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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50살에 담약수의 왕양명 격물 비판(答陽明王都憲論格物)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19.07.08|조회수362 목록 댓글 0




왕양명 50살에 담약수의 왕양명 격물 비판(答陽明王都憲論格物)

201978

 

 

* 왕양명은 47-50살에 강서성 감주에서 근무가 한가한 틈이 있으면 학생들과 열심히 토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의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맹자의 양지와 양능을 토론하면서 양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이전에는 격물을 많이 토론하였고 이후에는 양지를 들어 치지를 설명하였고, 50살에 소흥부에 돌아와서는 양지를 더욱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왕양명과 담약수 사이를 오간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만, 진광(陳洸, 1478-1534, 字世傑)이 중요한 소통역할을 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일찍이 격물을 주장하면서부터 담약수가 주장한 수처체인천리가 주자학처럼 외부 사물의 천리를 찾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0대 후반에 격물을 주장하면서도 양지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이 격물에 관하여 쓴 서신을 담약수에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담약수는 왕양명의 격물에 관하여 옳지 못한 점들을 비판하고 자신의 수처체인천리가 더 타당하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담약수는 서신에서 먼저 왕양명 격물에 관하여 네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동의하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지적한 내용은 (고본)대학의 순서를 해석하는 잘못을 비롯하여 의미 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담약수가 격물에 관하여 주장한 요점은 격물이 ()에 이른다.(至其理)”고 해석하고 타당한 이유를 다섯 가지 들었습니다. 또한 지행(知行)이 병진되어야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담약수는 일찍이 내세운 수처체인천리(隨處體認天理)를 고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담약수는 아직 왕양명의 양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왕양명은 양지가 선천적 양지이며 타고난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여 심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담약수가 왕양명의 격물을 비판한 글을 보면, 담약수는 정이천이 말한 ()에 이른다.(至其理)”에 근거하여 자신의 격물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뒤에 학자들은 담약수가 정주학과 양명학의 중간에 있는 과도기 학술을 주장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담약수의 격물 해석이나 왕양명 격물 비판 모두 담약수가 왕양명에 대한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왕양명이 50살 소흥부에 돌아온 뒤 양지를 강조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서적을 읽는 글공부를 하지 말라고 일렀다고 합니다. 왕양명이 글공부를 무시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담약수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 왕양명 격물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왕양명 54(1525)에 담약수는 광덕주 유학 존경각 기념사(廣德州儒學新建尊經閣記)에서도 왕양명이 글공부를 무시하였다는 점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  참고자료 : 하곡학연구원, 「왕양명 54살에 담약수의 광덕주 유학 존경각 기념사(廣德州儒學新建尊經閣記)」 2019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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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약수(湛若水1466-1560),「왕양명 격물에 보낸 답신(答陽明王都憲論格物)(1521왕양명 50),『泉翁大全集』,卷三

 

격물에 관하여 두 번이나 보내준 서신을 받고 저를 지극히 아낀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끝내 의문이 있는데, 의문을 품고도 따지지 않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따지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는다면 학술이 끝내 올바르게 귀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동학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왕사(王思1481-1524江西省 泰和縣人)왕양명과 변론하여 가장 올바른 결론을 찾아내는 것은 선생(담약수)의 책임입니다.’고 말하였고, 방헌부(方獻夫1485-1544字叔賢廣東省 南海縣人)선생이 왕양명과 변론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변론하면 당신은 동의한 것을 좋아하고 동의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여,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남의 비판을 무시할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남의 비판을 무시하면, 자신이 성인이라고 여기고 남의 말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양명 당신이 어찌 이렇겠습니까? 그래서 나 자신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고 감히 변론해보겠습니다.

 

대체로 당신의 격물 주장에 대하여 제가 네 가지를 동의하지 못합니다

첫째, 옛날부터 성현의 학술은 모두 천리(天理)가 요점이고 지행(知行)이 공부입니다. 대학에 관하여 당신은 격물의 격() 뜻이 바로잡는다는 정()이고, () 뜻이 발현된 생각(念頭)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단락에 있는 성의(誠意)’의 의()가 발현된 생각이고 정심(正心)’의 정()이 격()이 됩니다. 문맥의 뜻으로 보면, ‘격물성의정심둘과는 중복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첫째입니다.

 

둘째, 첫째 단락에서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에 있는 정(), (), (), ()의 뜻이 순서대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둘째 단락의 다음 구절에서 수신(修身) 관점에서 격물과 치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둘째입니다.

