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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강좌 2021년

왕양명 40살에 주자학자 汪俊의 無未發과 動察 공부를 비판

작성자이경룡|작성시간21.01.07|조회수190 목록 댓글 0

왕양명 40살에 주자학자 汪俊의 無未發과 動察 공부를 비판

2021년 1월 6일

 

 

왕양명은 40살 봄에 북경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주자학자 왕준(汪俊)과 만나서 깊이 토론하였습니다. 왕준은 왕양명과 토론한 내용 가운데 일부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서신을 보냈고 왕양명도 조목조목 반박하는 답신을 보냈습니다. 이 서신은 왕양명의 답신입니다.

 

이 답신의 핵심 내용을 보면, 왕준은 이발만 있고 미발이 없다는 무미발(無未發)을 주장하고 따라서 미발과 이발을 통합한 동찰(動察)공부를 주장하였습니다. 왕준의 무미발에 대하여 왕양명은 오히려 『중용』과 이정(二程)에 따라 미발과 이발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미발이 없다는 왕준 견해를 반박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이 답신을 보내기 전에 만나서 토론하면서도 왕준의 무미발(無未發)에 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준의 동찰공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왕준에게 보낸 다른 서신을 보면 왕양명 스스로 왕준과 토론할 때도 왕준의 무미발을 귀담아듣지 않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실토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신에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여전합니다.

 

왕양명은 이 답신에서 정주학의 미발과 이발, 동(動)과 정(靜) 개념에 근거하여 다만 왕준이 희노애락에 미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만 비판하고 부정하였을 뿐입니다. 이것도 사실상 왕준의 일물설(一物說)에서 보면 왕양명의 비판은 무효합니다. 왕양명은 답신에서 다만 정주학이 미발과 이발, 동과 정 둘로 나눈 것만 비판하였습니다.

 

왕양명은 38살 귀주에서 석서(席書)와 토론할 때부터 정좌하여 미발 본체를 직접 깨닫는 정일(靜一)공부를 주장하였습니다. 왕양명이 깨달은 미발 본체는 왕준이 설정한 허무(虛無)입니다. 그렇지만 왕양명은 왕준의 무미발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왕준의 동찰공부를 제대로 부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왕양명은 왕준과 논변하면서 직접 체험이 중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직접 정좌공부를 하여 본체를 깨닫는 신비체험을 몇 번 겪었고, 왕준은 서적을 꼼꼼하게 읽고 추론하여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왕준이 직접 체험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면서 정명도가 왕안석에게 “대탑설상륜(對塔說相輪)”이라고 비난하였던 이야기를 인용하였습니다.

 

홍치 연간부터 고문(古文) 운동과 함께 정학(正學) 운동이 일어나서 젊은 학자들은 직접 체험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환관 유근(劉瑾)이 1511년 8월에 처형된 뒤에 유근 때문에 쫓겨나갔던 관원들 일부가 복직하여 북경 관장(官場)에는 활기가 돌았고 정학 운동 참가자와 정주학자 사이에서도 활발한 토론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주자학자들은 미발 본체를 직접 깨달을 수 없다는 정주학의 전제조건에 근거하여 정학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불교와 도교의 허무(虛無)에 빠졌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주자학의 이분론을 수정하여 일물론을 주장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왕준의 견해는 수정 주자학에서 주목할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왕양명과 왕준 두 사람의 우정은 일찍부터 돈독하였습니다. 젊었을 때는 밤늦게까지 토론하였고 관직에서 은퇴하고 함께 공부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0살 봄에 왕준을 만나 토론하였고 56살 10월에 광서성 이민족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길에 강서성 과양현(戈陽縣)에 들러 왕위(王偉)와 왕준을 만났고 시(詩)를 지어 주었습니다. 왕양명은 시(詩)에서 왕준에게 무문관(無門關)을 설명해주고 왕준이 허무(虛無)를 넘지 않기에 무문관조차 끝내 유문관(有門關)이라고 비평하였습니다.

