법당 입장을 지지한 주희(朱熹, 1130-1200)가 이정(二程, 정명도, 정이천)과 이를 계승한 학자들의 주장을 모아 만든 정주학을 배웠습니다.

 

지난 318일 저녁에 논어20요왈편(堯曰篇)3(또는 2)을 읽고 마쳤습니다. 2016년에 견구금관한간(肩水金關漢簡)515책을 출판하고 최근 논의하고 있는 제()나라에서 유행하였던 논어제논어(齊論語)의 지도(知道) 단락 24()를 읽고 또 2015년 발견되어 2021년과 2022년에 연구 결과를 발표한 옷장 거울(衣鏡)에 실린 17() 소위 의경부(衣鏡賦) 또는 의경명(衣鏡銘)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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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동안에 김영우 선생님께서 요즘 뜨거운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생각을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영화는 대본을 쓴 작가가 있고 감독과 배우가 있고 관객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고 적절한 픽션도 더하여 관객을 끌어들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흥미로운 픽션도 중요하지만 역사 사건을 보는 가치판단도 중요합니다.

 

왕과 사는 사람영화에서 촌장 엄흥도는 자기 꾀에 속았습니다. 귀양살이 온 높은 관원을 모시면 동네가 잘 살 것이라는 엉뚱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유해진 배우는 패랭이를 버리고 단종이 쓴 갓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권력투쟁에서 져서 죽은 어린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고 고향을 떠나 이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충신 소리를 들었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단종을 모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가난하더라도 영월에서 그대로 살았겠지요.

 

 

1. 계유정난 군주권과 재상권의 권력투쟁 :

 

계유정난(14531010)을 어떻게 평가하여야 하는지 역사적 가치판단이 필요합니다. 작은아버지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도덕 윤리를 비롯하여 왕권 계승법에서 보면 정말로 나쁜 작은아버지이며 이를 도운 신하들도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백성이 평등하게 살도록 하겠다는 평민의 정치관점에서 보면 군주와 엘리트 계층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군주권과 재상권의 투쟁이라고 봅니다. 물론 백성은 이들의 안중에는 없었습니다.

 

조선 왕조는 지식인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고 행정에 참여하는 엘리트 양반 정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반 계층이 조선 전국의 토지와 각가지 생산력을 장악하였습니다. 물론 자영농 백성들도 많았으나 팔고 사는 노비 숫자도 많았습니다. 경작지 대부분은 양반 계층이 소유하고 일반 농민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생활이 곤궁하였습니다. 양민이 줄어들어 세금을 낼 사람도 군대에 나갈 사람도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일어나도 방어할 군대도 부족하였답니다. 그렇다고 노동을 하지 않는 양반 계층의 학술 연구 수준이 중국을 뛰어넘거나 문학 수준이 신라 시기는 물론이고 고려 시기도 따라가지도 못하였답니다.

 

조선시기에 양반들의 토지 소유와 노비 증식을 현재 관점에서 보면 할 말을 잃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를 자칭하며 인정(仁政)을 외치셨던 퇴계 이황 선생도 열심히 경영하여 여기저기 토지가 1천 마지기가 넘고 노비 숫자도 3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조선 말기에도 만석꾼이라는 부자가 많았는데 내 땅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를 정도였답니다. 만석꾼들의 조상님은 누구였습니까? 득세한 권문세가이었습니다.

 

이러한 악습이 지금도 내려와서 부모는 지식이 무조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고 전관예우를 받아 막대한 재산을 증식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활이 얼마나 가난한지는 모르는 척하고 혼자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한명회가 아무리 세조를 위하여 많은 관원을 죽이고 간신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썼더라도 삼정승이라는 재상 권력을 없애서 조선 사회를 평민사회로 만드는 데는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양반 계층의 권력투쟁 곧 당쟁과 사화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준경(李浚慶, 1500-1572) 선생이 74(선조 5, 1572, 壬申年)에 올린 상소문에서도 당쟁을 없애자고 주장하였으나 별다른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율곡 선생은 이준경 선생을 소인이라고 폄하하고 비난하였답니다.

