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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과 송강정

작성자이계양|작성시간11.08.31|조회수234 목록 댓글 0

정철과 송강정


1. 정철의 생애

鄭澈의 아호는 松江이다. 송강은 정철이 유년시절을 보냈고, 그가 정치적으로 불우한 일을 당할 때마다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에 위치한 강의 이름이다. 강의 이름을 죽록천이라고도 하였으니, 오늘날 송강정에 걸려 있는 다른 현판의 이름이 죽록정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아마도 이 강의 이름에서 호를 취하였을 것이다. 정철은 자를 계함(季涵)이라고 하며 임정(臨汀), 칩암(蟄庵) 등의 별호도 사용하였다. 본관은 경북 영일이며 고려 때의 균지(均之)가 그의 원조이다. 정철의 고조부 연(淵)은 병조판서, 증조부 자숙(自淑)은 금제군수를 지냈으나 조부 위(潙)와 부친 유침(惟沉)은 사환(仕宦)을 못 지냈다.1)

정철의 부 유침은 효우가 뛰어났는데 대사간을 지낸 죽산 안팽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사남이녀를 두었다. 그 중 정철은 막내 아들로 1536년(병신년) 윤 12월 6일에 한양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송강의 백형 자(滋)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이 되었지만, 을사사화 때 연루되어 경원지방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장독(杖毒)이 덧나서 32세에 요절하였고, 중형인 소(沼)는 실의에 빠져서 그의 처가가 있는 호남의 순천으로 은거하였으며, 숙형인 황(愰)은 명종 때 군기사첨정에 음보되었다. 큰누님은 인종의 귀인이 되었으며 작은 누님은 종실인 계림군 유(瑠)의 부인이 되었다.

정철은 슬하에 오남사녀를 두었다. 적출이 사남삼녀이고 서출이 일남일녀였다. 적출의 장자인 기명(起溟)은 진사로써 31세에 요절하였으며, 차자 종명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강릉부사를 지냈는데 자손이 제일 번창하였다. 종명의 증손인 호(澔)는 영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삼자 진명은 진사를 하였고, 사자인 홍명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대제학을 지냈다. 장녀는 이기직에게, 차녀는 최오에게, 삼녀는 목사(牧使)인 임회에게 출가시켰다. 서출인 지명은 함흥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뒷날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딸은 무인인 권경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1) 修學期 1세~27세

정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대개의 유학자가 그렇듯이 거의 알 수가 없다. 대개가 그렇듯이 정철 역시 신빙성이 희박한 천재적 징후가 행록에 보일뿐, 연표에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유용한 기록은 정철의 누이가 인종의 숙의였던 까닭으로 궁궐출입이 자유로왔고, 명종과는 어릴적 남다른 친분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어린시절 특권을 누렸던 정철은 집안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게된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었던 정철의 아버지 유침은 정철이 16세 되던 해인 명종 6년에 원자가 태어났기 때문에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유침은 어버지 위(潙)의 유택이 있는 창평 당지산으로 이사하여 정거하여 호남인이 되었다. 이 때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창평에 왔고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공은 영특 준수하고 숙성하며 총명하심이 사람에 지나쳐 10세 전에 이미 문의를 다 통달하시었다. 공이 일찍이 말씀하되 “을사사화를 만나 가족이 탕진되어 부형이 자제 교육에 뜻을 두지 않으므로 그렁저렁하다가 배움이 실기되어 성현의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고 자라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셨다.2)

정철의 문학적 재능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것을 보더라도 위의 기록이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철은 자신의 학문적 재능 위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사사받게 되었다.