 

셋째, 당신의 격물 설명에서 생각을 바로잡는다.’고 설명하였는데, 생각이 바로잡혔는지 여부를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는 허무(虛無)를 근거로 삼기에, 금강경에서 감각기관이 상대하는 대상(聲香味觸法相分)이 없어진 뒤에야 청정심(淸淨心)이 생긴다.(金剛經』,第十品,「莊嚴淨土分」:不應住色生心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應無所住而生其心)’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제상(諸相)이 없어지고 모든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없어진 뒤에야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도 전국시기에는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여겼는데, 어찌 자신들이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옳다고 주장하였겠습니까? 이들은 배우고 묻는 학습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배우지도 못하였고 자신들조차 스스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들 스스로는 성인()이라고 말하였지만 결국에는 짐승(禽獸)의 생활형태로 떨어졌습니다.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 이윤(伊尹)을 맹자도 성인이라고 평가하였지만 지나치게 막히거나() 공손하지 않은 잘못으로 흘렀기 때문에 공자와는 달랐는데, 이들은 강학의 노력도 없고, 시종 일관된 논리의 실재도 없고, 지혜와 방편의 절묘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에 근거해보면 당신의 격물 설명도 다만 떠오른 생각을 바로잡으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셋째입니다.

 

가장 일찍이 학술을 논의한 자료들을 보면, 상서說命下에는 은나라 고종에게 부열(傅說)옛날 가르침을 배우면 얻을 것이 많습니다.(學於古訓乃有獲)’라고 말하였습니다. 상서周官에서 옛날 가르침을 배운 뒤에 관원이 된다.(學古入官)’고 말하였습니다. 상서대우모에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일러 말하길 순수하게 하여 완전히 순수하게 하여야한다.(惟精惟一)’고 말하였습니다. 안연은 공자의 가르침을 서술하여 말하길 널리 배우고 예()로 귀결시킨다.(博文約禮)’고 말하였습니다. 중용에서 공자는 노나라 애공에게 널리 배우고 따져서 묻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고 밝게 따져보고 믿음직스럽게 실행하십시오.(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라고 아뢰었습니다. 이 자료들의 결론은 지행을 병진시키고(知行竝進) 동등하게 서로 관철(同條共貫)시켰습니다. 당신의 주장처럼 다만 떠오른 생각들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공자는 다만 ()을 닦지 않는다.(德之不修)’고 말하면 될 것을 학술을 연구하지 않는다.(學之不講)’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한 말없이 이해한다.(默而識之)’고 말하면 될 것을 배우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學而不厭)’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한 옛날 가르침을 믿고 좋아한다.(信而好古)’고 말하면 될 것을 옛날 가르침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서 연구한다.(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자사(子思)중용에서 덕성(德性)을 존양한다.(尊德性)’고 말하면 될 것을 묻고 배우는 것을 설명한다.(道問學)’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공자가 연구하려던 것, 배우려던 것, 좋아하였던 것, 찾으려던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 가르침 고훈(古訓)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넷째입니다.

 

이와 같이 대학의 내용을 따져보아도 동의할 수 없고 또한 옛날 성인의 주장에 비교해보아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확실하게 자신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반드시 따르기를 바라며, 심지어 성인이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바꿀 수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는데, 어찌 당신의 밝은 이해력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반드시 무슨 장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대략 다섯 가지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격물을 ()에 이른다.(至其理)고 설명하는데, 처음에는 제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나중에 이정(二程) 서적을 찾아보니 저보다 먼저 똑같이 설명하였습니다.( 近思錄』,卷四,「存養」,60伊川先生曰致知在所養養知莫過於寡欲二字’”) 이것이 첫째 타당성입니다.

대학첫째 장절의 지선(至善)에 이른다.(止至善)’는 것을 따져보니 바로 이런 뜻입니다. 첫 단락에서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지행 병진(知行 竝進)을 말하는데, 지리(至理)와 공부(工夫)의 병진입니다. 이것이 둘째 타당성입니다.

(고본)대학의 둘째 장절에서 수신(修身) 관점에서 격물과 치지를 설명하는 것은 학자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셋째 타당성입니다.