 

왕준은 왕양명이 세상을 떠나자 제문을 지었습니다. 왕준은 제문에서 왕양명의 학술이 널리 전파되어 어린아이에게까지 유명하다고 평가하였으나, 왕양명의 심학을 인정하지 않고 혹세무민하는 망설이며 젊은 학자들을 불교와 도교에 끌고 들어가거나 끌어오는 이단 학술이라고 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왕준 입장에서 보면 왕양명은 정이천이 넘지 말라는 본체의 정(靜) 곧 왕준이 설정한 이단 학술의 허무(虛無)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왕준은 과거시험에서 1등 합격하여 사람들의 기대가 컸습니다. 그는 가정 황제가 대례의 사건을 일으켰을 때 반대하는 관원 72명을 이끌고 궁궐 앞에서 시위하였고 결국 좌천되었습니다. 왕준은 정덕 연간과 가정 연간에 주자학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준의 문집은 현재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황종희 『명유학안』에 그의 주장을 발췌한 것이 남아있습니다.

 

조선학계에서도 일찍부터 왕준(汪俊)이 대례의 사건에서 주자학자들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율곡(1536-1584), 김장생(1548-1631), 이항복(1556-1618), 이수광(1563-1628), 정약용(1762-1836) 등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고 김장생 선생은 대례의 사건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 선생은 주자학 입장에서 왕준(汪俊)과 나흠순(羅欽順)을 비교하고 왕준이 주자학을 수정한 것은 주자학에 저지른 죄악이 크다고 폄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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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왕준에 보낸 답변서(答汪石潭內翰)」(辛未):

 

조목조목 비판해주신 서신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 부스럼이 심하여 글씨를 쓸 수 없기에 답장을 보내드리지 못하다가 이제야 답변서를 올립니다. 서신에서 “지난날 토론한 내용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에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하며 이대로 끝낼 수 없습니다.

 

첫째, 희노애락은 정(情)이기에 미발(未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희노애락의 미발은 본체이기에 성(性)이라고 말합니다. 미발 본체를 성(性)이라고 보는 주장은 자사(子思)의 『중용』에서 처음 나온 것이며 이정(二程)이 처음 내놓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마땅히 자사의 『중용』에서 처음 나왔다고 보아야 합니다.

 

〔참고 : 『중용』에서는 “喜怒哀樂之未發謂中”이라고 말하고 다만 솔성(率性)을 말하였을 뿐이며 미발을 성(性)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汪俊은 이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

 

둘째, 희노애락을 대상으로 삼아 생각하는 것(思)과 알아채는 것(知覺) 둘도 마음(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心)이 미발의 본성(性)과 이발의 정(情)을 모두 포함하여 통제한다는 것이며, 이 말뜻은 본성이 마음의 본체이고 정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정이천은 여대임과 중(中)을 논의한 서신(程頤,「與呂大臨論中書」)에서 “마음은 하나이지만, 본체를 말할 때가 있는데 『주역』에서 말하는 ‘적연부동(寂然不動)’이고, 작용을 말할 때가 있는데 ‘감이수통(感而遂通)’입니다.”고 나누어서 말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는 우리 모두 이견이 없습니다.

 

