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묘지의 훼손과 보수 과정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0.01.13|조회수228 목록 댓글 0


왕양명 묘지의 훼손과 보수 과정

2020113

    

* 아래 글과 자료는 중국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서 번역한 것입니다. 

 


 

왕양명 묘지에 관한 기록

 

1、『왕양명 연보』:

“(1529) 11월 왕양명 선생을 홍계(洪溪)에 장례 지냈다.”

홍계는 소흥부에서 30리 떨어졌고 왕희지 난정(蘭亭)에서 5리 떨어진 곳이며 왕양명 선생이 생전에 골라놓은 곳이다.

 

王文成公全書年譜』:

十一月葬先生於洪溪

洪溪去越城三十里入蘭亭五里先生所親擇也

 

2、『소흥부지』:

“(왕양명 묘소) 난정산(蘭亭山)에 있다.”

소흥부 남쪽 20리 화가(花街)의 홍계(洪溪)에 있다.”

 

紹興府志』:

在蘭亭山

在府城南二十里花街洪溪

 

3청라라 건륭 원년(1736)에 편찬한 절강통지(浙江通志)238 陵墓 4에는

명나라 신건백 시호 문성 왕수인 묘지가 있고 소흥부지에는 화가 홍계에 있다고 한다.”

 

乾隆元年重修,『浙江通志』,卷二百三十八陵墓四紹興府山陰縣

新建伯諡文成王守仁墓,『紹興府志』:在花街洪溪

 

4건륭 57(1792) 편찬 소흥부지(紹興府志)73 기록

명나라 신건백, 시호 문성, 왕수인 묘가 있다. 옛날 절강통지에는 난정산에 있고 담약수가 묘지명을 지었다.’고 한다. 옛날 소흥부지에는 소흥부 남쪽 20리 떨어진 화가 홍계(花街 洪溪)에 있다. 왕수인과 부모 3개 묘소가 현지인이 점유하여 봉분이 거의 모두 깎였다. 강희 54(1715)에 지부 유경(俞卿)이 온힘을 다하여 빼앗긴 땅을 모두 찾아 왕씨 후손에게 돌려주고 대대로 지키도록 도와주었다. 강희 57(1718) 3월에 판결문을 보존하는 안건을 만들어두었다.”고 기록하였다.

 

(乾隆)紹興府志』,卷七十三

新建伯諡號文成王守仁墓浙江通志』:在蘭亭山湛若水撰墓志銘

舊志在府城南二十里花街洪溪文成與其父母三墓爲土人所占侵削殆盡

康熙五十四年(1715)知府俞卿毅力廓清盡歸所占者還之王氏俾世守之

五十七年(1718)三月立讞語存案

 

* 현재 실제조사에 따르면 난정산(蘭亭山)은 소흥시에서 20리 떨어졌고 홍계촌(洪溪村)은 소흥시 남쪽 횡계(橫溪)에 있는데 여기에는 왕양명 묘소가 없다. 따라서 왕양명 연보를 작성한 전덕홍의 기록과 지방지 기록 모두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다.

현재 조사에 따르면 화가촌(花街村) 동남쪽 1리 떨어진 선하산(鮮蝦山) 남쪽 언덕에 왕백부묘(王伯府墓)가 있는데 이것이 왕양명의 묘소이다. 선하산은 높이 50m이며 낮고 왕양명 묘지 좌향은 좌북조남(坐北朝南)으로 남향이다. 선하산에서 200보 떨어진 곳에 작은 냇물이 동쪽에서 흘러와서 왕희지 난정으로 흘러간다. 현재는 난정강(蘭亭江)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난정강에 돌로 만든 홍교(拱橋)가 있었고 홍교(洪橋)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규(朱珪)가 건륭 52(1713)에 보완한 왕양명 묘표(王陽明墓表)홍계 냇물이 졸졸 흐르고(洪溪淙淙)” 글귀를 보면 홍계(洪溪)은 마을 이름이나 지명이 아니고 난정강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항일투쟁시기 일본군의 왕양명 묘지 폭격


현지인들의 기억에 따르면, 일본군 비행기가 왕양명 묘지를 폭격하였고,

1937년 중화민국 주둔군이 왕양명 묘비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日軍飛機轟炸王陽明墓

重修王陽明先生墓碑記」:一九三七年當地駐軍軍官常撰文立碑此後漸次荒蕪

--------------------------------



문화대혁명시기에 왕영명 문묘와 사당 및 왕양명 소상(塑像) 파괴

 

왕양명 문묘(文廟)와 왕문성공 사당(文成公祠) 및 왕양명 소상 모두 문혁시기에 파괴되었다.”

王陽明文廟和王文成公祠兩組建築包括王陽明的塑像全部在文革中被平毀無遺

-----------------------------

 

 

1981년 절강일보(浙江日報) 신문이 소흥에서 발견한 왕양명 묘지(紹興發現王陽明墓)” 제목으로 뉴스를 보도하였다.

1981년 소흥 도자 공장(陶瓷廠)이 근처에서 도자기 굽는 흙을 파내던 중에 오랫동안 잊혀진 묘지를 발견하였고, 소흥현 전문가들이 현지조사를 벌여 왕양명 묘지라고 확인하였다.

 

“(1981)紹興陶瓷廠在附近挖瓷土才重新發現了這座湮沒已久的名人墓葬後經紹興縣考古人員實地查勘厘定方位確認墓址

 

 

1981년 절강일보(浙江日報) 신문

소흥에서 발견한 왕양명 묘지(紹興發現王陽明墓)”




소흥시 남쪽 20 여 리 떨어진 난정공사(蘭亭公社)의 화가(花街) 근처 선하산(鮮蝦山) 기슭에서 최근에 왕양명 묘지를 발견하였다. 묘지의 봉분은 그대로 있고 묘비는 깨졌고 일부는 남아있다.”

