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풍몽정의 서재 문화와 인문정신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0.08.16|조회수299 목록 댓글 0


명나라 말기 풍몽정의 서재 문화와 인문정신

2020815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 모두 비슷한 인문정신을 갖고 살 것 같지만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 만날 때는 마음속으로는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시작하지만 점점 만나는 시간이 늘수록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어떤 면에서는 어색합니다. 조용히 앉아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서화를 즐기고 정원이나 서재를 꾸미는 것 모두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문화 취향(cultural taste)이 다른 것인지 또는 소비 수준이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나치지만 최근의 사례를 보면 한국 사람들이 폭탄주 마시는 것을 중국 사람들과 함께 마시면서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폭탄주는 바쁜 상업사회에서 빨리 취하고 빨리 헤어지는 데는 좋겠지만, 천천히 즐기려는 일부 중국 사람들에게는 야만 행위와 같아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현대 중국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전통적 인문정신은 대체로 명나라 말기부터 시작하였고 명청시기 인문정신에 서양 철학을 더하여 일어난 19195.4운동의 절정을 거쳐 1949년 중국 건립까지를 말합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많은 지식인은 중국 전통의 인문정신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에 퇴락하고 소멸된다고 걱정하였습니다. 지금은 끼리끼리 가는 고급 식당이나 찻집 또는 술집이 대만과 홍콩 또는 상해 같은 대도시에 서재 같은 장소를 꾸며놓고 옛날 명청시기 가구를 들여놓고 회원제 운영을 하고 있답니다. 글쎄요,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입니다. 세상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살고 싶은 입세(入世) 또는 세속화(secularization)가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에 형성된 인문정신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왕양명의 평생소원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소위 자연으로 돌아가서 신선처럼 살고 싶은 유선(遊仙)문학이 유행하였습니다. 따라서 현대사회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나 조선의 전통적인 인문정신을 건전하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형성된 인문정신은 사람과 사회의 시비선악을 따지고 연구하는 철학이 아니고 개인이 예술을 즐기는 심미(審美)의식이며 예술 소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미의식에는 동기창이 왕유(王維)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를 감식하면서 말한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한원(閑遠)과 번뇌에서 벗어난 맑은 청윤(清潤)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 끝없이 조용하고 누릴 수 있도록 깨끗하다는 정()과 청() 두 글자입니다심미 대상에는 시문, 서화, 서적, 골동품, 서재, 고급 차, 음악, 정원, 꽃나무, 양어, 산수 유람 등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런 데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고 누렸다고 합니다. 명나라 말기의 심미적 소비적 개인적 인문정신은 마침 거품이 많은 호경기와 함께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대략 1540-1550년대에 강남지역에서 일어난 문인들의 예술 붐은 널리 퍼졌고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92년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명나라 군대가 지원을 나왔습니다. 왜군은 조선에서 각종 문화재를 약탈하면서 서화와 서적을 탐냈다고 합니다. 사실상 명나라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명나라 지식인들은 돈을 주고 사갖겠지요. 특히 조선의 종이는 품질이 좋아서 아주 귀하여 여겼답니다. 아무튼지 조선에 있던 많은 서화와 서적을 전쟁통에 많이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명나라 지식인들이 조선의 역사와 문화 및 시문을 깊이 이해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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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 풍몽정(馮夢楨, 1548-1605)30(1577) 진사에 합격하여 관직을 지내고 40(1587) 사직한 뒤 고향 절강성 가흥부에 돌아와서 은퇴 생활의 일정을 계획하였습니다. 50살까지 산속에 작은 별장을 짓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고 독서하고 예술뭄을 감상하고 따로 정좌하는 방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연구에 따르면, 그는 47(1594)에는 뜻밖에 왕유(王維)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를 아주 싼 값에 매입하였습니다. 이듬해 7월에는 당시 북경에 있는 동기창(董其昌)의 요청을 받고 그림을 북경으로 보내고 10월 보름에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받았습니다. 동기창은 왕유의 그림이 중국 산수화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림 가격이 아주 높아졌다고 합니다. 풍몽정이 수장한 왕유 강산설제도는 명나라 말기 전쟁통에 빼앗겼다가 청나라 번성시기에 필윤비(畢潤飛)1300 냥에 사서 수장하였고 결국에는 청나라 황실로 들어갔습니다.

 

풍몽정은 50(1597)부터 항주 서호(西湖) 근처에 있는 고산(孤山)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겠다고 생각하였고 나중에 90냥을 주고 땅을 샀고 57(1604) 815일에 서재를 완공하였습니다. 왕유 강산설제도를 수장하고 감상하며 아주 기쁘다는 뜻에서 쾌설당(快雪堂)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당시에 그는 산수화의 최고작품이라는 왕유의 그림을 수장하고 감식한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풍몽정처럼 은거하여 즐기는 것이 명나라 말기 문인들 누구나 꿈꾸었던 낭만이고 멋이었습니다. 소위 문인의 서실(書室) 문화또는 서재(書齋) 문화입니다. 휴식공간을 만들고 심미(審美)의식을 즐기는 것이며, 심미활동에는 인문과 자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문에는 시서화, 골동품, 고급 차 마심, 연극 감상, 정좌(靜坐) 등이 있고 자연에는 꽃나무 감상, 산수 유람 등이 있습니다. 물론 혼자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나 가끔 가까운 벗이나 스님들을 찾아가거나 찾아오면 함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맛있는 요리입니다.

 

풍몽정은 고서화, 고서적, 골동품, 정원 꽃나무를 즐기고 연극단을 만들어 직접 감상하고 고급 차를 마셨습니다. 그의 생활비와 연극단 운영비용은 글을 지어주거나 윤문하여 벌어서 충당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부유하지 않아 가끔은 비용이 모자랐다고 합니다. 그의 취향과 비용은 대체로 중상 등급에 해당하며 아주 사치한 고급 수준은 아닙니다. 그는 불교 거사로서 5, 그의 부인 5냥 모두 은 10냥을 내놓고 가흥(嘉興) 대장경편찬에 협조하였습니다.