〔일본어 번역본 『왕양명 전집』 2권 35쪽 오역: “喜怒哀樂之與思與知覺” 구절에서 喜怒哀樂과 思와 知覺 셋을 묶어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之與” 허사에 따르면 희노애락을 생각하고 지각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희노애락이 情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일본어 번역본의 이 서신 해제를 보면, 왕준이 주자의 미발 견해(未發 主義)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고 왕양명이 체용일원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이 해제는 왕준 주장의 요점과 왕양명 대답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셋째, 당신께서도 잠시 체용(體用) 논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정명도가 체와 용은 서로 상대의 근원이 된다고 상즉(相卽)논리를 말한 체용일원(體用一源)이라는 말에서 본체(體)가 작용(用)의 근원이 되고 작용(用)이 본체의 근원이 된다는 논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체는 형이상이기에 감각기관으로 알 수 없고 작용은 형이하이기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주장도 이것이 아닙니까? 당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낮에 활동하는 동안에는 적연부동한 때가 없다.”고 말한 것은 마음의 작용은 잘 알겠는데 마음의 본체는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정주학자는 군자의 공부가 이발의 작용에 착수하여 미발의 본체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汪俊은 정이천이 설정한 제한에 따라 적연부동의 미발 본체를 직접 깨달을 수 없고 다만 희노애락의 이발한 작용을 관찰하여 본체를 깨닫는 간접적인 방법을 주장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정주학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왕준의 주장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양명은 자신의 靜一 공부 관점에서 비난하거나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대체로 정이전이 “생각한다는 것은 이발이다.” “지각한다는 것은 움직임(動)이다.”고 말한 것은 희노애락이 미발한 상태에서 중(中)을 유지하라(不偏不倚)는 것을 말한 것이며, 미발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정이천의 「與呂大臨論中書」를 보면, 여대림은 中이 道之所由出이라고 보았는데 정이천은 中이 다만 본성의 덕성을 묘사한 것이며 不偏不倚라고 보고 여대람 생각을 고쳐주었습니다. 정이천이 中을 不偏不倚라고 설명한 것은 불교의 참선이나 도교의 정좌에서도 정좌하면서 몸의 자세는 물론이고 마음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汪俊은 정이천과 여대림의 견해를 종합하여 中이 성덕(性德)을 묘사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체(道體)라고 보고 도체에 주목하였습니다.(『明儒學案』,卷48,汪俊 학안,「濯舊」:“中,所以狀性之德,道之體也”) 왕양명은 정이천 견해에 따라 中이 성덕을 묘사한 不偏不倚라고 왕준에게 각성시켜주고 道體라고 보는 견해를 사실상 부정하였습니다.〕

 

다섯째, 주자가 처음에는 미발은 이해하지 못하여 고민하였습니다. 현재 『주문공 문집』을 보면 장식(張栻, 1133-1180)과 서신 수십 통을 주고받으며 중화(中和) 문제를 토론한 뒤에 결론을 내렸고 그의 결론(舊中和說)은 현재 『중용 장구』에 실려있습니다. 『중용 장구』에서 결론을 경솔하게 기술하지 않았으나, “계구(戒懼)하여 단속하는 것부터 지극한 정(靜)의 중(中)에 이르기까지”와 “근독(謹獨)하여 정순(精純)하는 것부터 사물을 잘 응대하는 상황(和)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한 두 구절은 아무래도 미발과 이발 둘을 지나치게 갈라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자 후학은 결국에 이발과 미발 둘로 나누고 “적연부동”의 본체와 정(靜) 상태의 존양공부(계신공구 공부)가 따로 있다고 추측합니다. 이런 해석은 계신공부의 마음(心)을 항상 존양하면 존양공부에 잠시도 끊어지는 틈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부도불문(不睹不聞)”의 본체를 존양하는 공부를 따로 독립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자는 미발에서는 계신공구 공부가 있고 이발에서는 신독 공부가 있다고 둘로 나누었습니다. 왕양명은 본체를 직접 존양하는 공부만 있으면 되며, 주자처럼 미발 공부와 이발 공부 둘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도 사실상 왕양명이 본 체용일원의 일원(一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 당신은 더 나아가 이발의 동(動) 상태에서 동찰(動察)공부를 착수하고 동찰공부가 잠시도 끊어지는 틈이 없도록 하면 이발의 동(動)은 사물에 잘 응대할 것이고(和) 미발의 정(靜)도 중정(中)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연부동”의 본체를 스스로 잘 이해하였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당신은 적연부동의 본체를 직접 체험하지 않고 추측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정명도가 왕안석에게 13층 돌탑 안에 직접 들어가서 체험하지 않고 먼 밖에서 돌탑의 상륜(본체)이 어떤 모양이라고 묘사하였다고 비난하였던 것과 같은 꼴이 되었습니다.

