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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관심설(觀心說)과 제6식의 견분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19.08.21|조회수343 목록 댓글 0



주희,「관심설(觀心說)」과 제6식의 견분

2019817

 

 

* 주희(1130-1200)15살부터 23살까지 도겸(道謙)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불교 참선을 배웠기 때문에 도겸선사의 스승 종고(宗杲, 1089-1163)선사의 간화선(看話禪)을 잘 이해하였고, 심지어 19살에 과거시험 보러갈 때에도 종고선사의 어록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따라서 종고선사가 배척하였던 당시의 묵조선(黙照禪)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희는 아버지의 벗이었던 유자휘(劉子翬, 1101-1147)를 스승으로 모시고 유가의 정좌공부도 배웠습니다. 22살 봄에 시험에 합격하여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에 임용되었을 때에는 당시 유명한 도사 허곡자(虛谷子) 유열(劉烈)을 만나 도가의 내단 수련공부를 배웠습니다.

 

주희는 24(1153) 5월에 북송 이정(二程)의 학술을 계승한 이동(李侗, 1093-1163)을 찾아뵈었는데, 이동은 주희에게 불교와 도교의 공리(空理)를 버리고 유가의 실리(實理)를 공부하라고 일러주고 특히 이일분수(理一分殊)에서 이일보다는 분수를 더욱 공부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주희는 이때부터 불교와 도교에서 서서히 벗어나서 유학으로 귀의하였습니다.

 

주희가 39(1168)부터 張栻吳翌蔡元定林用中林允中王近思 등과 논어觀過知仁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이것을 정리하여 관과설(觀過說)을 지었습니다. 주희는 이 글을 지어 소위 호굉(胡宏, 1102-1161) 학술을 계승한 호상(湖湘)학자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과 마음()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나름대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서신을 주고 받은 학자들은 대체로 呂祖儉(字子約)石墪(字子重)方士繇(字伯謨)吳翌(字晦叔)游九言(字誠之)何鎬(字叔京) 등이 있었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호굉(胡宏, 1102-1161)의 심학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관하여 주희와는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들은 마음에는 지각(知覺)하는 마음과 본체의 마음 둘이 깊고 얕은 계층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들과 달리 주희는 마음에는 계층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주희가 이들과 토론한 뒤에 얻은 결론을 정리하여 45(1174)관심설(觀心說)을 지었습니다. 이 글도 호상(湖湘)학자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왕양명은 지각과 양지 둘이 계층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주자의 일심(一心)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왕양명의 양지를 이해하는 데, 왕양명이 비판하였던 주희의 일심론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주희의 진심설(盡心說)관심설(觀心說)을 개괄하여 설명합니다.


주자 일심(一心)의 핵심은 실제로는 견분(見分)과 상분(相分) 2분론을 주장하는 것이며 견분을 검증하는 자증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견분은 제6식의 사량(思量)을 강조하며 제8식의 미세한 사량을 말하지 않습니다. 호상학파와 왕양명 모두 3분론(자증분, 견분, 상분)을 암시하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불교 유식학에서는 4분론(증자증분, 자증분, 견분, 상분)을 주장하며 참선하는 수양공부에 필요한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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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관심설(觀心說)」:

 

어떤 사람이 불교는 관심(觀心)을 주장하는데, 옳습니까? 그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희) 대답하길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주인공이다. 마음()은 하나이고 둘로 나뉠 수 없고, 주인공이고 손님이 아니고, 사물을 주재하며 사물에게 주재 당하지 않는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사물을 관찰하면 사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마음()과 사물() 이외에 어떤 것()이 따로 있는데 이것이 거꾸로 마음()을 관찰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음() 밖에 따로 있는 마음()이 마음을 관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불교는 마음()이 하나인가? 둘인가? 주인공인가? 손님인가? 사물을 주재하는가? 사물에 주재 받는가? 이런 주장은 따져볼 필요도 없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관점에서는 옛날 성현들이 말한 상서대우모정일(精一)’, 공자의 조존(操存)’, 맹자의 진심지성존심양성(盡心知性存心養性)’, 공자의 충신독경(忠信篤敬)’ 등을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주희) 대답하길 이 말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마치 곡식의 싹과 강아지풀의 싹이 다르고 정색의 붉은색과 간색의 보라색이 다르니까, 학자들이 반드시 구분하여 이해해야합니다.

 

첫째, 상서대우모에서 인심의 위험하다.”는 말은 인욕이 싹튼 것입니다. “도심이 희미하다.”는 말은 천리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이며 다만 올바르냐 또는 올바르지 않냐에 따라 도심과 인심이라고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입니다. “순정하게 하여 순일하도록 한다.(惟精惟一)”는 말은 올바른 것에 근거하여 어긋난 것들을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것들을 골라내서 같은 것들을 모아놓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중()을 굳게 유지하기 때문에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심과 인심이 따로 있고, 3의 마음()이 순정하게 하여 순일하도록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공자가 쥐고 있으면 있다.(操而存)”는 말은 마음()으로 마음()을 쥐고 있으면 마음()가 유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놓으면 없어진다.(舍而亡)”는 말은 마음()으로 마음()을 놓으면 마음()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이 스스로 어떤 대상을 생각하고 있으면 잊었던 대상이 떠오른다는 것이고, 마음이 스스로 어떤 대상을 잊고 있으면 떠오르던 대상도 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쥐고 있다는 말뜻은 밤낮에 행동하면서 인의(仁義)의 양심을 억누르거나 잃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 똑바로 앉아서, 밝지만 작용하지 않고 있는 지각(知覺)을 지키고 있는 것을 쥐고 있으면 있다.(操存)”는 말이 아닙니다.

