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52살(1523) 금학에 대한 태도와 향원 광자의 구별(鄕原狂者之辨)
2019년 4월 29일
* 『왕양명 연보』,52살(1523) 二月에 실린 아래 글은 전덕홍이 2월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전덕홍은 2월 치룬 과거시험에서 심학(心學)을 비판하라는 출제를 비롯하여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2월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속경남 선생은 정월이라고 고증하였습니다. 그러나 속경남 선생의 고증도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왕양명이 황관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여름이 되기 전에 학생들과 『孟子』 「鄉原狂狷」 一章을 논의하였다고 합니다. 2월 과거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소흥으로 내려온 뒤에 만나서 논의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덕홍이 적어놓은 2월도 아니고 속경남 선생이 고증한 정월도 아니며, 적어도 3월부터 5월까지 봄이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왕양명 학술에 대한 탄압은 가정황제가 1522년 10월 30일에 재가한 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합니다. 뒤이어 이듬해 2월에는 북경 정시(廷試)에서 심학(心學)을 비판하라는 시험문제가 출제되었고, 시험에 참가한 왕양명의 문인들 예를 들어 구양덕(歐陽德, 1496-1554)、왕신(王臣)、위양필(魏良弼, 1492-1575) 등은 왕양명에게 배운 대로 써서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서산(徐珊) 한 사람은 왕양명에게 배운 것을 배반하고 비난할 수 없기 때문에 시험장을 그냥 나왔다고 합니다. 왕양명은 서산이 과거시험장을 그냥 나온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왕양명의 학술이 강학과 출판이 금지된 뒤에 왕양명은 오히려 금학에 저항하려는 뜻에서 광자(狂者)의 마음(『전습록』:狂者的胸次)을 나타냈습니다. 금학 처분을 받은 뒤에는 왕양명 스스로 학술활동을 줄였고 찾아오는 학생들도 줄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입장과 태도를 가질 것인가 문제는 중요한 결정입니다. 사실상 왕양명과 학생들은 광자(狂者)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금학에 저항하였습니다. 왕양명 스스로 광자가 되었던 것은 41살 남경에서 강학할 때부터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각가지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지나친 변론도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광자가 되었습니다. 양명학에는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광자 정신(狂者胸次)이 있습니다. 물론 왕양명이 광자가 되겠다는 결심에 대하여 학생들은 왕양명 스스로 증자의 중행(中行)이 옳다고 말하도록 유도하였는데, 결국에는 왕양명의 광자 결심을 고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왕양명에게는 참으로 고맙고 좋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결정된 왕양명의 광자 마음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성격상 광자에 가까웠던 왕간(王艮)입니다. 다른 학생들은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국법에 저항하지 않고 얌전한 관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왕간이 왕양명 문하에서 지위와 발언권이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간은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적극적으로 양명학을 지키겠다고 나섰고 그 누구도 왕간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왕간의 연령이 다른 학생들보타 높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맥락을 이어받은 쪽이 바로 왕간의 태주학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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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연보』,52살(1523) 二月(錢德洪, 二月. 束景南, 正月):
추수익(鄒守益, 1491-1562, 1511년 진사)、설간(薛侃, 1486-1546, 1517년 진사)、황종명(黃宗明, ?-1536, 1514년 진사)、마영형(馬明衡, 1514년 진사)、왕간(王艮, 1483-1541, 포의) 등이 왕양명 선생님을 모시고 있는데, 중앙정부와 지방에서 왕양명을 비방하거나 비난하는 여론이 날로 뜨거워진 까닭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왕양명 선생이 말하길 “여러분들은 까닭을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길 “선생님의 위세와 지위(주신호 반란 진압)가 아주 높아졌기 때문에 질투심에서 비방하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길 “선생님의 학술이 날로 밝아지고 발전하여 송나라 주자학과 옳고 그름을 다투기(「주자만년정론」과 「대학고본서」) 때문에 학술관점에서 비방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길 “세상에는 선생님을 따라 배운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모두 긍정하여 받아들이시고 지난 잘못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개방적인 태도 때문에 王艮처럼 지나친 사람들조차 강학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자 경우처럼 학생들 내부의 비판입니다.) 선생님의 이렇게 개방적인 태도로 아무나 들이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계십니다.
