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은 정치인 장기판의 졸이었나?
2019년 8월 13일
* 왕양명의 정치적 역할에 관하여 명나라 말기에 기록된 소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소문은 당시 사람들이 왕양명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문을 너무 믿고 평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왕양명은 주신호 반란을 진압한 뒤 50살에 아버지 살고 계신 소흥부에 돌아왔습니다. 이때부터 왕양명을 높은 관직에 임용해야한다고 추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정덕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가정황제가 즉위한 뒤에는 특히 석서(席書)가 왕양명을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왕양명이 36살 귀주성 용장역에서 귀양살이할 때, 석서가 왕양명을 많이 도와주었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물론 왕양명 자신도 북경에 올라가면 병부 상서를 받거나 아니면 상서와 같은 관직을 받고 대학사에 임명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왕양명의 문인들 가운데 황관(黃綰)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북경에서 학술대회를 핑계로 로비하였습니다. 왕양명 본인도 성묘하러 간다고 핑계를 대고 고향 여요현에 가서 퇴직관료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석서가 1527년에 죽은 뒤에는 힘써 추천해줄 사람이 없어서 왕양명의 북경 관직 희망은 아예 사라졌습니다. 왕양명은 석서가 죽자 조문을 썼는데 여기에서 석서를 가장 고맙게 여겼고 북경 관직의 꿈도 접었습니다. 그런데 석사가 정치행정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무슨 까닭에 왕양명을 북경 관직에 추천하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비굉(費宏)의 왕양명 반대가 커다란 장애가 되었습니다. 주신호 반란 진압과정에서 병부 상서 왕경(王瓊)이 왕양명을 추천하였고 비굉(費宏)도 처음에는 왕양명을 도왔습니다. 비굉은 왕양명과 같은 고향 출신이며 왕양명의 아버지 왕화(王華)와도 교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한 뒤에 왕양명이 군공을 왕경에게 돌리자, 비굉이 왕양명을 질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질투한 까닭은 왕양명이 북경에 올라와서 병부 상서를 임명받는다면 당연히 대학사에 임명될 것입니다. 비굉과 왕양명 모두 절강성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동시에 임명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또한 비굉은 정덕황제와 가정황제 시기에 황실과 황제의 신임을 받아 예부 상서로서 대학사를 지냈고, 설사 퇴직하였을 때에도 황실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왕양명의 북경 등용을 막았습니다. 왕양명이 북경에 올라가서 상서를 맡지 못한 까닭은 바로 비굉의 반대였습니다. 결국에 왕양명은 병부 상서 왕경과 비굉 정치판의 졸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양명을 추천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가정황제가 즉위한 뒤에 일어난 대례의 사건에서 장총과 계악이 득세하였고 왕양명을 추천하였습니다. 물론 왕양명도 대례의에서 가정황제의 편을 들었던 석서를 비롯하여 장총과 계악을 지지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양명이 정치적 득실을 고려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장총과 계악이 왕양명을 장기판의 졸로 이용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계악이 주자학자 위교(魏校)를 북경에 불러들여 정책 초안을 잡도록 이용하였습니다. 장총이 결국 위교를 이직시켜 힘으로 계악을 눌렀습니다. 위교는 주자학자로서 진헌장과 왕양명의 심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심지어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위교가 왕양명을 배척하였던 태도에 계악이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악은 왕양명의 북경 등용을 막았습니다. 결국에는 주자학자 위교는 물론이고 왕양명도 당시 정치 실세였던 장총과 계악이 주도하는 장기판의 졸이 되었습니다.
왕양명은 55살(1526)에 당시 조정의 정치를 비판한 글을 남겼는데 바로 양일청(楊一淸)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양일청이 가정 5년(1526) 5월 이부 상서에 복직한다는 소문을 왕양명이 일찍이 듣고 서신을 보냈습니다. 양일청은 5월에 이부 상서가 되어 대학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가정 5년에 대학사는 비굉(費宏), 석보(石珤), 가영(賈詠)에 양일청이 더하여 4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상권을 발휘하는 수보(首輔)는 비굉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은 재상권이 비굉에게 있기 때문에 양일청이 단지 거수기 역할을 한다면, 나중에 정치실패의 책임을 비굉과 함께 책임지어야하므로 절대로 거수기 역할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일청이 거수기 역할을 하였고 왕양명을 적극 추천하지 못하였습니다. 양일청도 겉으로는 왕양명을 추천하였지만 속으로는 왕양명의 북경 등용을 경계하였습니다. 왕양명이 또다시 비굉과 양일청 정치판의 졸이 되었습니다.