------------------------------

 

 

상산수지 통신1985년 제10기에 실린 절강성 사과원 부원장 魏橋 동지의 담화」:

 

象山修志通訊1985년 제10기에 실린 省社科院副院長魏橋同志的講話」:

왕양명 묘지가 새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널리 알림.

--------------------------

 

 

왕양명 묘지 보수 과정과 일본인 찬조금

 

1981년 왕양명 묘지 발견.

 

1987년 소흥시 정부는 왕양명 묘지 보수 위원회(王陽明墓修復委員會)’ 설립하고, 왕양명 묘소를 제1 소흥현 중점 문물 보호 단위(第一批 紹興縣 重點文物 保護單位)라고 발표하였다.

 

 

19889월 왕양명 묘지 전면 보수하여 19893월에 완공.

 

19889월 소흥현 지방정부가 인민폐 20만원을 내서 왕양명 묘지를 보수할 때, 일본인 학자 강전무언(岡田武彥) 교수가 일본 우호인사 281명이 모은 일본돈 300만엔(당시 인민폐 8만여 원)을 찬조하였다. 보수비용은 모두 합하여 인민폐 28만원이 들었다.

 

중국인 입장에서 왕양명 묘소 보수의 진상을 보명 아래와 같다. 일본인은 중국침략기간에 일본군 비행기로 폭격하여 파괴한 뒤에, 1988년 보수할 때 겨우 인민폐 8만여 원을 찬조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은 일본인의 찬조를 고마워하지 말아야한다.

진상을 모르는 몇몇 중국인들은 왕양명은 일본인이다.” “소흥 사람들이나 영파 사람들은 예전에는 모두 왕양명을 싫어하였고 현재 왕양명이 뜨니까 두 곳에서 서로 자기네 문화유산이라고 주장하는데, 정말로 두 곳 사람들은 창피하다. 차라리 왕양명은 일본인이고 왕양명 정신이 일본에 남아있다.”고 떠든다.

생각해봐라. 일본인들이 너희 집을 폭격하여 부순 뒤에 수리비의 28.57%를 보상하였다고, 너는 일본인에게 아주 감사해야하고 일본인처럼 행세해야하는가? 이런 주장이야말로 친일파(精日分子)의 생각이다. 언론자유는 언론 망언이 아니다. 중국인으로서 사실을 확인하고 진상을 알아야한다.

 

我查到了資料19889紹興縣動工修葺王陽明墓由日本岡田武彥教授發起281名日本友人集資300萬日元(合人民幣8萬餘元)贊助其餘大部分(20)紹興縣人民政府撥款大家看到沒有真相是日本人的飛機轟炸了王陽明墓然後又由紹興縣人民政府和日本友人聯合出資修繕的總花費人民幣28萬餘元其中我們的紹興縣政府出資20日本友人出資8這就是全部的真相

而某些人在(internet)網上信口雌黃顛倒是非對於日軍飛機轟炸王陽明墓只字未提對於紹興縣政府出資20萬修繕只字未提卻因爲日本友人僅僅出資8萬便說王陽明是日本人而且還說紹興人和寧波人以前都不要現在王陽明紅了兩地都搶著要真不要臉下流透頂所以陽明先生是日本人精神在日本那是不是日本人把你家轟炸了然後賠償你28.57%的錢讓你修繕你的房子是不是你就對日本主子感恩戴德以後就以日本人自居典型的精日分子思想言論自由不代表可以任意妄言可以顛倒是非做人要有良知何況你還是個中國人建議網警介入調查此人

-----------------------------

 

 

절강성 외사지(浙江省外事志)』:

 

198944-7國際王陽明學研討會在紹興餘姚兩地舉行3個國家和地區的外方54中方65人出席會議會議由浙江省社科院主辦並承辦

 

198945重修王陽明墓揭碑儀式在紹興縣蘭亭鄉鮮蝦山王陽明墓地舉行時任浙江省政協主席商景才同與會代表出席了王陽明墓揭碑儀式

 

19891212王守仁墓被浙江省人民政府公布浙江省第三批省級重點文物保護單位

 

2006525王守仁故居和墓被國務院公布爲第六批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

 

 

 

重修王陽明先生墓碑記」:

王陽明名守仁字伯安紹興府餘姚人弘治十二年進士歷任刑部兵部主事左檢都禦史巡撫南贛總督兩廣官至南京兵部尚書封新建伯先生少穎悟博覽經籍後倡導心學主張知行合一以致良知爲旨歸世稱姚江學派於明中葉後影響甚巨播揚東瀛嘉靖七年先生兵卒於江西南安享年五十有七先生常講學於山陰且深有桑梓之念故卒後由弟子王畿等扶柩歸嶽越葬於今紹興縣蘭亭花街鮮蝦山南麓明清間數修其墓一九三七年當地駐軍軍官常撰文立碑此後漸次荒蕪一九八七年七月二十四日紹興縣人民政府列其墓爲縣級重點文物保護單位並成立王陽明墓修複委員會一九八八年出資修墓以浙江省社會科學院爲中介經日本國九州大學岡田武彥名譽教授發起日本友人二百八十一名集資贊助哲塋賴復永垂瞻仰爰爲之記修墓工程肇始於一九八八年九月十二日竣工於一九八九年三月。——紹興縣王陽明墓修複委員會一九八九年三月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