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범중암(范仲淹)의 도교 복식 찬양(道服贊)과 삼교합일(三敎合一) 풍조
2025년 9월 8일
송나라 범중암 「도사 복식 찬양」(서문 포함) :
등주 평해군(登州 平海軍)에서 서기를 맡은 허씨 형님(許琰)이 도사 복식을 지어 입었는데 마음을 맑게 하고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려고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진사 동년(進士 同年) 범중암이 찬양하는 글을 지어 올립니다 :
도가(도교)의 복식은 깨끗하고 검소합니다.
유가의 군자가 도가 복식을 입으니까 도가의 소요(逍遙, 속세를 멀리함)를 찬성합니다.
『장자』 「인간세(人間世)」에서 “마음을 비우니 밝은 지혜가 나온다.(虛室生白)”는 높은 경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먼 옛날에 복희와 여와를 낳았다는 화서(華胥)의 선천(先天) 세상에서 거니는 것 같습니다.
유가는 어찌 높은 관원이 입는 옷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도덕경』에서 말하듯이 총애가 굴욕의 근원이 된답니다.(寵辱若驚)
유가는 어찌 부자가 입는 옷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부유함을 자랑하면 재앙의 근원이 된답니다.(富貴而驕, 自遺其咎)
허씨 형님은 도가처럼 마음을 맑고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는 것(淸意潔身)을 스승처럼 존중하고 총애와 부유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합니다.
도교 정명파(淨明派) 시조 허손(許遜 ?-374, 四川 旌陽縣 縣令)의 후손답게 허손 조사(祖師)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宋、范仲淹書,「道服贊」(並序):
平海書記許兄制道服,所以淸其意而潔其身也。
同年范仲淹請爲贊云:
道家者流,衣裳楚楚。君子服之,逍遙是與。
虛白之室,可以居處。華胥之庭,可以步武。
豈無靑紫?寵爲辱主。豈無狐貉?驕爲禍府。
重此如師,畏彼如虎。旌陽之孫,無忝於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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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시기 범중암(范仲淹, 989-1052)은 북송 수도 개봉(開封)에서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郎)을 지내던 32살(1021)에 1015년 진사시험 동년 합격자(進士 同年)이며 평해군(平海軍, 현재 산동성 登州에 주둔한 水師)에서 서기(書記)를 맡은 허염(許琰)이 도가(도교)의 옷을 지어 입은 것을 보고 찬양하는 글 「도복찬(道服贊)」을 종이에 썼다고 합니다. 단정한 해서체이며 크기는 세로 34.8cm 가로 47.9cm입니다. 이 작품은 범중암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범중암이 도사의 복식을 찬양한 배경에는 본인이 도교를 숭상하였기 때문이며 「태청궁을 지나며(過太淸宮)」 칠언절구에서 보여줍니다.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 작품이 민간에 흘러나온 것을 수장가 장백구(張伯駒)가 북경 유리창(琉璃廠) 골동품 상인 신백생(薪伯生)에게 황금 110냥 큰돈을 주고 사서 1955년(1956년)에 국가에 기증하였답니다.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으며 2018년 4월 2일 장백구 선생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전시하였다고 합니다.
