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법문도 누군가에겐 상처 될 수 있어 - 먼저 용서 구하고 자신 낮추는 수행하길
법문이 끝난 후 친교시간에 제가 스스럼없이 한 얘기에 상처를 입은 분이 계십니다.
누구나 상처를 입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작정하고 나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를 받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닌데 크게 상처를 입는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과거 상처가 덧났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누군가와 부딪쳐도 눈 한번 흘겨보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미 어깨에 상처가 있는데 그 부위를 누군가가 치고 지나가면 “아야” 소리와 함께 거친 말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정신적인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과거에 입었던 상처가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조금만 건드려도, 당한 사람은 그게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상처를 알 수 없는 이들은 그의 과민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다가 눈물 흘리는 시청자가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꾸며낸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고, 화면을 뜯어보면 기계밖에 없는데 그걸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연속극에 푹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가상현실이 실제 자기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꿈을 꾼다거나 귀신을 보는 것 역시 같은 현상입니다. 귀신을 본 사람은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본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든지 잡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하늘에서 누군가가 얘기해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3자가 볼 때는 그것은 환영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절대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분별심이 생겨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극에 이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그 점을 지적하면,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얘기하면 받아들이지만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극점에 왔을 때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행차원에서 보면 이때 받아들여야 한꺼풀 벗겨지는데, 그게 안 받아들여지지요. 그래서 저는 보살님들이 보낸 편지를 보면서 옳고 그름을 따져 시비하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때 그것을 깨버리려고 한다면 원수 될 각오를 해야겠지요.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이 작은 상처에도 더 크게 상처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때 한 생각을 돌이켜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상처 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고, 저 사람은 그냥 자기 식대로 말한 건데 나한테 상처가 된 거지.’ 이렇게요. 또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 때문에 상대가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면 ‘내가 뭐 어쨌다고….’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은 상처 주려는 마음이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제 나름으로는 좋은 법문을 한다고 하지만, 어떤 분은 제 말 때문에 또는 제가 든 예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 보고 “스님 말씀 듣고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하면 “그건 당신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요” 하면 안 되겠지요. “아이고! 그랬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이 상처라는 게 다 주관이기 때문에 입었다면 입은 거예요. “내가 언제 줬는데?”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입었다면 입은 겁니다. 이런 점만 우리가 고려한다면 아마 살기가 훨씬 더 편해질 겁니다.
부부지간에도, 이 절 안에서도, 모두 잘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잘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잘 안 되는 상대편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고, 역시 잘 안 되는 자기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안 되는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면 자학 증상이 생기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합리화하는 것도 안 됩니다. 그렇게 자기를 조금씩 가꿔나가는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 법륜 스님(정토회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