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시기 성리학 형성과정과 신법 반대 및 당쟁
2025년 8월 19일
요즘 특검에서 반란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쇠퇴라고 걱정하고 어떤 사람들은 평등민주주의가 쇠퇴한다고 걱정합니다. 1970년대부터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정치경제 민주화를 외치다가 다쳐서 병 들거나 희생되었습니다. 1953년 정전 이후 베이비붐 시기에 태어난 많은 인구에서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고 이들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커다란 역사를 펼쳤고 지금은 민주정치를 당연히 알고 부유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경제발전과 민주화운동 두 가지는 한국 전쟁 이후에 펼쳐진 커다란 시대의 이야기(Grand History)가 되었습니다. 경제발전과 민주화운동의 대역사(大歷史) 시기에 동참한 당사자들이 당시를 회고하여 사실을 따지고 가치를 평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 사회와 세대를 위하여 옳던 그르던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 학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늙어 죽으면 안 됩니다.
한국 대역사 시기를 논의하면서 중국 송나라와 조선의 성리학을 닮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발전은 신종과 왕안석의 신법 실행, 민주화운동은 신법 반대론자들의 유학적 가치 실현(성리학 형성과정)과 닮았습니다. 북송 시기에 정책(왕안석 신법) 찬반이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다시 원한이 되어 상대방을 일망타진(싹 쓸어버려!)하는 당쟁으로 나갔습니다. 당쟁 속에서 성리학이 형성되었으나 결국 당쟁 때문에 송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또 성리학 가치를 실행하려다가 당쟁과 사화가 빈번하였던 조선 시기를 거울 삼아 이준경(李浚慶, 1500-1572) 선생의 말처럼 당쟁을 답습하면 안 됩니다.
당나라 멸망한 뒤에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 역사를 돌아보면,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나서 당시의 정치사회 문제와 도덕윤리 가치를 가장 치열하게 논쟁하고 당쟁을 일으켜 죽기 살기로 싸웠던 시기는 북송 중후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 환경도 중요하지만 출중한 인물들이 적시에 나타나서 가급적 투명한 논쟁을 벌이고 너 죽고 나 살자는 당쟁을 일으켰고 여기에서 학술이 형성되고 미래 사회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의 시대 환경은 신종과 왕안석의 신법 실행이고 실행하던지 반대하던지 주연 배우들은 바로 인종 가우(嘉祐) 2년(1057) 과거시험에 합격한 진사 출신의 젊은 관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신법과 성리학과 문학은 중국 후세와 동아시아 각국에 큰 영향을 주었고 현재도 그들의 학술과 문학을 연구하여 기억을 다시 짜고(편집하고) 있습니다.
인종 가우(嘉祐) 8년(1063) 전국 인구는 1,246만 호(戶)이고 남자 어른(丁男)이 2,642만 명이었습니다. 가우 2년(1057) 구양수가 주관한 과거시험에 40만 명이 응시하고 합격자 388명입니다. 「형상과 충후에 관한 올바른 견해(刑賞忠厚之至論)」 책론(策論)에 대답하여 합격한 인물들입니다. 장형(章衡), 두변(竇卞), 나개(羅愷) 3명이 앞이고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 증공(曾鞏), 증포(曾布), 증모(曾牟) 삼 형제와 사촌 증부(曾阜), 장재(張載), 정호(程顥), 여혜경(呂惠卿), 장형(章衡)의 삼촌 장돈(章惇), 왕소(王韶) 등 걸출한 인물이 합격하였고 나중에 9명이 재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연구자들이 돌아보면서 1057년 과거시험 합격자들은 1천 년 과거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합격자(千年龍虎榜)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성리학은 북송 초기에 『춘추』의 의리(義理)를 연구하던 학풍이 경력 연간의 신정(新政)이 실패한 뒤에는 점차 『주역』의 의리 연구로 전환되었습니다. 