범중암이 「도복찬(道服贊)」을 지은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은 진종(眞宗) 황제가 도교를 숭상하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북송시기 황제들의 도교 숭상과 민간 유행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교 숭상은 결국에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북송시기에 많은 황제가 도교를 숭상하고 도사를 우대하였습니다. 태조는 개보(開寶) 2년(969)에 80살이 넘은 도사 소징(蘇澄)을 불러 만나고 또 그의 집에 가서 만났습니다. 양생술을 묻자 소징은 『노자』 “我無爲而民自化,我好靜而民自正” 구절을 들어 황제는 무위(無爲)와 호정(好靜)이 중요하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제2대 태종은 옹희(雍熙) 2년(984)에 도사 진단(陳摶)을 만나 예우하고 희이 선생(希夷先生)이라는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제3대 진종(眞宗)은 도교를 숭상하고 전국 각지에 도관(道觀)을 많이 짓고 도사 종방(种放)、조자연(趙自然)、정영(鄭榮)、조포일(趙抱一)、하란서진(賀蘭棲眞)、시통현(柴通玄)、견서진(甄棲眞) 등을 만나 우대하였습니다. 제4대 인종(仁宗)은 용호산(龍虎山) 장도릉(張道陵) 25세손 장건(張乾)에게 징소 선생(澄素先生) 호를 내려주었습니다. 제8대 휘종(徽宗)은 정화(政和) 3년(1113)에 전국에서 도교 서적을 모으고 도사 36개 등급, 도관 26개 등급을 매기고 우대하였습니다. 특히 궁관(宮觀) 도사를 지방관과 동등하게 우대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도교의 궁관을 지키는 많은 관직이 생겨서 관원들의 새로운 출로가 되었고 문인(文人)사회 형성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제3대 진종은 성격이 착하고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았습니다. 경덕(景德) 2년(1005) 거란이 20만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하자 해마다 평화비용(歲幣)을 납부하는 평화조약(澶淵之盟)을 맺었습니다. 이때부터 전쟁을 두려워하고 또 평화를 가장하려고 왕흠약(王欽若)、정위(丁謂)、진팽년(陳彭年)、유승규(劉承規)、임특(林特) 다섯 명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교의 미신 행사를 많이 벌였습니다. 천서(天書)를 핑계 삼아 경덕(景德) 5년(1008)에 연호를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로 바꾸고 11월에 태산(泰山)에서 천제(天帝)에 봉사(封祀)를 올리고 두수산(杜首山, 泰安 남쪽)에서 지신(地神)에 선제(禪祭)를 올렸는데 국가 재정수입의 1/5에 해당하는 비용 800만 관(貫) 넘게 들였습니다. 대중상부 4년(1011)에도 천서를 핑계로 삼아 분양(汾陽)에서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고 2610칸 대규모 옥청소응궁(玉淸昭應宮)을 짓는데 비용 820만 관을 썼습니다. 도교 숭상은 북송시기 국가 재정결핍 원인의 하나가 되었고 진종 황제는 미신에 정신 팔린 혼군(昏君 : 一國君臣如病狂然)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대중상부 연간에 진종 황제의 미신을 조장하였던 다섯 명 신하는 “대중 오귀(大中五鬼)”라고 욕하였답니다.
범중암은 인종 연간에 개혁에 참여하였던 인물입니다. 북송시기 인종(仁宗)은 국가의 관원과 병력 숫자가 너무 많고 불필요한 고정비용이 많아(冗官、冗兵、冗费) 국방력과 국가 재정상태가 나쁜데 북쪽에서는 서하가 자주 침략하였기에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서하를 방어하고 견제하는 것이 중요한 국가 방략으로 삼았습니다. 경력(慶曆) 3년(1043) 8월에 범중암(范仲淹, 989-1052)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부필(富弼, 1004-1083)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임명하고 두 사람은 10개 항목의 개혁(新政 : 一曰明黜陟,二曰抑僥倖,三曰精貢舉,四曰擇官長,五曰均公田,六曰厚農桑,七曰修武篩,八曰減搖役,九曰覃恩信,十曰重命令)을 건의하고 9개 항목을 반포하였는데 경력 신정(慶曆 新政, 1043-1045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인종은 보수세력과 충돌하자 붕당 발생을 걱정하며 범중암에게 상의하고 범중암은 붕당 폐해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인종은 보수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경력 5년 11월에 범중암을 파직하고 개혁을 멈추었습니다. 10개 항목 가운데 6개 항목을 실행하였으나 결국에는 관원 직전(職田) 항목만 남기고 모두 폐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인종이 경력 신정(新政)을 실행한 결과는 첫째 많은 유가(儒家) 인재를 양성하였고 둘째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임명하고 신법(新法, 1069-1085년)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범중암은 신정이 실패한 뒤 경력 6년(1046) 9월 15일에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짓고 옛날의 어진 정치인(仁人)은 “개인 자신보다 세상 사람들을 먼저 걱정하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였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개혁가의 가치 기준을 세워놓았습니다. 사실상 불교에서 불쌍한 사람의 고통을 줄여주고 즐거운 사람에게 즐거움을 보태주라는 보살의 자비(慈悲)를 모방한 글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송대 유학을 대표하는 지침이 되어 지금까지 많이 입에 오르내립니다.