 

〔왕양명은 왕준에게 적연부동의 본체를 직접 체험해보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일곱째, 그런데 주자가 “(미발상태에서) 지각(知覺)이 있지만 지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주장도 옳지 않습니다. 당신도 옳지 않다고 의심하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옳지 않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미발공부 자체를 버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한번 더 따져보시길 바랍니다.

 

〔虛靈知覺을 설명하면서 학자마다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깊은 禪定 상태에서도 허령이 있고 허령이 知覺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이 지각은 사실상 허령의 覺照입니다. 주자는 여러 곳에서 허령을 많이 말하면서도 정작 수양공부에서는 중요하게 다루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래서 미발 상태에서 지각이 있지만 지각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지식인의 토론은 옛날 주장(주자의 견해)과 다른 것이 있다면 잠시 결론을 보류하고 마땅히 옛날 주장을 끝까지 찾아서 따져본 뒤에 옛날 주장에 오류를 발견한 뒤에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만 논변이 명확하게 되고 분석이 타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연구하면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신처럼 학문을 배우고 뛰어나게 똑똑하고 깊이 따져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위에서 지적한 일곱 가지를 모른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의도는 요즘에 특별한 주장을 내세워 자신의 학술이 높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며 옳은 것을 찾겠다는 것이기에 주자학의 잘못을 용감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답변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아끼지 마시고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가르쳐주시는 것이 당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반드시 저에게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王陽明,「答汪石潭內翰」(辛未):

承批教,連日瘡甚,不能書,未暇請益。來教云:“昨日所論乃是一大疑難。”又云:“此事關系頗大,不敢不言。”僕意亦以爲然,是以不能遽已。

夫喜怒哀樂,情也,既曰不可謂未發矣。喜怒哀樂之未發,則是指其本體而言性也。斯言自子思,非程子而始有。執事既不以爲然,則(而?)當自子思『中庸』始矣。

喜怒哀樂之與思與知覺,皆心之所發。心統性情,性心體也,情心用也。程子(程頤,「與呂大臨論中書」)云:“‘心一也,有指體而言者’,‘寂然不動’是也。‘有指用而言者’,‘感而遂通’是也。”(『朱子語類』,卷五)斯言既無以加矣。

執事姑求之體用之說。夫體用一源也,知體之所以爲用,則知用之所以爲體者矣。雖然,體微而難知也,用顯而易見也。執事之云不亦宜乎?夫謂“自朝至暮,未嘗有寂然不動之時”者,是見其用而不得其所謂體也。君子之於學也,因用以求其體

凡程子所謂“既思,卽是已發”,“既有知覺,卻是動”者,皆爲求中於喜怒哀樂未發之時者言也,非謂其無未發者也。

朱子於未發之說,其始亦嘗疑之,今其『集』中所與南軒(張栻)論難辯析者,蓋往復數十而後決,其說則今之『中庸注疏』是也。其於此亦非苟矣,獨其所謂“自戒懼而約之,以至於至靜之中”;自謹獨而精之,以至於應物之處”者,亦若過於剖析。而後之讀者遂以分爲兩節,而疑其別有寂然不動、靜而存養之時不知常存戒慎恐懼之心,則其工夫未始有一息之間,非必自其不睹不聞而存養也。

吾兄疑且於動處加工,勿使間斷,動無不和,即靜無不中,而所謂“寂然不動”之體,當自知之矣。未至而揣度之,終不免於對答說相輪耳。

然朱子“但有知覺者在,而未有知覺”之說,則亦未瑩。吾兄疑之,蓋亦有見。但其所以疑之者,則有因噎廢食之過,不可以不審也。

君子之論,苟有以異於古,姑毋以爲决然,宜且循其說而究之,極其說而果有不達也,然後從而斷之,是以其辯之也明,而析之也當。蓋在我者,有以得其情也。

今學如吾兄,聰明超特如吾兄,深潛縝密如吾兄,而猶有未悉如此,何邪?吾兄之心,非若世之立異自高者,要在求其是而已,故敢言之無諱。

有所未盡,不惜教論。不有益於兄,必有益於我也。

 