『춘추』의 의리 연구는 처음에는 학자 개인이 연구하다가 나중에 국자감 교육을 통하여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북송 인종 경력(慶曆) 연간의 신정(新政, 1043-1045년)이 실패한 뒤에 관원 출신 학자들은 불교와 도교를 배우며 수양공부를 연구하고 동시에 『주역』의 의리를 연구하였습니다. 신종 희녕 연간(1068-1077)에 『주역』 연구를 주도한 학자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이며 두 사람은 서로 학술을 존중하며 가깝게 지냈고 1077년 음력 7월 5에 소옹, 11월 17일에 장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안석 신법을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다가 퇴출당한 관원과 학자들은 하은주 삼대 왕도정치의 의리를 연구하였는데 성리학의 철학연구 방향이 되었습니다. 특히 왕안석이 연간 이자율 20%를 실행한 청묘법은 국가가 자금을 민간에 풀어 이자 수입을 얻어 재정수입에 보태고 또 부유한 상인과 고위 관원들의 고리대를 억제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리대 수익을 얻고 있던 고위 관원들과 부유한 상인들의 여론에 따라 반대론자들은 민간에서 실제 이자율이 40%까지 높다고 비난하며(사마광) 20% 실행을 주장하였고 일부 극성 반대론자(장재 정전법 주장)는 더 낮추기를 주장하였습니다.
20% 연간 이자율은 한대와 당대에도 국가가 정한 이자율이며 조선시기에도 법정 이자율입니다. 정전제처럼 10%로 낮추든가 한당시기처럼 20% 유지하든가 아니면 송대 일반 자금시장의 고리대를 방치하던가 이를 둘러싸고 일어난 이자율과 토지소유제 논쟁은 성리학의 정치경제 사상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이 국가의 무위자연을 주장한 것을 보면 고리대를 그대로 놔두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성리학자들이 천리와 인욕을 구분하고 도덕성을 높이자는 취지와 무위자연 뜻은 일반 평민의 경제적 고통을 외면한 경제사상입니다. 조선시기 양반 지주들의 대토지 소유와 고리대는 성리학의 실제 모습입니다.
사마천은 전국시기에 전쟁의 근본 원인이 경제적 이익 추구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진나라는 작등제(爵等制)를 실행하여 적군을 얼마나 많이 죽이느냐에 따라 토지 분배 면적을 늘려주었습니다. 일반 백성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적군을 죽이고 성벽에 기어올라갔던 까닭은 돈 때문이며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사마천은 상업 사회를 만들어 연간 이자율 20%를 유지한다면 상업을 경영하여 100만전을 벌어 대출하면 연간 20만전을 앉아서 벌 수 있습니다. 20만전은 당시 작은 봉국(封國)을 받은 왕(王)의 연간 수입에 견줄 수 있었기에 작위 없는 왕(素封)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여 돈을 벌기보다는 상업을 경영하여 돈을 버는 사회를 만들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20% 연간 이자율에는 성리학자들이 모르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나라 1970년대에는 고리대가 유행하였는데 월 이자율이 10%이고 연간 이자율이 120%였습니다. 1980년에도 은행 이자율이 10%가 넘었습니다. 10억을 은행에 맡기면 1년에 이자 1억원을 받았는데 어느 대기업 직장인 연봉보다 높았습니다. 요즘에는 은행 이자율 2-3%입니다. 따라서 자본 소득보다는 노동 소득이 높아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맹자의 말을 빌리면 토지소유 세율(농업 소득세)이 중국은 10%(1/10)이고 예맥은 5%(1/20)라고 비교하며 국가 경영에는 10%가 필요하다고 당연히 여겼습니다. 예맥이 5%라면 고조선 농업 소득세율이 5%이었을 것이며 물론 별다른 국가 재정수입도 있었겠지요.