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55살 양지와 만물일체 결합 (聶豹 서신)
2019년 7월 17일
* 왕양명은 55살에 소흥부에 있었고 섭표(聶豹, 1487-1563)가 처음 찾아와서 열흘 정도 묵으면서 대화하였습니다. 섭표는 왕양명에게 양지를 굳게 믿는다고 자신의 학술입장을 밝혔습니다. 당시 섭표는 복건도(福建道) 감찰어사로서 응천부(應天府, 남경)의 마정(馬政)을 감찰하러 왔다가 소흥부 왕양명을 찾아왔습니다.
섭표가 1526년 소흥부를 떠나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왕양명에게 서신을 보내 왕양명을 가장 높이 추켜세웠습니다. 왕양명도 답신을 보내 섭표를 격려하였습니다. 답신을 보면 왕양명이 섭표와 만나서 양지와 만물일체 두 가지를 결합시켜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왕양명은 50살 전후에 왕간(王艮)이 찾아올 때마다 만물일체의 인(仁)을 토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왕양명은 양지와 친민(親民)을 결합시켜서 하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양지와 만물일체를 결합시키지는 않고 따로따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양명이 섭표에게 보낸 답서를 보면 양지와 친민의 결합을 넘어 양지와 만물일체를 결합시켜서 섭표의 감찰어사 임무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양지와 만물일체의 대인(大人) 관점에서 친민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섭표가 소흥부를 떠나 안휘성 육안주(六安州)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북경에서 내려오던 구양덕(歐陽德)을 만났고 왕양명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구양덕은 왕양명에게 서신을 보내 섭표를 만났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왕양명은 구양덕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섭표를 만났던 이야기와 섭표를 평가하는 평가도 전해주었습니다. 왕양명은 섭표가 열의가 대단하고 앞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양지를 깊이 체험하지 못하였고 평가하였습니다.
섭표는 소흥부 왕양명 집에 묵는 동안에 양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직접 정좌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왕양명도 섭표가 학생을 자처하지 않았고 높은 관원이었기 때문에 정좌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섭표는 왕양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서신을 보내 양지를 토론하였지만 학생을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왕양명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왕양명 영전에 향을 살라 올리고 절한 뒤부터 학생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의 문인이라고 합니다.