공이 좀 자란 뒤에 기고봉 대승을 쫒아 근사록 등 서를 배워 학문의 방향을 알았고, 또 김하서 인후의 문하에 출입하여 항상 그 인품을 사모하고 대절을 칭도하며 그 출처의 바름이 근세의 유현으로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하셨다.3)

공이 조금 자라자 김하서 인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또 기고봉 대승을 쫒아 문학하였으며 또 우계 성선생, 율곡 이선생과 더불어 친교를 정하였으니 그 추향의 바름과 행검의 고결함이 대개 연원이 있었던 것이다.4)

하서 김인후나 고봉 기대승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학문적 깊이에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인정받고 있는 대학자이자, 선비이다. 이들로부터 사사를 받고 성산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수학기를 보내게 된 것이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아마 이 시기에 수련이 되어, 장차 불후의 작품들을 창작해 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임억령, 김인후, 기대승, 김성원, 고경명, 송순, 양응정과의 인연은 그가 우리 시가문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2) 登官居喪期 27세~40세

정철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문과별시에 장원하였다. 정철은 장원급제를 하였기에 정육품인 성균관전적으로 宦路 생활을 시작하였다. 머지않아 사헌부 지평에 除授되었는데, 이 때 정철에게 커다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경영군의 獄事가 있었다. 옥사의 내용과 처리는 아래와 같다.

명묘의 종형 경양군이 처가집 재산을 빼앗으려하여 서처남을 불러다 남몰래 죽여 형적을 없애려고 하였는데, 죽은 시체와 친척의 기송으로 인하여 옥사가 이루어지니 경양군 부자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공이 법대로하며 흔들리지 않으니 명묘가 사적으로 공에게 촉탁을 하되 “내 형이 장차 죽게 되었으니 원컨대 공은 관대히 용서하라”고 하셨다. 공이 끝내 승순하지 않고, 경양군 부자는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이것이 상감의 뜻에 거슬려서 한산한 말직에 폐치되어 수삼년 동안을 청반에 오르지 못하였다.5)

정철이 왕명을 거스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헌부 지평으로서 공정한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강직함을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1567년(명종 22년, 정철 32세)에 명종이 승하하였다. 10월에 옥당에 뽑혀 부수찬이 되었고, 11월에 수찬으로 제수되었으며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선출되었다. 호당에 선출되었다는 것은 장차 크게 등용하겠다는 선조의 의지를 내보인 것이고, 선조의 총애로 정철은 정치적 운신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정철은 35세 되던 해 4월에 아버님의 상을 당하여 복을 입었다. 정철은 37세 6월에 아버지의 복을 벗고, 환로에 나아가 직강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사간에 제수되었고, 38세 1월에 사헌부 집의를 제수받았으나 4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다시 복을 입었다.


3) 出仕와 치사의 반복기 40세~54세

선조 8년에 붕당이 형성되었으니 정철의 나이 40세였다. 정철은 40세 6월에 복을 벗고 사인을 제수 받았으며, 7월에 홍문관 직제학, 이어서 성균관 사성을 제수 받았다. 이 때 조정에는 붕당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고, 조정의 대부분의 유학자는 둘로 나뉘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철은 이러한 시배들과 화합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10월에 사간을 제수받았지만 사직하고 창평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친히 정철을 붙잡았지만 정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철은 致仕하여 창평으로 돌아와서 문학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정철은 40세 10월에 취사하여 청년 시절을 보낸 곳이자, 자신이 수학하였던 창평으로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정철은 45세 1월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하여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방백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다. 그리고 이 때 가사 관동별곡과 단가 훈민가를 지었다. 특히 훈민가는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순방하기를 유루없이 하였고, 교화를 숭상하고 착한 사람은 표창하고, 악한 사람은 징계하니, 백성들이 모두 정철을 크게 존경하고 숭상하였다.6)

46세 12월에 선조의 명으로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하였다. 정철은 관찰사로 부임하여서 도내 각종 세액과 부역의 수효를 총계하여 균일하게 상정하였다. 도내의 백성들은 이를 편히 여기고 정철을 추앙하였다.7)

47세 9월에 특명으로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정 예문관 직제학에 올랐다. 그리고 12월에 예조 참판을 제수받고, 함경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다. 48세 3월에 특명으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에 승진되었는데 탄핵을 받았다. 선조의 지나친 배려가 논핵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어서 4월에 지돈령부사를 제수받고, 6월에 동지성균관사를 제수받고, 다시 형조 판서를 제수받았다. 9월에 예조 판서를 제수받았는데 정철의 사람됨이 화내기를 좋아하고, 모가 났다는 간원의 논핵을 입었다. 또 정철은 강편기극한 사람으로 화를 만들어 사사로운 감정을 갚으려는 정상이 드러나서 파면해야 한다는 상소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일들을 선조는 용납하지 않았었다.