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국가체제 경쟁에서 세율이 높은 쪽의 군사력이 컸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국은 전쟁터에서 돈 궤짝을 열어놓고 전투하고 소국은 애국심과 용기를 고취하였습니다. 현재 러시아와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참여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 나은 결과를 얻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주역』의 의리 연구자들이 정치세력화된 계기는 두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신종 희녕 연간에 왕안석 신법 실행을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한 다수 관원이 희녕 2-4년(1069-1071년)에 관직에서 강제 퇴출된 것입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젊은 관원들이 철종이 즉위한 뒤(1085년) 복직할 때까지 적어도 15년 이상 재야에서 강학에 종사하면서 의리학을 형성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종이 원풍 연간에 왕안석을 낙향시키고 신법 생행을 직접 관장하면서 반대 여론을 억압하려고 원풍 3년(1080)에 소식(蘇軾)을 붙잡아 어사대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던 문자옥 사건입니다. 소식의 시문 사건은 당쟁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리학이 북송 신종 연간과 철종 연간에 형성되었는데 당시 정계과 관계에서 일어난 대립상황과 당쟁 격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송 신종(神宗, 1048-1085년 4월 1일)은 20살(1068년)에 즉위하기 이전부터 서북쪽 서하(西夏)를 견제하거나 붕괴시키려고 섬서(陝西)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국가 재정을 늘리려고 의도하였습니다. 신종의 의향에 부합한 인물이 왕안석(1021-1085년 5월 21일)이었습니다. 신종이 1068년에 왕안석을 등용한 뒤 두 사람은 27살 나이 차이가 있으나 1085년 4월과 5월 사이에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서로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신법의 핵심은 청묘법이며 국가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민간사회에서 성행하는 고리대를 일부 대체하려고 국가가 기금을 풀어 연간 20% 이자를 받는 것입니다. 또 매년 이자 수입을 예측할 수 있으니까 미리 이자 수입을 담보로 상당한 금액을 차용하여 지출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기금이 고갈되고 차용금액이 이자 수입을 초과하였습니다.
신종 황제는 궁중에서 어머니(高滔滔, 1032-1093, 英宗의 皇后)와 할머니(曹氏, 1018-1079, 仁宗의 皇后, 高滔滔의 姨母)의 반대를 무릅쓰고 또 궁정(宮廷)에서는 훈신들의 저항과 반대를 달래면서 신법을 실행하였습니다. 왕안석도 신종 황제의 실행 의지를 떠보려고 출근하지 않은 적도 있으나 신종 황제가 달래서 출근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안석으로서는 임금의 의지를 믿고 임금의 뜻 곧 신법을 과감하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종과 왕안석에 대한 당시와 후세의 평론은 왕안석을 주어로 삼아 서술하였으나 실제 주인공은 신종입니다. 신종에게는 황제 무과론(無過論)을 적용하고 모든 잘못과 폐해를 왕안석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신종 희녕(熙寧, 1068-1077) 초에 신종은 왕안석이 설득하는 대유위(大有爲)에 동의하고 신법(新法)을 강행하였습니다. 30대 40대 일부 관원들이 원로 관원들의 교사(敎唆)를 받아 왕안석 신법의 재정확대를 반대하고 국가정책의 무위안정(無爲安靜)을 주장하다가 중앙관직에서 지방관으로 좌천되거나 물러나 낙향하였습니다. 신법 반대론자 관원들은 신종 원풍(元豐, 1078-1085) 연간에도 지방 관원이 되거나 고향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신법을 반대하는 재야 여론을 형성하였고 철종 즉위 이후에야 관직에 복직하였습니다.