황종희, 『명유학안』은 섭표와 나홍선(羅洪先) 2명을 강우학파에 대표자로 보고 귀적(歸寂)을 주장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섭표와 나홍선을 연구하였습니다. 심지어 섭표의 귀적(歸寂)와 왕기(王畿)의 현성양지(現成良知)를 왕양명 문하를 대표하는 학술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섭표가 왕양명의 정좌공부를 직접 지도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홍선조차 왕기에게 인증을 받았으나 정좌공부 지도를 많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강우학파가 주장한 귀적이 어느 정도는 탁상공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왕양명은 55살에 북경 과거시험에 참가하였던 황홍강(黃宏綱), 장원충(張元沖), 전덕홍(錢德洪), 왕기(王畿) 등이 소흥부에 찾아왔습니다. 왕양명은 전덕홍과 왕기 2명에게 왕양명을 찾아오는 학생들을 먼저 가르쳐서 인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이때부터 전덕홍과 왕기가 왕양명 만년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 聶豹(1487-1563):
字文慰,號雙江。晚年號白水老農,東皋居士。江西省永豐縣(今江西省 永豐)人。明朝著名廉吏,正德十二年(1517)進士,授華亭縣令,升禦史,歷官蘇州、平陽知府、陝西副使、福建道監察禦吏、後又巡按福建、進兵部右侍郎、改左侍郎。嘉靖三十一年任兵部尚書,後加太子太保,賜祭九壇,入豫章理學祠、吉安鷺洲忠節和青原五賢之一。
聶豹爲王守仁心學正統傳人。認爲良知不是現成的,要通過“動靜無心,內外兩忘”的涵養功夫才能達到,主張主靜修養,主張致虛守靜的工夫論,還主張戒慎戒懼。嘉靖二十六年(1547),遭誣陷逮入錦衣獄。後冤案大白,被落職回家。嘉靖三十四年(1555),反對趙文華的上疏,違反了皇帝旨意,被罷職。著有的『雙江文集』十四卷、『困辨錄』均被列入『四庫全書』總目。作詩詞近300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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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答聶文蔚」:
春間遠勞迂途枉顧問證,惓惓此情,何可當也!已其二三同志,更處靜地,扳留旬日,少效其鄙見,以求切劘之益;而公期俗絆,勢有不能,別去極怏怏,如有所失。忽承箋惠,反復千餘言,讀之無甚浣慰。中間推許太過,蓋亦獎掖之盛心,而規礪真切,思欲納之於賢聖之域;又托諸崇一以致其勤勤懇懇之懷,此非深交篤愛,何以及是!知感知愧,且懼其無以堪之也。雖然,仆亦何敢不自鞭勉,而徒以感愧辭讓爲乎哉?其謂“思、孟、周、程無意相遭於千載之下,與其盡信於天下,不若真信於一人。道固自在,學亦自在,天下信之不爲多,一人信之不爲少者,斯固君子不見是而無悶之心,豈世之譾譾屑屑者知足以及之乎?”乃仆之情則有大不得已者存乎其間,而非以計人之信與不信也。
夫人者,天地之心。天地萬物,本吾一體者也,生民之困苦荼毒,孰非疾痛之切於吾身者乎?不知吾身之疾痛,無是非之心者也。是非之心,不慮而知,不學而能,所謂良知也。良知之在人心,無間於聖愚,天下古今之所同也。世之君子惟務致其良知,則自能公是非,同好惡,視人猶己,視國猶家,而以天地萬物爲一體,求天下無治,不可得矣。古之人所以能見善不啻若己出,見惡不啻若己入,視民之饑溺猶己之饑溺,而一夫不獲,若己推而納諸溝中者,非故爲是而以蘄天下之信己也,務致其良知,求自慊而已矣。堯、舜、三王之聖,言而民莫不信者,致其良知而言之也;行而民莫不說者,致其良知而行之也。是以其民熙熙皞皞,殺之不怨,利之不庸,施及蠻貊,而凡有血氣者莫不尊親,爲其良知之同也。鳴呼!聖人之治天下,何其簡且易哉!
後世良知之學不明,天下之人用其私智以相比軋,是以人各有心,而偏瑣僻陋之見,狡偽陰邪之術,至於不可勝說;外假仁義之名,而內以行其自私自利之實,詭辭以阿俗,矯行以幹譽,掩人之善而襲以爲己長,訐人之私而竊以爲己直,忿以相勝而猶謂之徇義,險以相傾而猶謂之疾惡,妒賢忌能而猶自以爲公是非,恣情縱欲而猶自以爲同好惡,相陵相賊,自其一家骨肉之親,已不能無爾我勝負之意,彼此藩籬之形,而況於天下之大,民物之眾,又何能一體而視之?則無怪於紛紛籍籍,而禍亂相尋於無窮矣!
仆誠賴天之靈,偶有見於良知之學,以爲必由此而後天下可得而治。是以每念斯民之陷溺,則爲戚然痛心,忘其身之不肖,而思以此救之,亦不自知其量者。天下之人見其若是,遂相與非笑而詆斥之,以爲是病狂喪心之人耳。嗚呼!是奚足恤哉?吾方疾痛之切體,而暇計人之非笑乎!人固有見其父子兄弟之墜溺於深淵者,呼號匐匍,裸跣顛頓,扳懸崖壁而下拯之。士之見者方相與揖讓談笑於其傍,以爲是棄其禮貌衣冠而呼號顛頓若此,是病狂喪心者也。故夫揖讓談笑於溺人之傍而不知救,此惟行路之人,無親戚骨肉之情者能之,然已謂之無惻隱之心,非人矣。若夫在父子兄弟之愛者,則固未有不痛心疾首,狂奔盡氣,匍匐而拯之。彼將陷溺之禍有不顧,而況於病狂喪心之譏乎?而又況於蘄人之信與不信乎?
