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양의 복고문학(「秋望」)과 왕양명의 반주자학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0.11.10|조회수272 목록 댓글 0

이몽양의 복고문학(「秋望」)과 왕양명의 반주자학

2020년 11월 10일

 

이몽양(李夢陽) 「가을 보름날(秋望)」 시는 이몽양이 몇 살에 지었다는 고증이 아직 없습니다. 이몽양 문집 66권에도 실리지 않고 전해옵니다. 이몽양의 「가을 보름달(秋望)」은 복고 생각을 잘 나타냈기에 명청시기에 유명하였습니다.

 

이몽양은 감숙성과 하남성에서 살았기에 북방지역 전란과 명나라 군사력의 허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의 허약을 벗어나려면 송나라시기에 일어난 제도와 학술을 개혁하여 바꾸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송나라 시문(詩文)은 지나치게 형이상학 철학 용어(理語)를 설명하기에 열정과 의욕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심지어 당나라 이후의 글을 읽지 말자고 말하였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말고 표현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송원명 제도를 개혁하려면 과거에 영광스러웠던 진한(秦漢)시기를 배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고(復古)운동입니다.

 

이몽양은 부모님 삼년상을 마치고 27살(1498)에 북경에 돌아와서 복고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때 동갑내기 왕양명은 겨우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이 28살 북경에서 관정(觀政)할 때부터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이몽양의 복고운동에 공감하고 서로 사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몽양이 22살(1493)에 과거시험에 합격할 때에 왕양명은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왕양명은 22살에 이몽양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사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왕양명이 주자학을 반대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이몽양의 복고운동에 동참한 것입니다. 송나라부터 형성된 송원명 체제와 학술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이몽양은 복고운동의 주동자이며 왕양명은 소극적인 동참자였습니다.

 

끝으로 조심할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은 중기에 각종 정치행정과 경제사회 문제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평민사회(소농경제)를 지향하며 건립한 기존 체제를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존 체제를 수정할 것이냐? 아니면 아예 기존 체제를 개혁하여 다른 체제를 찾을 것이냐? 방향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조선의 진정(眞情) 문학이 이몽양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차라리 비슷한 사회문제를 겪으면서 공감하였다고 평가하여야 합니다. 영향을 받아 배운 것과 상황을 공감한 것은 아주 다른 관점이고 다른 평가입니다. 조선 문학의 주체적 인식과 반성을 연구하기 위하여 이몽양의 영향력을 받았다고 평가하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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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夢陽,「秋望」︰

黃河水繞漢宮牆,河上秋風雁幾行。

客子過壕追野馬,將軍弢箭射天狼。

黃塵古渡迷飛挽,白月橫空冷戰場。

聞道朔方多勇略,只今誰是郭汾陽?

 

황하 강물은 영광스러웠던 한(漢)나라 궁궐 담장을 여전히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데,

옛날 기억은 사라지고 강물에는 가을바람이 불고 기러기 몇 줄이 날아간다.

고향 떠나온 군인들은 참호를 나와 북쪽 오랑캐(타타르족)를 추격하고,

장군들은 화살통에 화살을 담고 외적이 쳐들어왔다는 천량성 별을 향하여 활을 쏜다.

군량미와 말먹이 풀을 실은 배들과 수레들이 달리느라고 일어난 누런 황사 먼지에 옛날 나루터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하얀 보름달은 하늘에 걸렸고 전쟁터는 춥기만 하다.

옛날 당나라 시기에 삭방절도사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용감하고 전략도 뛰어났다고 들었는데,

지금 우리 명나라에는 누가 당나라 곽자의 같은 장군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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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庫提要』,卷一百七十一,『空同集』︰

『空同集』,六十六卷(陝西巡撫采進本)

 

 