신종이 서하(西夏)와 전쟁에서 패전하여 화병으로 죽자(1085년 4월 1일) 신종의 어머니 고황후(高滔滔, 1032-1093)가 신종의 여섯째 아들 철종(1077-1100)을 황제 자리에 앉히고 원우(元祐, 1085-1094) 연간 9년 동안 수렴청정하였습니다. 고씨 황후는 신종이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시행할 때부터 신법을 반대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씨 황후는 사마광과 소식을 등용하여 신법을 폐기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1069년부터 1085년까지 15년 넘게 실행한 신법은 이미 일반사회에 뿌리를 내려서 신법을 폐지하더라도 1068년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었기에 신법 폐지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마광과 소식은 경세 지식이 부족하고 신법을 대체할 대안도 없었기에 신법 철폐가 오히려 국가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였습니다. 철종은 할머니 고씨 황후가 1093년 9월 26일 세상을 떠나자 신종의 신법을 계승하겠다며 소성(紹聖, 1094-1098) 연호로 바꾸고 신법 관원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북송시기 당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사마광과 소식이 권력을 잡고 정호(程顥)에게도 중앙정부 관직을 주었으나 부임하는 길에 사망하였습니다. 정이(程頤)도 숭정전 설서(崇政殿 說書) 임시직을 받았으나 소식의 배척을 받자 이정(二程) 형제의 문인이었던 관원들이 소식과 싸웠고 결국 정이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정(二程)과 이소(二蘇) 사이에도 배척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따라서 철종 원우(元祐) 연간과 소성(紹聖) 연간에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이 격화되었고 여기에 소식과 정이의 갈등도 더하여 국론이 삼분오열되었습니다. 남송 시기에도 신종과 왕안석 신법을 둘러싼 정치 평론이 당쟁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주희가 선별한 소위 북송 오자(五子) 가운데 핵심 인물 장재(張載)와 이정(二程) 형제를 보면, 신종 연간에 신법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고 저항한 사람은 장재(張載, 1020-1077)와 장전(張戩, 1030-1076) 이장(二張) 형제입니다. 아우 장전이 24살(1054)에 진사가 되어 형 장재(1057년 進士 합격)보다 먼저 관직에 나갔고 신법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기에 곧바로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장재도 아우 장전의 연좌를 두려워 수습 관직에서 스스로 사퇴하였습니다. 당시에 수습 관원이던 정호(程顥, 1057년 進士 합격)는 신법을 반대하다가 왕안석에게 지방 관직을 요구하며 관직 거래를 시도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였으나 곧바로 낙향하고 희녕 5년(1072)부터 아우 정이(程頤)와 함께 강학하였습니다. 이장(二張) 형제와 이정(二程) 형제는 가깝게 지냈고 과거시험을 보던 1057년에는 장재가 수도 개봉(開封)에서 『주역』을 강학하였고 이정 형제가 찾아가 서로 학술을 토론하였다고 합니다.
신종 연간에 영향력 있는 몇몇 인물을 보면, 구양수(歐陽修, 1007-1072, 1030년 진사 합격)는 신종이 즉위한 뒤에 청묘법의 일부를 반대하고 관직을 사양하며 다시는 신법을 평론하지 않았습니다. 소옹은 그가 관직을 사퇴하고 신법에 개입하지 않도록 충고하였습니다. 그는 젊을 때 불교와 도교를 극력 배척하였으나 늙어서는 스님과 도사를 불러서 배웠습니다. 주돈이(周敦頤, 1017-1073, 1036년 蔭補 지방 관원)는 낮은 지방관을 지내며 중앙정치에는 영향력이 거의 없습니다. 소옹(邵雍, 1012-1077년 양력 7월 27일)은 장돈(章惇)을 일찍부터 사귀고 왕안석 신법을 이해하였는지 찬반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 1038년 진사 합격)은 왕안석(1021-1086, 1042년 진사 합격) 신법 실행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반대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다가 결국 왕안석에게 관직 사퇴를 부탁하고 신종 황제의 재가를 받아 사퇴하였습니다. 사마광은 소옹과 아주 가깝게 사귀면서 1062년에는 몇몇 사람과 함께 돈을 모아 집을 지어줄 만큼 후원하고 자주 찾아가 물었습니다.
