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2년(1523)년 주자(朱子)의 무원현 후손(朱墅)을 오경박사 임명
2019년 4월 30일
* 명나라 정덕과 가정 연간에 복건성 건안현 이외에 무원현에서 살고 있는 주자 후손에게도 오경박사를 임명하고 주자 제사를 맡겼습니다. 관례는 공자 후손이 산동성 곡부와 절강성 구주부 서안(西安) 두 곳에 살고 있는데 모두 관직을 하사한 것을 참고하였습니다.
이런 현창사업은 당시에 여러 학자들과 관원들이 주자학의 위기를 느끼고 추진한 사업입니다. 따라서 주자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진헌장과 왕양명을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자 현창사업도 확대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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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世宗本紀』,卷17:
(嘉靖二年,1523,夏四月) 癸未,以宋朱熹裔孫墅爲五經博士。
가정 2년(1523) 여름 4월 계미일에 송나라 주희(朱熹, 1130-1200)의 후손 주서(朱墅)를 오경박사에 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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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世宗實錄』,卷二十五
(嘉靖二年,四月,癸未) 命宋儒朱熹裔孫墅爲翰林院五經博士,於婺源奉祀。初,禦史王完言:熹實徽之婺源人,其宗族、墳墓在建安,已置博士世祀。考其次子四世孫勳還居婺源,宜如衢州孔廟例,官其子孫嫡長者一人,以主祀事。禮部請下有司核實以聞,故有是命。
가정 2년(1523) 4월 계미일에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후손 주서(朱墅)를 한림원 오경박사에 임용하였고 남직례(南直隷) 휘주부(徽州府) 무원현(婺源縣)에서 주희 제사를 맡도록 시켰다. 마땅히 절강성 구주(衢州) 공자묘(孔子廟)의 관례에 따라 주희 자손 적장자 1인에게 관직을 주어 제사를 담당시켰다. 예부에서 담당 관원에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이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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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定四庫全書)『御定資治通鑑綱目』,三編,卷二十:
以宋儒朱熹裔孫墅為五經博士:
正德間,給事中戴銑、汪元錫、御史王完等,相繼言:“朱子,繼孔子者也。孔子之後,有曲阜、西安。朱子之後,亦有建安、婺源。今建安已置博士,其子孫在婺源者,宜如衢州孔廟例,官其嫡長一人,以奉祀。”詔:從之。至是,授墅翰林院五經博士。尋以西安學訓導席端言,令其世襲。
質實:
孔子之後,有西安。宋建炎中,衍聖公端友扈蹕南渡,因家衢州。高宗命以州學為家廟,賜田五頃以奉祭祀。五傳至洙,元至元間,命歸曲阜,襲封,洙讓爵曲阜之弟治。明孝宗十八年,衢州知府沈杰奏言:“衢州聖廟,自孔洙讓爵之後,衣冠禮儀,猥同氓庶。今訪得洙之六世孫彦繩,請授以官,俾主祀事,報可。正德元年,授彦繩翰林院五經博士,子孫世襲。時以在曲阜者為孔氏北宗,在西安者為南宗云。西安,唐縣,明為衢州府治。建安,三國吳析東侯官縣地置,明為建寧府治,今皆因之。朱墅,朱子十一世孫。汪元錫,休寧人。王完,遂寧人。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후손 주서(朱墅)를 오경박사에 임용하였다:
정덕 연간(1506-1521)에 급사중 대선(戴銑)과 왕원석(汪元錫) 및 어사 왕완(王完) 등이 연달아 상소문을 올려 “주자는 공자를 계승한 학자입니다. 공자의 후손이 산동성 곡부(曲阜)와 절강성 구주부(衢州府) 서안(西安) 두 곳에 있습니다. 주자의 후손도 복건성 건안현(建安縣)과 남직례 무원현(婺源縣) 두 곳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건안현에 살고 있는 주자의 후손에게는 박사에 임용하고 있는데, 무원현에 살고 있는 후손에게도 구주부(衢州府)에 있는 공자묘 관례에 따라 적장자 1인에게 관직을 주어 제사를 맡겨야합니다.”고 요청하였다. 정덕황제가 그렇게 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가정 2년(1523)에 와서 주서(朱墅)에게 한림원 오경박사를 주었다. 곧이어 구주부(衢州府) 서안(西安) 학교 훈도 석단(席端)은 공자의 후손에게 공자 제사를 세습시키자고 건의하였다.(『資治通鑑綱目』이 글의 앞뒤를 너무 짧게 잘랐기 때문에 문맥이 잘 맞지 않습니다.)
사실 확인:
공자 후손이 절강성 구주부(衢州府) 서안(西安)에도 살고 있었다. 송나라 건염(建炎, 1127-1130) 연간에 연성공(衍聖公) 공단우(孔端友)가 황제를 따라 양자강을 건너 피난하였고 절강성 구주(衢州)에 터를 잡고 살았다. 송나라 고종황제가 구주 주학(州學)을 가묘(家廟)로 삼도록 명령하였고 밭 5경(頃) 대략 33.35ha 곧 10만평을 내려주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5대를 지나 공수(孔洙)에 이르러 원나라 지원(至元, 1264-1294) 연간에 산동성 곡부로 돌아가서 봉작을 세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공수는 작위를 산동성 곡부에 살고 있는 아우 공치(孔治)에게 양보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명나라 효종 18년(1505) 절강성 구주(衢州) 지부 심걸(沈杰)이 상소문을 올려 “구주에 있는 공자묘는 공수가 작위를 양보한 뒤부터 의관과 예의 모두 일반백성처럼 비루합니다. 현재 공수의 6세손 공언승(孔彦繩)을 찾아냈는데 관직을 내려주어 공자 제사를 맡겨야합니다. 실행하라는 결재를 받았다. 정덕 원년(1506)에 공언승에게 한림원 오경박사를 내려주고 자손들이 세습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산동성 곡부에 살고 있는 공자 후손을 북종(北宗), 서안(西安)에 살고 있는 공자 후손을 남종(南宗)이라고 불렀다. 서안은 당나라 시기에는 현(縣)이었고 명나라 시기에는 구주부(衢州府) 소속이 되었다. 건안현(建安縣)은 삼국시기 오나라가 동후관현(東侯官縣)에 설치하였고 명나라 시기에는 건녕부(建寧府) 소속이 되었는데 현재(1720)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서(朱墅)는 주자의 11세 후손이다. 왕원석(汪元錫)은 휴녕현(休寧縣) 출신이고, 왕완(王完)은 수녕현(遂寧縣)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