정철은 자신 때문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한 것을 보고, 네 번이나 사직하는 글을 올렸는데, 선조는 도리어 휴가를 더 주었다. 다시 소를 올려 면직을 원하였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49세 1월에 이이가 돌아가셨다. 8월에 자의금부사를 제수받았고, 대사헌을 제수받았다. 이 때 선조가 총마를 특사하였다. 출입할 때에 길가는 사람들이 정철을 가리켜 총마어사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조가 정철을 아끼는 특별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12월에 특명으로 승진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지 경연사를 제수받았다.

50세 4월에 정철은 차를 올려 충정을 진술하며 물러갈 것을 원하였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8월에 심의겸이 당파를 만들어 사림에 화를 끼친다는 이유로 상소를 받았고, 정철은 심의겸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양사의 논척을 입고 이름이 천부에 오르게 되니, 드디어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다.

정철은 창평으로 돌아와 가사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8)정철의 致仕는 그의 철학의 깊이를 가져왔고, 이는 문학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정철의 창평에서의 생활은 자연 속에서 완상하며, 호남의 명사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며, 이것이 호남가단의 기풍과 전통을 두루 계승하고 발전시켜 그의 시조와 가사 문학를 대단한 경지에 올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9)

이처럼 그의 致仕는 항상 문학적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였으니, 이것은 그가 맺은 호남과의 인연이 기여한 사실이다. 정철이 수학기를 보낸 곳이자, 致仕할 때마다 찾아온 성산은 어떠한 곳인가. 산자수려한 곳으로 곳곳에 누정이 건립되어 있어, 시인묵객이 시단을 형성하여 자연을 노래하고 수작하였던 곳이다.


4) 국난진충기 54세~58세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황급히 궁궐로 들어왔다. 선조는 정철의 충절을 높이 사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하셨다. 정철은 상소하여 사면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니, 드디어 직에 나아가서 위관의 책임까지 겸하게 되었다.

55세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받고 인성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56세 2월에 등대하며 건저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가 대답하지 않으니, 사직서를 올려 세 번에 이르니 이를 허락하였다.

정철은 건저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받았고, 이 때문에 양사의 탄핵을 받아 3월에 파직을 당하였고, 6월에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로 이배되고, 다시 강계로 재이배 되었다.

정철의 나이 57세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 해 9월에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받고 명을 받들어 남하 하였다. 이듬해 5월에 사은사로 명에 갈 것을 명받아 11월까지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런데 정철의 일행에서 왜군이 모두 물러갔다는 말이 나왔다는 모함을 받아 체임되어 강화 우사로 물러났다.

서기 1593년, 정철의 일기로 58세 12월 18일에 강화우사에서 졸하였다. 선조가 관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1594년 2월에 고양쇄원에서 장사하였고, 1665년(현종 6년) 3월에 충북 진천 지장산에 천장(遷葬)되었고, 1684년(숙종 10년)에 문청(文淸)이라 시호되었다.


2. 정철의 문학

정철의 문학은 크게 국문시가와 한시로 대별할 수 있겠고, 국문시가는 다시 장가과 단가로 나뉘어질 수 있겠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여 이 세부분에 있어서 모두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이것은 그 당시의 평이나 현재의 평에서 여실히 입증된 부분이다.

미인곡에 대한 김만중의 평이나, 최규수의 논문에 드러난 그의 시가들의 수용양상을 살펴보더라도 당시나 그 이후로 정철의 시가들만큼 회자되었던 예가 드문 것이 그 증거이다. 또한 오늘날 전남 담양지역이 가사문학권이 될 수 있었던 데에도 그의 공은 커다랗던 것이다.