『공동집(空同集)』 66권은 명나라 이몽양이 지었습니다. 이몽양의 『공동자(空同子)』 1권(6目, 8篇)에 대하여 『사고전서 총목제요』에서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많은 고위 관원들이 환관 유근(劉瑾, 1451-1510) 등 환관 8명(八虎)의 횡포를 보고도 두려워하였으나, 이몽양은 호부 낭중일 때 유근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감옥에 갇혀 죽을 뻔하였습니다. 이때 이몽양의 기개와 절조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27살(1498)에 북경에 돌아와 복직하였을 때부터 복고운동을 주창하였고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당나라 이후의 서적을 읽지 말라고 일렀는데 주장한 내용과 논리가 아주 수준 높았기에 당시 많은 사람의 눈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고 문장 짓는 방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 뒤에는 사람들이 진한(秦漢) 시기의 문장과 당나라 시기의 시를 베껴 표절하는 것이 날로 심하였습니다. 평론가들은 원인을 찾아보니 이몽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 사람 가운데 이몽양이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명나라는 명태조 홍무 이래로 국운이 개국하는 운세에 해당하여 크고 밝고 넓고 큰 문학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화(成化, 1465-1487) 이후에는 세상이 평온하고 평안하였기에 대각(臺閣) 관원들의 따듯하고 평온한 글이 많아졌습니다. 갈수록 폐해가 심각해지고 낡은 것이 계속 이어지고 결국에는 문장이 부드럽고 따듯하고 복잡하게 되었고 모두 천편일률로 닮아갔습니다. 이몽양이 이렇게 마비된 문학을 흔들어 일어나도록 하였고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옛날 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깨우쳐주었습니다. 따라서 이몽양의 공적이 작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몽양은 문학에서 기개를 높이고 자긍심을 갖고 삐뚤어진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명나라 말기에 주양공(周亮工, 1612-1672)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에 이몽양의 「황하 강물이 한나라 궁궐을 여전히 감싸며 흘러간다.(黃河水繞漢宮牆)」 시 1수를 실었고 마지막 시구절에 “곽분양(郭汾陽)”라는 글자가 있는데 당나라 시기에 해당하기에 이몽양이 구설수에 오를까 봐서 빼놓아 문집에 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몽양이 복고운동을 일으켰고 송나라 이후의 시문은 마치 형이상학을 설명하는 것(理語) 같기 때문에 당나라 시기까지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하경명(何景明, 1483-1521)과 설혜(薛蕙, 1490-1539) 등은 모두 이몽양의 복고운동에 동참하였던 사람이며 하경명은 시를 논의하는 여러 글에서 이빨을 내보이며 이몽양을 비판하였고 설혜도 “뛰어난 사람들은 하경명을 동정하였고 엉성한 사람들은 이몽양을 이해하지 못한다.(俊逸終憐何大復,粗豪不解李空同)”고 평론하였습니다.

사실상 이몽양이 35살에 환관 유근(劉瑾)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오히려 감옥에 갇혔을 때 하경명에게 구명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몽양의 기개에 대하여 사람들은 달리 생각하게 되었고 나중에 배척할 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희곡 『중산랑(中山狼)』)

이몽양을 공정하게 평론하면, 그의 시(詩)는 재주가 풍부하고 힘이 강건하였기에 당시에 유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詩)는 옛날 문체에서는 반드시 한나라와 위나라를 본받았고 가까운 문체에서는 성당(盛唐) 시기를 배웠으며, 구절과 글자를 모방하는 것은 옛날 문장을 읽고 소화하지 못한 것도 왕왕 있습니다. 마치 무기고에 좋고 나쁜 무기가 섞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문장(文)은 고의로 발음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어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이해하기에 얕고 쉬운 뜻을 어렵고 깊게 수식하였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은 이몽양의 문장을 시(詩)와 똑같이 중시하였는데 이몽양의 유명한 인기에 기죽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시와 문장을 함께 기록하여 보존하였는데 썩 좋지 않은 것도 가려주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문풍이 바뀐 이유와 여러 시문파들이 경쟁하였던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四庫提要』,卷一百七十一,『空同集』,六十六卷(陝西巡撫采進本)︰

 

明、李夢陽撰。夢陽有『空同子』,已著錄。

夢陽為戶部郎中時,疏劾劉瑾,遘禍幾危,氣節本震動一世。又倡言復古,使天下毋讀唐以後書,持論甚高,足以竦當代之耳目。故學者翕然從之,文體一變。厥後摹擬剽賊,日就窠臼。論者追原本始,歸獄夢陽,其受詬厲亦最深。

考明自洪武以來,運當開國,多昌明博大之音。成化以後,安享太平,多臺閣雍容之作。愈久愈弊,陳陳相因,遂至嘽緩冗沓,千篇一律。夢陽振起痿痺,使天下復知有古書,不可謂之無功,而盛氣矜心,矯枉過直。

『因樹屋書影』載其「黃河水繞漢宮牆」一詩,以落句有“郭汾陽”字,涉用唐事,恐貽口實,遂刪除其稿不入集中。其堅立門戶,至於如此。同時若何景明、薛蕙皆夢陽倡和之人,景明論詩諸書,既齗齗往復;蕙亦有“俊逸終憐何大復(何景明),粗豪不解李空同(李夢陽)”句,則氣類之中已有異議,不待後來之排擊矣。

平心而論,其詩才力富健,實足以籠罩一時。而古體必漢魏,近體必盛唐,句擬字摹,食古不化,亦往往有之。所謂武庫之兵,利鈍雜陳者也。其文則故作聱牙以艱深,文其淺易。明人與其詩並重,未免怵於盛名。今並錄而存之,俾瑕瑜不掩。且以著風會轉變之由,與門戶紛競之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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