 

풍몽정이 남경 한림원에 근무하던 15939월 월급이 은 178푼에 땔나무값 보조금 36전이었고 겨울에는 땔나무 값 보조금이 13냥이었다고 합니다.(馮夢禎,『快雪堂日記』:收翰林院九月俸一兩七錢八分柴薪三兩六錢冬季柴薪邊閏十三兩加耗萬歷二十一年(1593)九月二十八日記) 따라서 월급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여 돈을 벌었고 아껴서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생활수준은 일반 백성보다는 아주 잘사는 편이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예술품 시장이 일어났고 서화를 그려서 생활하는 예술작가들도 나타났습니다. 소위 양주팔괴(揚州八怪) 가운데 일부는 예술품 시장에 작품을 팔아서 생활하였습니다. 예술품 시장이 생기고 작가는 작품의 가격을 공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청나라에서 유명한 정판교(鄭板橋, 1693-1766)1759년 양주(揚州)에서 자신의 작품 가격을 알리는 글을 공개하였습니다. 작품 가격을 매기는 것을 당시에 윤격(潤格)이라고 불렀습니다. 정판교는 큰 그림은 6, 중간 크기는 4, 작은 그림은 2냥을 받고, 글씨 두 줄은 1, 부채 글씨는 5전을 받았습니다. 선물이나 음식 대접은 사양하고 은()을 받기로 하였답니다.(大幅六兩中幅四兩小幅二兩書條對聯一兩扇子斗方五錢凡送禮物食物總不如白銀為妙


이 당시는 청나라 극성시기로 호경기였습니다. 가격이 비록 비쌌으나 일반 지식인들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판교가 1천 냥을 받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명나라 유민(遺民) 대이(戴易, 1621-?)는 청나라 초기에 활동하였는데 글씨 1폭에 은 1전을 받겠다고 방문을 써붙였더니 사람들이 많이 사갔다고 합니다.(書一幅止受銀一錢人樂購之) 청나라 정부에서 유명한 산수화를 구입하였는데 1폭에 몇 냥부터 보통 20-30냥 정도였습니다.

 

청나라 시기 강남지역 강소성 무석(無錫)의 땅값 변동을 보면, 순치 연간(1638-1661) 초기에 좋은 밭 1(, 300)2-3, 강희 연간(1662-1722)에는 4-5냥으로 올랐고 옹정 연간(1722-1735)에는 순치 연간 가격으로 떨어졌고 건륭 연간(1736-1795) 초기에는 7-8냥이고 아주 좋은 밭은 10냥이 넘었다고 합니다.(錢詠,『履園叢話』:至本朝順治初良田不過二三兩康熙年間長至四五兩不等雍正年間仍復順治初價值至乾隆初年然余五六歲時亦不過七八兩上者十餘兩”)

 

강남지역 땅값에 예술품 가격을 비교해보면 예술품 가격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예술품 시장은 재산이 중상 등급의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누리는 문화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상 등급의 일반 서민에게는 부담이 컸으나 부유한 상인이나 높은 관원들에게는 아주 싼 것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많은 은()을 갖고 청나라 북경에 가서 좋은 서화와 골동품을 사왔다고 합니다. 물론 속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인삼을 바리바리 싸갖고 가서 좋은 서적과 서화를 사왔다고 합니다. 당시 인삼 가격을 따져보면 아마도 아주 비싼 서화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면 예술품 상인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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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반사회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풍몽정의 서재 활동 목록입니다.

 

풍몽정은 집안일과 서재 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집안일 다섯 가지는 자녀 교육, 손자와 놀기, 늙은 부인과 편안한 대화, 나이 어린 첩과 놀아주기,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음식 먹기입니다.

다섯 가지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하며 절대로 엉성하게 하거나 지나치게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집안일 다섯 가지 이외에는 항상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재 일은 열세 가지입니다. 책을 펼쳐놓고 읽기, 향불 피우기, 고급 차 마시기, 악기 타기, 정좌(靜坐), 서첩 보고 붓글씨 임모, 유명한 그림 감상, 붓 그림 그리기,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 감상, 새소리 듣기, 꽃나무 관상, 서예 작품 감상, 좋은 돌멩이 감상입니다.

 

기간에 따라 할 일도 정해놓았습니다.

며칠에 한 번 하는 일, 한 달마다 꼭 할 일, 철마다 반년마다 할 일이 있습니다.

50살 이전에 하고 싶은 것은 천태산과 안탕산(鴈蕩山, 절강성 溫州, 동남지역의 제일 명산)을 유람하는 것을 비롯하여 강소성 무석(無錫)에 있는 정산(定山) 아래 호숫가에 산장을 짓고 은거하는 것입니다.

 

 

馮夢楨,「眞實齋常課記」,『快雪堂集』,45

 

家常五事教子弄孫對老婦宴語娛小姬有客對客飲食隨宜不粗不侈除此五事則居書室

書室十三事隨意散帙焚香瀹茗品泉鳴琴揮塵習靜臨摹法書觀圖畫弄筆墨看池中魚戲或聽鳥聲觀卉木識奇字玩文石

數日一行者四事登眺山水尋僧訪知舊有花時看花

起居外毋經月必行者一事范村虎跑展墓

經時或半歲必行者四事祀先拙園了故鄉諸緣省墳墓隨宜收買奇書或法書名畫

五十前必勾當者三事遊天台鴈蕩諸名山置湖莊定山中隱居所不償

以上課者有如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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