왕양명은 학자로서 또는 군사행정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끝내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몇몇 정치인들 장기판의 졸이 되었습니다. 국가를 소유한 황제가 있고, 황제의 총애에 의지하여 권력을 갖는 정치실세들이 있고, 정치실세들 장기판에서 눈치 보면서 움직이는 관원들과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명나라시기에 학술이 발전하였더라도 학술이 정치를 능가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지위와 세력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명나라는 정치의 권력과 자본이 문화의 권력과 자본을 능가하는 전제군주의 국가체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행정개혁 관점에서 왕양명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석서를 비롯하여 장총과 계악 모두 유능한 행정능력과 강한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일반행정과 군사행정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구준(丘濬, 1421-1495)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였고 뒤에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의 일조편법 개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은 수양공부에 매진하여 실제의 행정능력을 기르는 학습과정이 없었고 다만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일반행정과 군사행정을 익혔습니다. 왕양명이 이렇게 얕은 경력을 갖고 과연 명나라의 국가행정을 개혁하는 데 협력하여 일조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왕양명 자신은 강한 권력욕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면서 상대방과 싸워 관철시키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적극적이고 강력한 권력욕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정치판의 권력세계에 들어가지 못하여 학술과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로서 찬양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왕양명을 찾아오는 학생들의 숫자도 왕양명이 북경 등용이 소문날 때마다 많았지만 희망이 미약할 때는 적었습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왕양명의 추천을 받아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또한 관직에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왕양명 문인들도 왕양명의 부침에 따라 왕양명을 존경하는 태도가 많이 달랐습니다.
-----------------------
沈德符,『萬曆野獲編』,卷七,「桂見山、霍渭崖」:
議禮初起,桂萼爲首,而張璁次之。既而張以敏練得上眷,先入相,桂遲二年始繼入,其信用俱不如張,意不能無望。時,魏莊渠(校)以講學負重名,久滯外僚,桂引入爲祭酒,每奏對俱托之屬草,上每稱善。張自覺弗如,偵知其故,乃徙魏太常,罷其經筵入直,桂始絀矣。始,王文成再起兩廣,實張、桂薦之。至是,魏與王爭名相軋,王位業已高,譽亦遠出其上,魏深恨忌之。桂因移怒於王,直至奪其世爵,且令董中峰(玘)於武廟實錄中,譏刺文成,縱兵劫掠,南昌爲之一空,皆懟筆也。
至於佐禮部時,舉成化三年例,令科道互相糾,最爲罔誕。蓋成化本無其事,特借以泄其私忿耳。
霍渭崖(韜)初以『明倫大典』,得拜禮部尚書,蓋上偏賞議禮功也,霍獨五疏抗辭不受。及永嘉(張璁,浙江 溫州府 永嘉縣人)爲陸粲所論,乃出疏代張辨,且力攻楊遂庵(楊一淸)。及四郊議起,又力攻夏貴溪,並及永嘉,以至鋃榼下詔獄。後雖復職,屢與夏爭訐,至數十疏終不能勝。及瀕死,尚以子不第,欲劾考官。蓋褊隘亦張、桂之亞云。
심덕부,『만력 야획편』,권7,「계악(桂萼)과 곽도(霍韜)의 행실」:
대례의(大禮議) 문제가 터졌을 때 계악(桂萼, ?~1531)이 가장 먼저 가정황제의 편을 들었고, 뒤를 이어 장총(張璁, 1475-1539)이 나서서 가정황제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장총은 민첩하고 노련하였기 때문에 가정황제의 사랑을 받아 먼저 가정 6년(1527) 10월에 예부상서로서 문연각(文淵閣) 대학사가 되어 내각(內閣)에 들어갔다. 계악은 2년 늦게 가정 8년(1529) 2월에야 이부상서로서 무영전(武英殿) 대학사가 되어 내각에 들어갔다. 가정황제는 장총을 더욱 신임하여 황제의 신임은 계악이 장총보다 못하였지만, 계악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 위교(魏校, 1483-1543)가 남경에서 주자학을 지지하고 진헌장(陳獻章, 1428-1500)과 왕양명(1472-1529)의 학술을 배척하는 강학활동에 참여하여 학계에서 명망이 높았지만 오랫동안 외직에 머물러 있었다. 계악이 위교를 북경으로 불러들이고 가정 8년(1529)에 국자감 좨주(祭酒)에 앉혔다. 계악은 가정황제에게 정책을 상주할 때마다 위교에게 초안을 잡아달라고 부탁하였고, 가정황제가 계악에게 상주문을 잘 지었다고 칭찬하였다. 장총은 자신의 상주문이 계악보다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까닭을 조사하여 위교가 초안을 잡아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장총은 위교를 국자감 좨주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태상경(太常卿)으로 이직시키고 가정황제 곁에서 숙직하면서 경연하는 직무도 해임시켰다. 이때부터 계악이 예전보다 못하였다. 왕양명(1472-1529)이 가정 6년(1527)에 관직에 다시 나와서 양광(兩廣) 총독을 맡아 사은(思恩)과 전주(田州)의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장총과 계악이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위교와 왕양명은 서로 명예를 경쟁하면서 갈등해왔다. 왕양명의 관직과 공훈이 높았고 명성도 위교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위교는 마음속 깊이 왕양명을 미워하고 질투하였다. 계악은 위교가 왕양명을 질투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아 왕양명을 미워하였다. 왕양명의 신건백 작위를 취소시켜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동기(董玘, 1487-1546)를 『무종실록』 편찬에 참여시켜서 왕양명을 풍자하고 왕양명이 주신호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공을 세우려고 군대를 풀어 노략질시켰기 때문에 강서성 남창을 모두 털었다고 기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모두 왕양명을 미워하는 질투에서 나온 곡필이다.
계악이 가정 6년(1527) 8월에 병부에 있으면서 예부 시랑 일을 담당하고 있을 때, 성화 3년(1467)의 칙례(則例)에 근거하여 육과(六科) 급사중(給事中)들과 도찰원 13도 감찰어사(都察院十三道監察禦史)들이 서로 규찰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가장 황당한 짓이다. 대체로 성화 연간에는 이런 칙례가 없고 다만 이렇게 허위 직례로 개인적인 분풀이를 한 것이다.(『萬曆野獲編』,補遺卷三,「科道互糾」에 기록한 沈德符의 견해에 따르면, 가정 6년 대계(大計)에서 병부 좌시랑 장총은 북경 과도관에게 규찰을 받았고, 예부 우시랑 계악은 남경 과도관에게 규찰을 받았는데 황제 명령으로 관직을 유지하였지만 마음에는 과도관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
곽도(霍韜, 1487-1540, 字渭先, 號兀崖)가 『명륜대전(明倫大典)』(大禮議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여 가정 7년에 편찬한 관방 서적)에 참여하였던 공로로 가정 18년에 예부 상서 관함을 갖고 첨사부(詹事府) 일을 맡도록 임명 받았는데, 대체로 가정황제가 대례의에서 자신을 편들었던 관원들의 공로에 보답한 것이다. 그러나 곽도 혼자 5번이나 상소문을 올려 사양하고 관직을 받지 않았다. 장총은 육찬(陸粲, 1494-1551)의 탄핵을 받자, 곽도가 상소문을 올려 장총을 변호하였고 육찬을 시킨 대학사 양일청(楊一清, 1454-1530)을 공격하였다. 장총이 사교의(四郊議)를 일으키자, 곽도는 하언(夏言, 1482-1548)을 공격하였고 나중에는 장총까지 공격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에 따라 쇠사슬에 묶여서 감옥에 갇혔다. 곽도는 뒤에 다시 복직하였으나 자주 하언과 쟁론하였고 수십 번이나 상소문을 올렸으나 끝내 하언을 이기지 못하였다. 죽을 때쯤에는 아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여 고시관을 탄핵하려고 시도하였다. 대체로 곽도가 억지를 부리며 편애하는 태도는 장총과 계악에 버금갔다고 한다.