 

정도전 선생이 조선 초기에 왕조의 권력구조를 짜면서 국왕과 이를 견제하는 지식인 관료들의 연합구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 말기까지도 지식인 관료들을 대표하는 삼정승(宰相)은 국왕을 견제하기보다는 왕권을 억압하고 제한하였고 백성들의 민생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권력투쟁이 심하여 사화가 빈번하였고 쿠데타 때문에 왕들이 자주 바뀌어 종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직계를 잇는 종()보다는 남의 뒤를 잇는 위인후(爲人後)의 조()들도 많았습니다.

 

 

2. 중국역사 군주권 강화와 재상권 쇠퇴 :

 

한당(漢唐) 시기에는 재상(宰相) 제도가 있었는데 황제를 대신하여 행정관료를 통솔하고 때로는 관료층을 대변하며 황제권에 도전하였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재상 자리에 있으면 제도가 어떻든지 행정을 잘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이 재상 자리에 있으면 부패가 심하고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송대에는 재상 권한을 분할하여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관료들이 자기 뜻과 이익에 어긋나면 조정에 출근하지 않거나 집단으로 반대 상소를 올려 황제권에 도전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자신들은 올바른 군자(君子)이고 상대방 집단을 소인(小人)이라고 욕하며 몰아내고 당쟁을 일으켜서 황제권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몰락을 자초하였습니다. 북송시기와 남송시기에 당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몽고족 원나라 세조(世祖, 1215-1294, 재위 1260-1294)는 송대 당쟁의 뿌리를 뽑으려고 관료들의 권한을 억업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였습니다. 특히 세자 교육을 강화하여 나중에 황제 자리에 올라가서도 황제가 똑똑한 관료들에게 놀아나거나 휘둘리지 않도록 애썼습니다.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624)은 농민반란 출신이기에 농민 정권을 부르짖었으나 정권을 잡고 왕조를 세운 뒤에는 지주들의 이익을 보장하며 지주 정권으로 정권 성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주원장은 왕조의 영원한 집권을 위하여 첫째는 농민의 경제생활을 많이 향상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일부 관원들의 나태와 부패를 억압하고 척결하였습니다. 둘째는 왕조를 세우는 데 공헌한 공신(功臣) 집단을 죽여서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신들을 국방에서 제외하고 서서히 여러 아들에게 군사권을 주었습니다.

 

주원장이 정치제도에서 크게 개혁한 것은 호유용(胡惟庸, ?-138012) 사건을 핑계로 중서성을 폐지하여 재상 제도를 없애고 황제가 육부 상서들을 직접 관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황제가 육부 상서들을 상대하며 국가행정에 직접 관여하였습니다. 현재 대통령 제도와 닮았습니다.

 

주원장은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갖고 행사하려면 국가행정에 밝아야 하므로 황태자 교육에 치중하였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황제교육과 신하교육 둘로 나누었고 황제교육을 위하여 여러 보훈(寶訓)을 모아 가르쳤고 성리학은 신하교육에 해당합니다.

 

 

3. 명성조 정난(靖難)과 권력투쟁 :

 

명태조의 큰아들 주표(朱標, 1355-1392)가 죽자, 주표의 둘째 아들 주윤문(朱允炆, 1377-?, 재위 1398-1402)이 적장손이 되었다가 21살에 황제 자리에 올라 혜종(惠宗)이 되고 연호를 건문(建文)이라고 고쳤습니다. 주원장은 죽기 전에 황태손 주윤문을 불러들여 앞으로 처리해야할 정치 과제를 일러주었습니다. 주윤문이 작은아버지들의 군사권을 어떻게 회수할 것인지 대책을 묻고 반드시 회수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주윤문은 처음에는 덕()으로 권고하고 또 예()로 제어하고 안 되면 군사력을 동원하여 작은아버지들의 군사권을 직접 회수하고 갈아치우겠다.(以德懷之以禮制之不可則削其地又不可則變置其人)”고 회수 방침을 아뢰었습니다. 이것을 삭번(削藩)이라고 부릅니다.

 

권력투쟁에서는 작은아버지라도 자기 자식들의 이익을 위하여 군사권을 조카 황제에게 되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조카 황제가 군사력으로 빼앗겠다면 군사력으로 맞서 싸워서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의 감정입니다. 명태조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 1369-1424)의 부인(仁孝皇后, 공신 徐達의 장녀, 서달의 셋째 아들 徐增壽는 남경에서 명성조 반란에 호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되었음)가 적극적으로 시아버지 명태조와 장조카 건문제의 삭번을 반대하고 반란을 주도하였습니다.