대학에서 치지는 격물에 있다.’고 말하였고, 정이천은 치지는 길러야하는() 것이며 지()를 기르는 방법은 맹자(孟子盡心章』:養心莫善於寡欲)가 말하였던 과욕(寡欲)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과욕을 함양하는 것이 격물입니다. 이것은 (고본)대학이 수신 관점에서 격물의 뜻을 설명하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넷째 타당성입니다.

격물은 지()와 행() 둘을 포함하고 있는데, 옛날 성인들의 가르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용에서는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는 것()과 열심히 실행하는 것(篤行) 둘을 포함하였고, 상서대우모에서는 정()과 일() 둘을 포함하였습니다. 공자는 박()과 약() 둘을 포함하였기에 옛날 가르침을 배우고 좋아하고 믿었으며, 수덕(修德)과 강학 둘을 포함하였고, 묵식(黙識)과 학불염(學不厭) 둘을 포함하였고,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둘을 포함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종일관되게 말하였습니다. 맹자도 지언(知言)과 양기(養氣) 둘을 포함하여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옛날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이 지()와 행() 둘을 포함하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타당성입니다.

다섯 가지 타당성을 당신은 하나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당신의 밝은 이해력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반드시 무슨 장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격물을 ()에 이른다.(至其理)’고 설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에 이른다.(至其理)’는 말은 천리를 체인하는 것(體認天理)입니다. 천리를 체인한다는 말은 지행(知行)을 포함하고 내외(內外)를 통합하여 말한 것이며, 천리에는 내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광(陳洸, 1478-1534, 字世傑)이 저에게 서신을 보내 알려왔는데, 당신은 저의 수처체인천리 주장이 마음의 밖에서 천리를 찾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고 합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저의 주장은 맹자가 고자를 비난하였던 것처럼 의()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것(義外)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천리에 내외가 없듯이 찾는 것()도 내외가 없어야합니다.

 

제가 말하는 수처(隨處)대학의 마음(), 생각(), 자신(), 가족(), 국가(), 세상(天下) 모두를 대상으로 삼으며, 주역에서 말하듯이 마음이 대상들을 접촉하지 않았거나()과 접촉하였거나() 두 가지 경우를 모두 포함합니다. 정명도 정성서(定性書)에서 말하듯이 접촉하지 않았을 때는 하늘처럼 넓어 공평하고(廓然而大公), 접촉하였을 때는 외물을 접촉하더라도 순응하는데(物來而順應), ()과 감()의 때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내 마음의 중정(中正張載, 『正蒙中正篇』:不倚之謂中得其理而守之不爲物遷之謂正”) 본체를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본체는 실체이며 천리이며 지선(至善)이며 물()인데, 저의 주장이 마음 밖에서 천리를 찾는다고 비판하시는 것이 옳습니까?

 

치지(致知)는 이 실체, 천리, 지선, 물을 아는 것이고 바로 맹자의 말처럼 내가 타고난 양지와 양능이며 외부에서 얻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양지와 양능이 탁한 기()와 길들여진 습관()에 가려지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둔하고 성장하여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깨고 가려진 것을 걷어내서 양지와 양능을 깨우쳐 발현시켜줄 수 있는 옛날 가르침을 중용의 말대로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고 열심히 실행하여합니다(篤行). 양지와 양능은 외부에서 덧붙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적은 인위적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꿈을 꾸며 잠을 잘 때 다른 사람이 큰소리로 불러서 깨웁니다. 깨움은 잠자는 사람에게 외부에서 덧붙여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격물을 하면 외부에서 양지와 양능을 가져와서 덧붙이는 일이 없고, 대학에서 말하는 여러 과정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그냥 마음을 지키려고만 하고,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고 열심히 실행하는 과정(篤行)을 하지 않는다면 양지와 양능을 깨우쳐 발현시킬 수도 없습니다. 설사 깨우쳐 발현시킨 것이 올바른 것()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틀린 것()이며, 잘못되면 도교, 불교, 양주, 묵적이 될 것이고 잘되더라도 백이, 유하혜, 이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증참(曾參)이 오이밭 김을 매다가 잘못하여 오이 뿌리를 끊어놓아 말라죽자, 아버지가 큰 작대기로 등을 때려서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증참은 아버지를 피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작은 매질을 받지만, 큰 매질은 도망가서 피하여야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천리입니다. 똑같은 일이라도 증참은 아버지에 대한 효()만 생각하였고 공자는 하늘이 내려준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서로 판단이 아주 다른데도 강학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공자에게 무엇을 배웠냐고 따져묻자, 공자는 내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마음을 배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자가 지극한 성인이고 천리의 극치이고 인의(仁義)가 순수하였지만 70살에야 마음을 따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도 어리석습니다.