범중암이 32살(1021)에 지은 「도복찬(道服贊)」은 네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북송시기에 일반 지식인과 관원이 도교와 불교를 가까이하고 배척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는 당나라와 오대 시기까지 칼을 차고(佩劍) 다니며 용기를 갖고 불의를 보면 나서서 해결하는 협(俠)이 많았는데 북송 태조부터는 문인(文人)을 우대하는 정책에 따라 문인이 많아지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셋째는 당나라 시기에 화려하던 복식이 북송시기에는 검소한 복식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줍니다. 넷째는 송대 이래로 관원들이 도덕적인 의리에 따라 집행하며 청렴(淸廉)한 염정(廉政)을 바랐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송시기부터 무인(武人)사회에서 문인(文人)사회로 전환되는 변화를 보여줍니다. 명청시기에 일반 유생들이 입었던 옷(袍)의 모양과 색깔은 도사 복식과는 서로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검소하고 단정하였습니다.
북송 시기에 유가 학술(儒術)을 부흥하려는 여론이 나타났습니다. 진종(眞宗) 황제는 유가 학술을 숭상하려고 노력하였고 교육제도를 조금씩 개혁하였습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많은 관원이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고 유가 학술을 존중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젊은이들도 유가 학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인종(仁宗) 시기에는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선명하고 유가 학술을 배운 관원들을 과거시험에서 뽑았습니다. 예를 들어 장재(張載)도 불교와 도교 서적을 공부하다가 범중암의 지도를 받은 뒤부터 유가 학술을 공부하였다고 전합니다. 석개(石介, 1005-1045)가 가르쳤던 맹씨 학생이 처음에는 도사 복식을 입었으나 나중에 유가 학술을 이해한 뒤에는 도사 복식을 찢어버리고 유가 복식을 입었다고 합니다.(予向以春秋授諸生學中,孟生衣道士服,升吾堂上,預諸生列,受吾説焉,日薰灼乎聖人之道,久之,相説以解,於是大寤聖人之道一出於孔子,遂棄其師,事吾儒師,裂其服,被吾儒服,斥其禮,行吾儒禮,擲其書,讀吾儒書。)
손복(孫復, 992-1057)은 범중암과 부필의 추천을 받아 경력 2년(1042)에 국자감 직강(直講)이 되었고 석개(石介, 1005-1045)는 23살에 범중암의 지도를 받고 26살(1030)에 진사에 급제하고 31살에는 손복을 따랐습니다. 손복은 「유가의 굴욕(儒辱)」을 짓고 불교와 도교가 유가와 동등하게 대우받는 삼교 합일(三敎合一)을 비판하였습니다. 석개는 「괴설(怪說)」 3편을 지어 중국의 유가 중심이 정상(常)이고 이를 벗어난 불교와 도교를 비정상(怪)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특히 제2편에서는 양억(楊億, 974-1020)이 40년 동안 문단을 주도하면서 유가 학술을 무시한 비정상(怪)이며 경박하고(淫巧) 거짓(浮華)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석개의 의심스러운 죽음에는 정치적 원인이 있었습니다.(今天下有楊億之道,四十年矣。……俟楊億道滅,乃發其盲,開其聾,使目唯見周公、孔子、孟軻、楊雄、文中子、吏部之道,耳唯聞周公、孔子、孟軻、楊雄、文中子、吏部之道。……今楊億窮妍極態,綴風月,弄花草,淫巧侈麗,浮華纂組,刓鎪聖人之經,破碎聖人之言,離析聖人之意,蠹傷聖人之道,……而爲楊億之窮妍極態,綴風月,弄花草,淫巧侈麗,浮華纂組,其爲怪大矣。)
양억(楊億 974-1020)은 밝고 곧은(耿直) 사람이며 당시 문단에서 서곤체(西崑體)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불교를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선사들을 만나 불교를 배웠습니다. 당시에 문단에서 양억과 함께 서곤체를 주도한 조형(晁迥, 951-1034)은 “선정 상태가 좋고(靜中好)” “선정이야말로 가장 좋은 수양공부(靜是眞消息)”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만년에 『법장쇄금록(法藏碎金錄)』 10권을 지었는데 모두 불교 경전을 읽으면서 얻은 생각을 적은 것이며 요약한 『도원집요(道院集要)』도 남겼습니다.
조형은 불교와 도교에 밝았고 삼교를 동등하게 여기는 삼교 합일에 가깝습니다. 그는 선정이 수양공부에 좋다고 널리 선전하였는데 나중에 신종 연간에 형성되는 성리학의 주정(主靜)공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정이천(程頤)이 24살(1056)에 태학에서 지어 올린 「안연이 좋아한 학술(顔子所好何學)」 글에서 본체의 정(靜 : 其本也眞而靜)을 나타내서 호원(胡瑗)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종 연간에 몇몇 지식인들은 서곤체를 비난하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였으며 서곤체 반대를 주도한 구양수(1007-1072)는 1057년 과거시험을 주관하며 서곤체를 모방한 답안지를 모두 탈락시켰습니다. 이때부터 불교와 도교의 배척과 유술(儒術) 숭상이 명확한 교육사상이 되었습니다.