참고자료:
桂萼(?~1531):
字子實,號見山,饒州府安仁縣(今江西省餘江縣錦江鎮)人。
張璁(1475-1539):
字秉用,號羅峰,後由明世宗賜名孚敬,字茂恭。浙江溫州府永嘉(今浙江省溫州市龍灣區)三都人。正德十六年(1521)七月一日,觀政進士張璁上疏表示異議。
魏校(1483-1543):
明代官員、學者,與李承勳、胡世寧、餘祐善,並稱南都四君子。嘉靖七年(1528)升太常寺少卿,轉大理寺。次年,以太常寺卿掌祭酒事,嘉靖九年(1530)七月致仕,嘉靖二十二年(1543)卒,年六十一,諡莊簡。
-----------------------
참고자료:
『明史』,卷110,『宰輔年表」;卷112,「七卿年表二」 참고:
謝遷(1449-1531):
弘治八年,二月詹事府少詹事兼侍讀學士入,十月服闋,至京,晉詹事。
正德元年,十月致仕。
嘉靖六年,二月召,少傅兼太子太傅、禮部尚書、武英殿大學士十月復入。
嘉靖七年,三月致仕。
費宏(1468-1535):
正德六年,(大學士五人:李東陽、楊廷和、劉忠、梁儲、費宏)
十二月,晉禮部尚書兼文淵閣大學士入。
七年,(大學士四人:李東陽、楊廷和、梁儲、費宏)
十月,晉太子太保武英殿大學士。
八年,(大學士三人:楊廷和、梁儲、費宏)
九年,(大學士四人:楊廷和、梁儲、費宏、靳貴)
五月,致仕。
十六年,四月召,十月入,加柱國少保。
嘉靖四年,六月加少師兼太子太師。
五年,七月晉華蓋殿大學士。
六年,二月致仕。
嘉靖十四年,七月召,八月入,十月卒。
席書(1461-1527):
嘉靖三年,三月召,八月任禮部尚書。
嘉靖四年,閏十二月加太子太保。
嘉靖五年,七月晉少保。
嘉靖六年,二月加武英殿大學士,三月卒。
嘉靖十年,正月以病乞歸。八月卒。
張璁(1475-1539):
嘉靖六年,十月禮部尚書兼文淵閣大學士入。
嘉靖八年,八月罷,夷月召還。
張孚敬,嘉靖十年,璁二月改名。七月致仕。十一月召,復任。
十一年,三月至京,晉太子太師、華蓋殿大學士,八月致仕。
十二年,正月召,復任。四月赴召,至京。
十三年,正月晉少師兼太子太保、吏部尚書、武英殿大學士
十四年,四月致仕。
桂萼(?~1531):
嘉靖六年,八月(兵部)以禮部侍郎署,九月任禮部尚書,十一月改吏部尚書。
七年,正月加太子太保,六月晉少保兼太子太傅。八年,二月入閣。
八年,二月少保兼太子太傅、吏部尚書、武英殿大學士入。八月革去散官及學士,以尚書致仕。九月復,少保兼太子太傅、吏部尚書、武英殿大學士仍致仕。十一月召,復任。
『明史』,卷110,『宰輔年表」:
| 姓名 | 上任時間 | 離任時間及事由 |
|
27 | 毛紀 | 嘉靖三年五月 | 嘉靖三年七月致仕 | 1524年 |
28 | 費宏 | 嘉靖三年七月 | 嘉靖六年二月致仕 | 1524年-1527年 |
29 | 楊一清 | 嘉靖六年二月 | 嘉靖八年九月致仕 | 1527年-1529年 |
30 | 張璁 | 嘉靖八年九月 | 嘉靖十年二月,易名張孚敬,七月致仕 | 1529年-1531年 |
31 | 翟鑾 | 嘉靖十年七月 | 嘉靖十年九月降 | 1531年 |
32 | 李時 | 嘉靖十年九月 | 嘉靖十年十一月降 | 1531年 |
33 | 張孚敬 | 嘉靖十年三月 | 嘉靖十一年八月致仕 | 1532年 |
34 | 李時 | 嘉靖十一年八月 | 嘉靖十二年四月降 | 1532年-1533年 |
35 | 張孚敬 | 嘉靖十二年四月 | 嘉靖十四年四月致仕 | 1533年-1535年 |
36 | 李時 | 嘉靖十四年四月 | 嘉靖十四年八月降 | 1535年 |
37 | 費宏 | 嘉靖十四年八月 | 嘉靖十四年十月卒 | 1535年 |
38 | 李時 | 嘉靖十四年四月 | 嘉靖十七年十二月卒 | 1535年-1538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