 

당신의 총명함은 일반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정도이며 얼마나 총명한지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도 젊어서는 힘써 배우려고 하였고 배우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의 명예가 높고 관직도 높아서 세상 지식인들이 당신을 보고 따르려고 합니다. 당신이 학술을 신중하게 하고 올바르게(中正)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학술을 신중하게 하길 재삼 바랍니다. 그래야만 유가의 학술이 발전하고 밝혀질 것입니다.

 

현재 당신의 주장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방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당신과 사귄지 17년 동안(1505-1521) 당신이 깊이 아껴주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고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충고하지 못한 죄인이 될 것이고 세상 후세 사람들이 나를 나무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분수를 모르고 물을 쏟듯이 모두 말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타당성이 있을 것이니 굽어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모두 틀리고 잘못되었다면 마땅히 비판하고 부정해주신다면 저도 앞으로 입을 다물겠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湛若水(1466-1560),「答陽明王都憲論格物(1521왕양명 50)

泉翁大全集』,卷三

 

兩承手教格物之論足仞(명유학안』:)至愛然僕終有疑者疑而不辨之則不可欲辨之亦不可不辨之則此學終不一而朋友見責王宜學(王思1481-1524字宜學)則曰講求至當之歸先生責也方叔賢(方獻夫1485-1544字叔賢)則亦曰非先生辨之其誰也辨之則稍以兄喜同而惡異是己而忽人是己而忽人則己自聖而人言遠矣而陽明豈其然乎乃不自外而僭辨之

蓋兄之格物之說有不敢信者四自古聖賢之學皆以天理為頭腦以知行為工夫兄之訓格為正訓物為念頭之發則下文誠意之意即念頭之發也正心之正即格也於文義不亦重復矣乎其不可一也

又於上文知止能得為無承古本下節以修身說格致為無取其不可二也

兄之格物訓云正念頭也則念頭之正否亦未可據如釋老之虛無則曰應無所住而生其心無諸相無根塵亦自以為正矣墨之時皆以為聖矣豈自以為不正而安之?以其無學問之功而不知其所謂正者乃邪而不自知也其所自謂聖乃流於禽獸也伊尹孟子亦以為聖矣而流於隘與不恭而異於孔子者以其無講學之功無始終條理之實無智巧之妙也則吾兄之訓徒正念頭其不可三也

論學之最始者則說命曰學於古訓乃有獲周書則曰學古入官舜命禹則曰惟精惟一顏子述孔子之教則曰博文約禮孔子告哀公則曰篤行其歸於知行並進同條共貫者也若如兄之說徒正念頭則孔子止曰德之不修可矣而又曰學之不講何耶止曰默而識之可矣而又曰學而不厭何耶又曰信而好古‘(好古)敏求何耶子思止曰尊德性可矣而又曰道問學者何耶所講所學所好所求者何耶其不可四也

考之本章既如此稽之往聖又如彼吾兄確然自信而欲人以必從且謂聖人復起不能易者豈兄之明有不及此蓋必有蔽之者耳

若僕之鄙說似有可採者五

訓格物為至其理始雖自得然稽之程子之書為先得同然一也考之章首止至善即此也上文知止能得知行並進至理工夫二也考之古本下文以修身申格致為於學者極有力三也。『大學致知在格物程子則曰致知在所養養知在寡欲以涵養寡欲訓格物正合古本以修身申格物之旨為無疑四也以格物兼知行其於自古聖訓篤行也精一也博約也學古好古信古也修德講學也默識學不厭也尊德性道問學也始終條理也知言養氣也千聖千賢之教為不謬五也五者可信而吾兄一不省焉豈兄之明有不及此蓋必有蔽之者耳

僕之所以訓格(格物)至其理也至其理云者體認天理也體認天理云者兼知行合內外言之也天理無內外也陳世傑(陳洸, 1478-1534, 字世傑)書報吾兄疑僕隨處體認天理之說為求於外若然不幾於義外之說乎求即無內外吾之所謂隨處云者隨心隨意隨身隨家隨國隨天下蓋隨其所寂所感時耳一耳寂則廓然太公感則物來順應所寂所感不同而皆不離於吾心中正之本體本體即實體也天理也至善也物也而謂求之外可乎