왕양명 선생이 말하길 “세 가지 견해는 모두 사실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습니다.
왕양명 선생이 대답하길 “내가 41살 12월 8일 남경 태복시 소경(太僕寺 少卿)으로 승진하여 42살부터 남경에서 가르치기 이전에는 마음속에 아직 향원(鄕原) 같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오직 양지가 옳고 그른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으며 더 이상 숨기거나 변호하지 않아 광자(狂者)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의 행동이 나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고 비난하더라도 나는 오직 양지에 따라 행동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향원(鄉原)과 광자(狂者)를 구별(鄉原、狂者之辨)해달라고 여쭈었습니다.
왕양명 선생이 말하길 “향원(鄕原)은 충신(忠信, 벗에게 忠하고 信함)과 염결(廉潔, 청렴하고 정결함) 때문에 군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동시에 세상의 더러운 흐름에 따르기 때문에 소인들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비판하려고 하여도 비난할 거리가 없고 그를 비방하려고 하여도 비방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을 자세히 따져보면, 충신과 염결은 군자들에게 잘 보이려는 까닭이고, 세상의 더러운 흐름에 따르는 것은 소인들에게 잘 보이려는 까닭입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와는 요순임금의 도리를 함께 논의할 수 없습니다. 광자(狂者)는 마음속에서 옛날 성현을 숭모하며 세속의 모든 더러움들이 얽히더라도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봉황이 작은 새들을 멀리하고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조금만 바꾼다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잘못된 생각을 바꾸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처리가 엉성하지만, 잘못된 행동을 가려서 덮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려서 덮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그의 잘못을 고쳐줄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향원이 세상에 아첨한다고 판단하십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왕양명 선생님이 말하길 “향원이 광자(狂者)과 견자(狷者)의 태도를 비난한 것을 보면, 향원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광자(狂者)와 견자(狷者) 모두 세속과 화합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향원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다면, 이 세상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향원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모두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애쓰며, 자신들의 행동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습니다.(『論語、顏淵』: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 따라서 향원의 행동이 겉으로는 군자의 행동과 닮았다(似)고 말합니다. 하은주 삼대 이후에는 지식인들이 당시마다 유명한 명성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향원의 닮음(似)를 얻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충신과 염결을 따져보면 자신들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의심받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좋은 향원이 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성인의 도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세상에 쉽게 화합하지 못하는 광자와 견자의 성격은 공자도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께서 도를 전해주시면서 끝내 광자였던 금장(琴張)에게 전해주시지 않고 증자에게 전해주셨는데, 증자는 견자에 속하였기 때문이겠습니까?(『孟子、盡心下』:如琴張、曾晳、牧皮者,孔子之所謂狂矣。)”고 여쭈었습니다.
왕양명 선생이 말하길 “아닙니다. 금장은 광자의 성품을 갖고 있었고 공자에게 배웠더라도 끝내 광자로 남았습니다. 증자는 중행(中行)하는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성인의 도리를 깨달아 들어갔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왕양명 연보』,52살(1523) 二月(錢德洪, 二月. 束景南, 正月. 대체로 3-5월):
鄒守益、薛侃、黃宗明、馬明衡、王艮等侍,因言謗議日熾。
先生曰:“諸君且言其故。”
有言:“先生勢位隆盛,是以忌嫉謗。”有言:“先生學日明,爲宋儒爭異同,則以學術謗。”有言天下從遊者眾,與其進,不保其往,又以身謗。
先生曰:“三言者誠皆有之,特吾自知諸君論未及耳。”
請問。
曰:“吾自南京已前,尚有鄉原意思。在今只信良知真是真非處,更無掩藏回護,才做得狂者。使天下盡說我行不掩言,吾亦只依良知行。”
請問鄉原、狂者之辨。
曰:“鄉原以忠信廉潔見取於君子,以同流合汙無忤於小人,故非之無舉,刺之無刺。然究其心,乃知忠信廉潔所以媚君子也,同流合汙所以媚小人也。其心已破壞矣,故不可與人堯、舜之道。狂者志存古人,一切紛囂俗染,舉不足以累其心,真有鳳凰翔於千仞之意,一克念即聖人矣。惟不克念,故闊略事情,而行常不掩。惟其不掩,故心尚未壞而庶可與裁。”
曰:“鄉原何以斷其媚世?”