주목할 것이 있는데 조형은 당나라 백거이(白居易)를 모델로 삼고 불교를 숭상하였습니다. 구양수는 당나라 한유(韓愈)를 모델로 삼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유술의 존숭을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백거이와 한유는 북송시기 학술 변화를 보여줍니다. 도통론(道統論)에서 맹자 다음에는 수나라 왕통(王通)이고 왕통 다음에는 한유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명도(程顥)와 정이(程頤)의 학술이 널리 전파된 뒤에는 맹자 다음에는 이정(二程)이라고 재평가하고 한유를 떨어뜨렸습니다.
중국에서 옛날에 젊은이들이 되고 싶은 사람은 유(儒)와 협(俠) 두 종류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을 놓고 고자와 다르다고 다투었던 것도 사실상 유협(儒俠) 논쟁이며 당나라 이백(李白)의 「협객행(俠客行)」은 협(俠)의 모습을 잘 나타냅니다. 협(俠)은 정의를 알고 용기를 갖고 무예를 갖추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유(儒)가 글을 배워 출세하면 재상이 되고 협(俠)이 무예와 지략을 길러 출세하면 장군이 된다는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북송시기부터 청나라 말기까지는 무인보다 문인이 우대받았고 장군조차 문인 관원이 맡았습니다.
유(儒)는 청탁(淸濁)을 불문하고 장점은 정의(義理) 가치관을 잘 따지는 것이며 가장 큰 단점은 이랬다저랬다 말과 행동을 바꾸는 경박(輕薄)한 인품이며 오대(五代)시기 관원들이 잘 나타났습니다. 물론 협(俠)의 가장 큰 단점은 걸핏하면 칼을 빼들고 싸우는 반란이고 『삼국지』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합리적인 의리보다는 종교와 미신을 두루 믿기에 삼교 합일에 가깝습니다.
얼마 전에 고려와 거란 전쟁 연속극에서도 고려 장군들이 지략이 뛰어나고 용감하고 병졸과 백성 모두 용감하였던 것은 바로 협(俠)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기 무신정권도 협(俠)을 잘 보여줍니다. 고려시기 무신정권에서 살았던 이승휴 선생(1224-1300)은 삼교 합일을 주장하였는데 북송 초기의 삼교 합일과 닮았습니다.
조선시기에 임진왜란을 겪고 물리치는 과정에서 선조 임금이 고려 시기와 비교하면서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 조선 사회는 협(俠)이 아니고 유(儒)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도 유(儒)에 가깝습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아이들이 동네 놀이에서 막대기를 들고 칼싸움하였다고 풍속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1953년 전쟁이 멈춘 뒤에 아이들도 동네에서 전쟁놀이를 많이 하였으나 현재는 없어졌습니다.
지난 12월 3일 내란사건에 가담한 군인들의 행동을 보면 정의감이 강한 협(俠)도 더러 있으나 대체로 우유부단하고 경박한 유(儒)에 가깝습니다. 더구나 법대를 졸업한 정치인들이 법과 원칙을 내세워 다투는 모습과 이들의 정의감과 용기 및 실행능력을 보면 경박한 유(儒)에 가깝고 조선시기 성리학자들이 의리(義理)를 놓고 당쟁을 벌이는 것과 닮았습니다. 오히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던 정치인들과 민주화를 주창하는 시민들이 협(俠)에 가깝습니다. 과거에 김대중 대통령도 오죽하면 지식인(儒) 용기 부족에 대하여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탄식하였답니다. 사실상 용기 있게 행동하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대안은 쉽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어떤 외적 침략보다 위험합니다. 적은 숫자의 젊은이들이 학교 교육에서 배우는 것은 문과와 이공계를 불문하고 모두 문인(文人)에 해당하며 법대와 의대에 입학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을 많이 고용하여 구제하려면 전문적인 학식과 기술을 기르고 또 모험심과 용기를 갖고 기업가가 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북송시기 도교 숭상과 미신 활동을 보면 국가 정치에 종교를 이용하는 것은 자제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