嗚呼!今之人雖謂仆爲病狂喪心之人,亦無不可矣。天下之人心皆吾之心也,天下之人猶有病狂者矣,吾安得而非病狂乎?猶有喪心者矣,吾安得而非喪心乎?昔者孔子之在當時,有議其爲諂者,有譏其爲佞者,有毀其未賢,詆其爲不知禮,而侮之以爲東家丘者,有嫉而沮之者,有惡而欲殺之者;晨門、荷蕢之徒,皆當時之賢士,且曰“是知其不可而爲之者歟!鄙哉硜硜乎,莫己知也,斯已而已矣”。雖子路在升堂之列,尚不能無疑於其所見,不悅於其所欲往,而且以之爲迂,則當時之不信夫子者,豈特十之二三而已乎?然而夫子汲汲遑遑,若求亡子於道路,而不暇於暖席者,寧以蘄人之知我信我而已哉?蓋其天地萬物一體之仁疾痛追切,雖欲已之而自有所不容已,故其言曰:“吾非斯人之徒與而難與!欲潔其身而亂大倫,果哉,末之難矣!”嗚呼!此非誠以天地萬物爲一體者,孰能以知夫子之心乎?若其遁世無悶,樂天知命者,則固無人而不自得道,並行而不相悖也。仆之不肖,何敢以夫子之道爲己任?顧其心亦已稍知疾痛之在身,是以徬徨四顧,將求其有助於我者,相與講去其病耳。今誠得豪傑同志之士扶持匡翼,共明良知之學於天下,使天下之人皆知自致其良知,以相安相養,去其自私自利之蔽,一洗讒妒勝忿之習,以濟於大同,則仆之狂病,固將脫然以愈,而終免於喪心之患矣,豈不快哉!
嗟乎!今誠欲求豪傑同志之士於天下,非如吾文蔚者而誰望之乎?如吾文蔚才與志,誠足以援天下之溺者;今又既知其具之在我而無假於外求矣,循是而充,若決河注海,孰得而禦哉?文蔚所謂“一人信之不爲少”,其又能遜以委之何人乎?會稽素號山水之區,深林長穀,信步皆是,寒暑晦明,無時不宜,安居飽食,塵囂無擾,良朋四集,道義日新,優哉遊哉,天地之間寧復有樂於是者!孔子雲:“不怨天,不尤人,下學而上達。”仆與二三同志,方將請事斯語,奚暇外慕?獨其切膚之痛,乃有未能忿然者,輒復云云兩。
咳疾暑毒,書劄絕懶。盛使遠來,遲留經月,臨岐執筆,又不覺累紙。蓋於相知之深,雖已縷縷至此,殊覺有所未能盡也。
왕양명,「與歐陽崇一」(丙戌,1526):
正之(黃宏綱)諸友(張元沖,錢德洪,王畿)下第歸,備談在京相與之詳,近雖仕途紛擾中,而功力略無退轉,甚難甚難!得來書,自咎真切,論學數條,卓有定見,非獨無退轉,且大有所進矣。文蔚(聶豹)所疑,良不爲過。孟子謂“有諸己之謂信”,今吾未能有諸己,是未能自信也,宜乎文蔚之未能信我矣。乃勞崇一(歐陽德)逐一爲我解嘲,然又不敢盡謂崇一解嘲之言爲口給。但在區區,則亦未能一一盡如崇一之所解者,爲不能無愧耳!固不敢不勉力也!
文蔚(聶豹)天資甚厚,其平日學問工夫,未敢謂其盡是,然卻是樸實頭,有志學古者。比之近時徒尚口說,色取行違,而居之不疑者,相去遠矣。前者承渠過訪,惜以公務,不能久留,只就文義間草草一說,鄙心之所願致者,略未能少效,去後殊為怏怏。良知之說,近世朋友多有相講一二年,尚眩惑未定者,文蔚則開口便能相信,此其資質誠有度越於人,只是見得尚淺,未能洞徹到得如有所立卓爾,是以未免尚為書見舊聞所障。然其胸中渣累絕少,而又已識此頭腦,加之篤信好學如是,終不慮其不洞徹也。因咳嗽正作,兼以人事紛沓,不暇寫書,故遲孫倉官久候。
『傳習錄』,下:
洪(錢德洪)與黃正之(黃宏綱)、張叔謙(張元沖)、汝中(王畿),丙戌(1526)會試歸,爲先生道途中講學,有信有不信。先生曰:“你們拿一個聖人去與人講學,人見聖人來,都怕走了,如何講得行。須做得個愚夫愚婦,方可與人講學。”洪又言:“今日要見人品高下最易。”先生曰:“何以見之?”對曰:“先生譬如泰山在前,有不知仰者,須是無目人。”先生曰:“泰山不如平地大,平地有何可見?”先生一言剪裁,剖破終年爲外好高之病,在坐者莫不悚懼。
『王陽明年譜』,五年丙戌,先生五十五歲,在越。
德洪與王畿並舉南宮,俱不廷對,偕黃弘綱(1492-1561)、張元沖同舟歸越。先生喜,凡初及門者,必令引導,俟志定有入,方請見。每臨坐,默對焚香,無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