 

따라서 명성조는 부인의 권고와 도움을 받아 북경의 군사력(燕王)을 동원하고 남경에 있는 조카 황제를 치려고 일어났습니다. 결국 남경이 함락된 뒤에 주윤문이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정난(靖難, 139986-1402713)이며 몇만 명을 죽였습니다.

 

명성조가 즉위한 뒤에 다시 형제들의 군사권을 회수하여 황제권을 강화한 뒤에는 북경으로 천도하여 황제가 변방 군사력을 직접 장악하였습니다.

 

명성조가 내세운 정난(靖難)의 뜻은 황제 주위의 나쁜 신하들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이때 건문제를 보좌하던 방효유(方孝孺, 1357-1402725)은 소위 금화(金華)지역의 정주학을 계승하였고 정전제를 주장하였습니다. 정전제는 국가가 지주들의 경작지를 빼앗아서 백성들에게 분배하겠다는 것입니다. 명나라 주원장 정권이 지주 정권으로 변질되었는데 지주 정권의 성격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정전제를 실행한다면 지주들의 반란이 일어나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명성조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명태조가 세운 지주 정권을 반대하는 간신들을 없앤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4. 유가와 성리학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폐해

 

유가를 비롯하여 성리학이 아무리 입으로 인정(仁政)을 외치더라도 가장 큰 해악은 정치사상에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구제(救濟)와 자비(慈悲)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자도 수제자 안연(顏淵)이 끼니가 떨어지고 가난하여 굶어죽어도 돕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자기 제자가 굶어죽어도 돕지 않는 선생이 바로 공자입니다. 맹자는 한술 더 떠서 묵자의 겸애(兼愛)를 비난하였고 자기 종친들의 이익에 힘쓰는 것(親親)이 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맹 유가는 별볼일 없다가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국가 공무원 시험에 채택된 뒤에는 동한시기와 삼국시기에 대토지 소유와 농장 경제를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자영농이 있었으나 사회경제의 주도세력은 농장을 운영하며 부귀를 쥔 문벌이었습니다.

 

중국 역대 관원들은 봉록이 아무리 많아도 죽어가는 백성들을 직접 구제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사례를 보면 명나라 왕양명(1472-1529)도 말년에 연봉 1천 가마 쌀을 해마다 받았는데 이 돈으로 큰 농장을 사서 여러 곳에 운영하고 사촌 동생들에게 운영을 맡기며 이익을 내라고 닥달하였고 배고픈 백성들을 구제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차라리 장사꾼 왕간(王艮, 1483-1541)은 쌀 1천 가마를 빌어 빈민을 구제하였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길가에서 구걸하거나 죽은 사람들을 묻어주고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길러주는 구제사업(자선사업)이 조금 나타났습니다.

 

임금은 자신과 종친 및 처가의 사치와 허영을 채우려고 백성에게서 징세와 노동력을 과도하게 징발하였습니다. 때로는 임금이 자신감의 확대(자아 팽창)를 위하여 전쟁을 벌이거나 토목공사를 일으켰습니다. 자아 팽창과 업적(功業)을 좋아한다는 뜻에서 호대희공(好大喜功)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농민들은 과도한 징세와 과도한 노동력과 군사력 징발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서 왕조를 뒤엎은 사례도 많았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군주의 행정을 돕는 행정관료들이 권력과 권위를 이용하여 대토지와 인민을 소유하며 사치와 부패를 일삼으며 문벌을 이루고 백성의 삶을 망가뜨린 범죄는 셀수없이 많았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관원이 된 뒤에는 국가 관료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고 이권 다툼에 뛰어들어 당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조선시기에는 양반 계층이 성리학 지식을 수단으로 써서 관원이 되고 다시 권력과 학식을 이용하여 대토지와 노비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결코 성리학을 배우고 연구하여 세상을 이롭게 만들지 못하였답니다. 더구나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연구하지 않아 줏대 없이 살았답니다.

 

현재 전국 명승지와 풍수가 좋은 곳에는 높은 관직이나 권력께나 가졌던 양반들의 묘지가 널려 있습니다. 물론 집안에는 영광이겠지만 대다수 국민과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조선 시기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평등한 민주시민 사회입니다.

 

앞으로 유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시더라도 비판하셔야 합니다. 또 영화를 보시더라도 비판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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