致知云者蓋知此實體也天理也至善也物也乃吾之良知良能也不假外求也但人為氣習所蔽故生而蒙長而不學則愚故學篤行諸訓所以破其愚去其蔽警發其良知良能者耳非有加也故無所用其絲毫人力也如人之夢寐人能喚之惺耳非有外與之惺也故格物則無事矣,『大學之事畢矣徒守其心而無學篤行之功則恐無所警發雖似正實邪下則為老上則為夷伊尹是也何者昔曾參蕓瓜誤斷其根父建大杖擊之死而復蘇曾子以為無所逃於父為正矣孔子乃曰小杖受大杖逃乃天理矣一事出入之間天人判焉其可不講學乎詰之者則曰孔子又何所學心焉耳殊不知孔子至聖也天理之極致也仁熟義精也然必七十乃從心所欲不逾矩人不學則老死於愚耳矣

若兄之聰明非人所及固不敢測然孔子亦嘗以學自力以不學自憂矣今吾兄望高位崇其天下之士所望風而從者也故術不可不慎教不可不中正兄其圖之兄其圖之則斯道可興此學可明矣若兄今日之教僕非不知也僕乃嘗迷(,『명유학안』:)方之人也且僕獲交於兄十有七年受愛於兄亦可謂深矣嘗愧有懷而不盡口將為老兄之罪人天下後世之歸咎乃不自揣其分傾倒言之若稍有可採乞一俯察若其謬妄宜擯斥之吾今可默矣

謹啟

 

 

 

참고자료

 

(古本)大學』: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知止而後有定定而後能靜靜而後能安安而後能慮慮而後能得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修其身修其身正其心欲正其心者誠其意欲誠其意者致其知致知在格物物格而後知至知至而後意誠意誠而後心正心正而後身修身修而後家齊家齊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修身爲本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 格物至其理

朱子語類』,卷十五,「大學二」:

剡伯問格物致知格物是物物上窮其至理致知是吾心無所不知格物是零細說致知是全體說時舉

 

郭叔雲問爲學之初在乎格物物物有理第恐氣稟昏愚不能格至其理人個個有知不成都無知但不能推而致之耳格物理至徹底處又云致知格物只是一事非是今日格物明日又致知格物以理言也致知以心言也

 

 

* 王思(1481-1524)字宜學江西司吉安府泰和縣(今江西省泰和縣)明朝政治人物進士出身明朝吏部尚書王直曾孫

正德六年登進士翰林院編修正德九年因乾清宮火災而上疏請求明武宗重整吏政綱紀同年九月再次上疏進諫而被貶爲潮州三河驛丞當時王守仁在贛州講學王思跟從遊學王守仁討伐朱宸濠叛亂時檄令王思參贊軍務

明世宗繼位後王思被召回恢復官職並充任經筵講官嘉靖三年因參與大禮議事件王思與群臣在左順門哭諫此後下詔獄行杖刑不久因病瘡發作去世隆慶初年追贈右諭德

 

 

* 方獻夫(1485-1544)明朝廣東廣州府南海縣人原籍莆田縣(今福建莆田市)根據乾隆廣東通志中的方獻夫傳記載方獻夫是遺腹子自幼勤苦力學不異寒暑天聰勝人弘治甲子魁於鄉乙丑20歲進士翰林庶吉士選榮歸同年第一次上京官吏部曆驗封文選諸司主事員外郎皆稱職發表關於皇位繼承的理論被認爲正確從進士學位的七品官提升爲五品官之職官至吏部尚書太子太保武英殿大學士被尊稱爲方閣老

 

 

* 陳洸(1478-1534)字世傑號東石民間稱爲陳國舅潮陽縣貴山都貴嶼(今貴嶼鎮華美社區)貴嶼陳氏十二世陳洸字世傑號東石先生民間稱陳北科明成化十四年(1478)出生於潮陽縣桂山都貴嶼明正德二年(1507)中舉人明正德六年(1511)中二甲進士授戶科給事中正德八年(1513)任吏科左給事中奉旨管理全國官員升降正德十一年(1516)奉旨按查湖廣地方官員嘉靖元年(1522)禦封紫閣名臣嘉靖三年(1524)任大理寺少卿嘉靖六年(1527)任黃門侍郎禦賜黃門第嘉靖十年(1531)因宦官專政辭官還鄉嘉靖十三年(1534)在家中抑鬱而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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