 

셋째, 맹자가 마음을 다한다.(盡心)”고 말한 것은 사물을 상대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모든 사물의 이치를 통합하면서, 마음에 있는 이치()를 끝까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存心)”고 말한 것은 주역계사군자는 공경하여 속마음을 바르게 하고, ()롭게 하여 밖의 행동을 바로잡는다.(君子敬以直內義以方外)”는 것이며, 앞에서 말한 정일(精一)”조존(操存)”의 말뜻과 같습니다. 그래서 맹자의 진심(盡心)하는 경지에 오르면 본성과 천명을 깨닫는다.”는 말은, 본심이 가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본성과 천명에 있는 이()의 자연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찌 마음이 마음을 다하거나, 마음이 마음을 유지시켜서 마치 둘이 서로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넷째, 서있을 때는 충신(忠信)과 독경(篤敬) 두 글귀가 앞에 걸려있는 것처럼 여기고 수레에 탔을 때는 손잡이 막대기에 충신과 독경 두 글귀가 걸려있는 것처럼 여긴다는 말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 때문에 공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설명하자면 충신과 독경을 마음속에서 잊지 않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두 글귀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며, 충신과 독경 둘이 마음을 관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은 서있는데 마음은 앞쪽에 놓는 것이나, 몸은 수레에 있는데 마음은 손잡이 막대기에 걸어놓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과연 어떻게 옳은 도리입니까?

 

대체로 성인의 학문은 본심을 갖고 이치를 연구하고 이치에 따라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며, 마치 몸이 팔을 사용하고 팔이 손가락을 사용하듯이 합니다. 방법은 널리 통용되고 입장도 널리 안정되며, 이치가 실제적이고 행동이 자연스럽습니다.

 

불교의 학문은 마음()이 마음을 찾고, 마음이 마음을 부리는데, 마치 입으로 입을 물거나, 눈으로 눈을 보는 것처럼 모순되며, 방법이 위험하고 긴박하고 과정도 험하고 막히며, 이치가 허망하고 흐름도 역행합니다. 대체로 불교의 주장이 유가와 비슷하더라도 실제내용이 이와 같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판단력이 깊고 섬세하게 분별하지 못하는 지식인이 아니면 누구인들 불교에 현혹되지 않겠습니까?

 

 

朱熹,「觀心說」:

或問佛者有觀心之說然乎?”

夫心者人之所以主乎身者也一而不二者為主而不為客者命物而不命於物者以心觀物則物之理得今復有物以反觀乎心則是此心之外復有一心而能管乎此心然則所謂心者為一耶?為二耶?為主耶?為客耶?為命物者耶?為命於物者耶?此亦不待校而審其言之謬矣

或者曰若子之言則聖賢所謂精一所謂操存所謂盡心知性存心養性所謂見其參於前而倚於衡皆何謂哉?

應之曰此言之相似而不同正苗莠朱紫之間而學者之所當辨者也

夫謂人心之危人欲之萌也道心之微天理之奧也心則一也以正不正而異其名耳惟精惟一則居其正而審其差者也絀其異而反其同者也能如是則信執其中而無過不及之偏矣非以道為一心人為一心而又有一心以精一之也

夫謂操而存非以彼操此而存之也舍而亡非以彼舍此而亡之也心而自操則亡者存舍而不操則存者亡耳然其操之也亦曰不使旦晝之所為得以枯亡其仁義之良心云爾非塊然兀坐以守其炯然不用之知覺而謂之操存

盡心云者則格物窮理廓然貫通而有以極夫心之所具之理也存心云者敬以直內義以方外若前所謂精一操存之道也盡其心而可以知性知天以其體之不蔽而有以究夫理之自然也存心而可以養性事天以其體之不失而有以順夫理之自然也是豈以心盡心以心存心如兩物之相持而不相舍哉?

參前倚衡之云者則為忠信篤敬而發也蓋曰忠信驚敬不忘乎心則無所適而不見其在是云爾亦非有以見夫心之謂也且身在此而心參於前身在輿而心倚於衡是果何理也耶?

大抵聖人之學本心以窮理而順理以應物如身使臂如臂使指其道夷而通其居廣而安其理實而行自然

釋氏之學以心求心以心使心如口齕口如目視目其機危而迫其途險而塞其理虛而其勢逆蓋其言雖有若相似者而其實之不同蓋如此也然非夫審思明辨之君子其亦孰能無惑於斯耶?

 

 

참고자료

精一:『尙書大禹謨』: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

 

操存:『孟子告子上』:孔子曰操則存舍則亡出入無時莫知其鄉惟心之謂與’”

 

盡心知性存心養性:『孟子盡心上』: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存其心養其性所以事天也夭壽不貳修身以俟之所以立命也

 

參前倚衡:『論語衛靈公』:子張問行子曰言忠信行篤敬雖蠻貊之邦行矣言不忠信行不篤敬雖州里行乎哉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也夫然後行子張 書諸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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