소옹이 1049년 낙양으로 이사 온 뒤에 이정(二程) 형제의 아버지(程珦, 1006-1090)는 두 아들을 데리고 소옹 집에 찾아와서 사귀었습니다. 형제가 소옹을 찾아간 시기는 1056년(程顥 24살) 개봉 국자감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정호가 이듬해 진사가 되기 이전이었습니다. 형제는 이때부터 소옹이 죽는 날(1077년 양력 7월 27일)까지 스승으로 모시고 『주역』을 배웠습니다. 정이(程頤)는 나중에 주광정(朱光庭, 1037-1094)과 함께 소옹을 찾아와서 깊이 토론한 뒤에 소옹의 제자가 되었고 소옹의 『주역』 연구 수준이 주돈이보다 높다고 감탄하고 정성껏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소옹이 죽을 때는 정이(程頤)에게 이천(伊川) 선영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죽은 뒤에는 정호가 관중지역의 여론에 따라 사마광에게 소옹의 시호를 중앙정부에 요청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신종이 세상을 떠난 원풍 8년(1085)에 하남부(河南府) 지부 한강(韓絳)이 조정에 소옹의 시호를 요청하고 구양수 셋째 아들 구양비(歐陽棐, 1047-1113)가 태상박사(太常博士)로서 시호 강절(康節)을 정하고 철종 원우(元祐) 초년에 내렸습니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이소(二蘇, 1057년 進士 합격) 형제도 신법을 반대하여 지방 관원으로 빙빙 돌며 신법을 비난하였습니다.
북송시기 당쟁이 표면에 드러난 것은 신종이 소식을 붙잡아 어사대(御史臺, 烏臺)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결심한 소위 오대시안(烏臺 詩案)입니다. 소식은 신종과 왕안석이 신법을 실행하던 희녕 초년부터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때부터 신종은 소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신종은 30살(1078)에 왕안석을 낙향시키고 원풍 연간(1078-1085)부터 직접 신법 실행을 관장하는 데 반대 여론이 컸습니다. 그래서 신종은 반대 여론을 억압하려고 소식(蘇軾)을 붙잡아 죽이려던 문자옥(文字獄)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소식 소철 이소(二蘇) 형제는 과거시험 보던 1057년 병이 나서 시험에 참가하기 어렵자 중앙정부에서 시험 날짜를 늦추어줄 만큼 기대가 컸습니다. 또 소식이 인종 황제에게 행정 개혁을 건의하여 미움을 샀기에 합격 등수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소 형제는 인종 가우(嘉祐) 2년(1057) 과거시험에서 구양수와 매요신(梅堯臣)의 칭찬을 받고 가우 6년(1061) 제과(制科) 시험에서는 사마광의 칭찬을 받아 명성이 높았습니다. 황실에서도 신종 황제의 할머니 조씨 황후는 인종 황제가 소식과 소철 두 형제를 후손 황제들에게 물려줄 재상감이라고 칭찬하였다고 감쌌습니다.
소식은 원풍 2년(1079)에 청묘법을 비방하는 시문(詩文, 소식이 처음 인정한 1073년 「山村五絶」)을 지었다고 탄핵을 받아 3년(1080) 7월에 붙잡혀 8월에 어사대(御史臺, 烏臺) 감옥에 갇혔습니다. 신종이 소식을 죽이려고 결심하였으나 할머니 조씨(曹氏) 황후와 왕안석 또 장돈(章惇, 1035-1106) 등이 구명하여 12월 29일 판결에서 사형을 면하였습니다.
소식은 풀려난 뒤 황주(黃州) 정혜원(定慧院)에서 가족 20여 명과 기거하고 사실상 폐인처럼 좌절하다가 조금 정신을 회복한 뒤에 「적벽부(赤壁賦)」 등 시문을 남겼습니다. 소식과 연루된 관원들이 처벌받았고 장방평(張方平), 사마광(司馬光), 범진(范鎮) 등도 벌금을 냈습니다. 이때부터 신법 실행 관원과 반대 관원의 관계는 정책의 찬반을 넘어 원한이 쌓인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철종 연간에는 상대방을 일망타진하여 없애려는 당쟁으로 격화되었습니다.