曰:“自其譏狂狷而知之。狂狷不與俗諧,而謂生斯世也,爲斯世也,善斯可矣,此鄉原志也。故其所爲,皆色取不疑,所以謂之‘似’。三代以下,士之取盛名於時者,不過得鄉原之似而已。然究其忠信廉潔,或未免致疑於妻子也。雖欲純乎鄉原,亦未易得,而況聖人之道乎?”
曰:“狂狷爲孔子所思,然至於傳道,終不及琴張輩而傳曾子,豈曾子亦狷者之流乎?”
先生曰:“不然。琴張輩狂者之稟也,雖有所得,終止於狂。曾子中行之稟也,故能悟入聖人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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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연보』,52살(1523) 二月
先生「與黃宗賢(黃綰)書」曰:
“近與尚謙(薛侃)、子莘(馬明衡)、宗明(黃宗明)講『孟子』「鄉原狂狷」一章,頗覺有所警發,相見時須更一論。四方朋友來去無定,中間不無切磋砥勵之益,但真有力量能擔荷得者,亦自少見。大抵近世學者無有必爲聖人之志,胸中有物,未得清脫耳。聞引接同志,孜孜不怠,甚善!但論議須謙虛簡明爲佳。若自處過任,而詞意重復,卻恐無益而有損。”
「與尚謙書」曰:
“謂自咎罪疾,只緣輕傲二字,足知用力懇切。但知輕傲處,便是良知,致此良知,除卻輕傲,便是格物。得致知二字,千古人品高下真偽,一齊覷破,毫發不容掩藏。前所論鄉原,可熟味也。二字(致知, 良知)在虔時,終日論此,同志中尚多未徹。近於「古本序」中改數語,頗發此意,然見者往往亦不能察。今寄一紙,幸更熟味。此乃千古聖學之秘,從前儒者多不善悟到,故其說入於支離外道而不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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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黃宗賢」(癸未, 1523):
南行想亦從心所欲,職守閑靜,益得專志於學,聞之殊慰!賤軀入夏來,山中感暑痢,歸臥兩月餘,變成痰咳。今雖稍平,然咳尚未已也。四方朋友來去無定,中間不無切磋砥礪之益,但真有力量能擔荷得,亦自少見。大抵近世學者,只是無有必爲聖人之志。近與尚謙(薛侃)、子莘(馬明衡)、誠甫(黃宗明)講『孟子』「鄉原狂狷」一章,頗覺有所省發,相見時試更一論如何?聞接引同志孜孜不怠,甚善甚善!但論議之際,必須謙虛簡明爲佳。若自處過任而詞意重復,卻恐無益有損。在高明斷無此。因見舊時友朋往往不免斯病,謾一言之。
「寄薛尚謙」(癸未, 1523):
承喻:“自咎罪疾,只緣輕傲二字累倒。”足知用力懇切。但知得輕傲處,便是良知;致此良知,除卻輕傲,便是格物。致知二字,是千古聖學之秘,向在虔時終日論此,同志中尚多有未徹。近於「古本序」中改數語,頗發此意,然見者往往亦不能察。今寄一紙,幸熟味!此是孔門正法眼藏,從前儒者多不曾悟到,故其說卒人於支離。仕鳴(楊鸞)過虔,常與細說,不審閑中曾論及否?諭及甘泉(湛若水)論仕德(楊鸞)處,殆一時意有所向而云,益亦未見其止之歎耳。仕德(楊驥)之學,未敢便以爲至,即其信道之篤,臨死不貳,眼前曾有幾人?所云“心心相持,如髡如鉗”,正恐同輩中亦未見有能如此者也。書來,謂仕鳴(楊鸞)、海崖大進此學,近得數友皆有根力,處久當能發揮。幸甚!聞之喜而不寐也。海崖爲誰氏,便中寄知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