 

참고자료 :

 

朱熹,『中庸章句集注』,“喜怒哀樂未發謂之中。”:

注︰“自戒懼而約之,至於至靜之中,無少偏倚,而其所守不失,則極其中而天地位矣。自謹獨而精之,以至於應物之處,無少差謬,而無適不然,則極其和而萬物育矣。”

 

『近思录』,「道體」,第一卷:

제4조목、心一也,有指體而言者,有指用而言者,惟觀其所見何如耳。

 

『朱子語類』,卷五,性理二,性情心意等名義:

性以理言,情乃發用處,心即管攝性情者也。故程子曰:“有指體而言者,‘寂然不動’是也”,此言性也;“有指用而言者,‘感而遂通’是也”,此言情也。(端蒙)

 

『近思錄』,「存飬」(第四卷)︰

第53條︰蘇季明問:喜怒哀樂未發之前求中,可否?曰:不可。既思於喜怒哀樂未發之前求之,又卻是思也。既思即是已發。才發便謂之和,不可謂之中也。

 

『朱子語類』,卷62,

戒慎一節,當分為兩事戒慎不睹,恐懼不聞,如言聽於無聲,視於無形,是為防範之於未然,以全其體。慎獨,是察之於將然,以審其幾。

 

『朱子語類』,卷九十六,「程子之書」二:

問:「未發之前,當戒慎恐懼,提撕警覺,則亦是知覺。而伊川謂"既有知覺,卻是動",何也?」

曰:「未發之前,須常恁地醒,不是瞑然不省。若瞑然不省,則道理何在?成甚麼『大本』?」

曰:「常醒,便是知覺否?」

曰:「固是知覺。」

曰:「知覺便是動否?」

曰:「固是動。」

曰:「何以謂之未發?」

曰:「未發之前,不是瞑然不省,怎生說做靜得?然知覺雖是動,不害其為未動。若喜怒哀樂,則又別也。」

曰:「恐此處知覺雖是動,而喜怒哀樂卻未發否?」

先生首肯曰:「是。下面說『復,見天地之心』,說得好。復,一陽生,豈不是動?」

曰:「一陽雖動,然未發生萬物,便是喜怒哀樂未發否?」

曰:「是。」

(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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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陽明,兩廣詩二十一首

嘉靖丁亥(1527, 56살)起,平思田之亂

 

王陽明,「寄石潭(汪俊)二絕」:

仆茲行無所樂,樂與二公一會耳。得見閑齊(汪偉),固已如見石潭(汪俊)矣。留不盡之興於後期,豈謂樂不可極耶?聞尊恙已平復,必於不出見客,無乃太以界限自拘乎?奉次二絕,用發一笑,且以致不及請教之憾。

 

見說新居止隔山,肩輿曉出暮堪還。知公久已藩籬撤,何事深林尚閉關

乘興相尋涉萬山,扁舟亦復及門還。莫將身病爲心病,可是無關卻有關

 

 

祭文,親友祭文(九篇),

「石潭汪俊禮部尚書」:

惟公豪傑之才、經綸之業,習坎心亨,窮標峻揭。

勳名既懋,德譽亦隆,陽明之稱,走卒兒童

維吾兄弟,投分最早,坐或達旦,何幽不討。

忽謫萬里,執手贈言,誓將結茅,待子雲煙。

公茲東來,曰:“予無樂,樂見故人,來踐舊約。”

旗旐央央,流水瀰瀰,公私皇皇,或臥或起。

乃重訂約,“其待予歸;歸將從容,山遨水嬉。”

公既奏凱,吾治吾館。忽聞訃音,乃以喪返。

嗚呼!公有大勞,國史輝煌;公有心學,傳者四方。

公何以沒?吾何以傷?交情未竟,公進此觴。嗚呼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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