북송 말기에는 유학자들의 수양공부 취지와 인격 모델이 바뀌었습니다. 인종 연간과 신종 연간에 재야에서 유행한 주류 정치사상은 무위안정(無爲安靜)이며 신종과 왕안석의 대유위(大有爲)를 반대하였습니다. 구양수, 소옹, 주돈이, 사마광 등 모두 한편으로는 경세(經世)에 참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무위안정(無爲安靜)에 부합하려고 쇄락(灑落)을 추구하는 주정(主靜) 공부를 선호하였습니다. 쇄락은 『논어』의 증석(曾晳)을 인격 모델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장(二張) 형제와 이정(二程) 형제 모두 주정(主靜) 공부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소(二蘇) 형제 가운데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소황(蘇黃) 2인이 쇄락을 강조한 강서 시풍(江西 詩風)을 일으켰습니다.
이정(二程) 형제는 신종 희녕 연간에 신법을 반대하였고 신종이 원풍 연간에 신법을 직접 관장한 뒤에는 불교와 도교의 폐해보다 오히려 왕안석의 폐해가 더 크다고 인식하고 왕안석의 신학(新學) 반대에 앞장섰습니다. 이소(二蘇) 형제 등 신법 반대론자 대다수가 불교와 도교에 빠지는 것을 보고 이정 형제는 유가의 주경(主敬) 공부를 새롭게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정(二程) 형제는 왕안석이 국자감의 교육제도를 바꾸고 가르쳤던 신학(新學)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정이(程頤)의 학술 태도 변화입니다. 그는 만년에 쇄락보다는 이연(怡然)을 강조하고 인격 모델도 증석에서 안연(顏淵)으로 바꾸었습니다. 정이는 일찍이 24살(1056)에 태학에서 수학할 때 호원(胡瑗)이 안연이 좋아한 학술이 무엇인지를 논술하라는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 과제를 내었고 정이가 『맹자』와 『중용』을 인용하여 “學必盡其心,盡其心,則知其性,反而誠之,聖人也”라고 글을 지어 올려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인종과 신종 연간에는 주정(主靜) 공부가 크게 유행하였고 신종 원풍(元豐, 1078-1085) 연간부터 이정 형제가 주경(主敬) 공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호(程顥, 1032-1085)는 철종 원우(元祐, 1086-1094) 연간과 소성(紹聖, 1094-1098)의 당쟁을 겪기 이전에 사망하였습니다. 정이(程頤, 1033-1107)는 철종 연간의 당쟁을 겪은 당사자로서 안연(顏淵)을 모델로 삼아 이연(怡然)의 주경공부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남송 시기에 주희는 주경공부에서 정이의 이연(怡然)에 엄숙함을 더하여 경숙(敬肅)을 주장하였습니다.
북송시기에 학자들의 태도가 증석의 쇄락(灑落, free and easy)을 추구하는 주정(主靜)에서 안연의 이연(怡然, satisfied and happy)을 지향하는 주경(主敬)공부로 바뀌었습니다. 남송시기에 주희가 주경공부의 이연(怡然)을 경숙(敬肅, reverent and serious)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마도 남송시기에는 정치사회가 혼란한 위기의식이 컸기 때문입니다. 쇄락, 이연, 경숙 같은 태도는 학자 개인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서 유행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화 취향(cultural taste)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Pierre Bordeaux(1930-2002), Distinction: A Critical Judgement on Taste(1979)〕
북송시기에 주정(主靜)공부가 주경(主敬)공부로 바뀐 배경에는 도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또는 무위안정(無爲安靜)을 배우고 모방하던 학풍에서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유가의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유위(有爲) 학풍으로 조금 전환하려는 의지가 담겼습니다. 남송시기 주희는 정이(程頤)의 태도를 계승하여 조금 더 엄숙한 주경공부를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북송시기 쇄락이라는 태도가 남송시기에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참고 자료 :
북송 張伯端의 王安石 新法 반대와 氣質之性 및 張載의 漸復三代와 氣質之性
2025년 6월 24일
張載 「春耕圖」(16.5×16,2cm,1227年發見)
여자는 갓을 벗고 앉아 있고 남자는 갓을 쓰고 풀을 뽑는지 흙을 일구는지 엎드려 일하고 있습니다. 초박 정자 그림은 지워졌는데 누군가가 앉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