1) 송강정

정철의 유적지로 담양 이외의 곳으로는 삼척의 '죽서루'에 있는 시비와 묘 송강사(松江祠)(지방문화재 제9호,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은골 - 정송강사 : 송강의 위패를 모신 곳. 유물전시관, 신도비각, 송강묘소 등이 있음) 그리고 송강 정철 선생시비(송강사 입구소재 : '사미인곡' 일절 새김)가 있다.

하지만 정철의 자취가 흠뻑 젖어 있는 유적지로는 송강의 3대 유적지라고 할 수 있는 송강정, 환벽당, 식영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중 송강정은 정철이 직접 기거했던 곳으로 그의 시가문학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송강정(松江亭)은 담양읍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다. 그러나 선조 17년(1584년)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쟁으로 물러나와 초막을 짓고 살던 때에는 竹綠亭이라고 불리웠던 것 같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송강이라 하기도 한다.)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부르므로 정자도 오래 전부터 죽록정이라고 불러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정자 정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도 죽록정을 중수하면서 정면에 걸려있던 죽록정을 측면으로 옮기고, 새로이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을 것이다.

정철이 창평에 우거할 때마다 찾았던 송강정은 그의 죽음과 함께 버려지게 되었다. 그의 사후 200여 년이 지나,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져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철의 후손들이 언덕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는, 영조 46년(1770)에 다시 정자를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에 세운 것이다. 그때 그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송강정이 중수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송강정 중수기는 아래와 같다.


松江亭 重修記(송강정중수기)

내가 어렸을 때에 나의 선조 문정공 송강 선생 연보와 유고 등을 손을 씻고 읽었다. 그 뒤에 비로소 송강정이 담양 땅에 있다는 것과 숙정사라는 시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또 우계 선생 유집을 읽다 보니 차송강운이라는 시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 뒤로는 밤낮으로 몇 번씩 되풀이하여 읽고 감모하는 마음이 갈수록 새로워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한번 송강정 위에 올라가서 우리 선조의 유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랬더니 어느 분이 말하기를 정자가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어, 누루중총이 빽빽하게 들어앉았으니 보잘것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결기가 나서 말하기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평천장(平泉莊:당나라 때에 李德裕가 지은 별장 이름.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처럼 비록 길이 보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선조가 끼쳐 놓으신 이 정자를 어떻게 이와 같이 등한하게 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 혼자 흥분한 일이 있었다. 내가 약관이 되었을 때 하루는 불현듯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혼자 찾아 나섰다. 그곳에 사는 토박이 노인에게서 정자가 있었다는 곳을 찾아서 그 곳에 올라가 사방을 찾아 본 즉 높직한 언덕이 있는데, 공동묘지가 다 된 땅에 깨어진 주춧돌과 무너진 담의 흔적만이 남아있고, 황량한 들에 잡초만이 우거져 있어서 어디에 정자가 있었는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옛날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연못은 메어져 평지가 되고 돈대는 반쯤 허물어졌는데 꼴 베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장치기를 하고 놀더라" 한 옛 말이 바로 일러 경지를 말하는 듯하였다.

수백년 동안에 이렇게도 변할 수가 있을까 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맥없이 거닐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즉시 정자를 중수하여야 할 것을 종중 회의에 붙여서 여러 일가의 의견을 물어 보았더니 거의가 이런 일에 정신을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단념하고 그 뒤로도 이 정자 터를 자주 찾아서 한숨만 쉴 뿐이었다. 금년 정초에 당지의 산소에 성묘하고 선조의 사원을 배알한 다음에 정자의 옛터를 둘러보고 옛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어떻게든지 새로 지어 보겠다는 결심을 굳히었다.

생각 끝에 근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어린 솔 수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사람을 중간에 넣어 무덤 주인을 찾아서 다른 데로 천장하기를 권하고, 다시 정자 가까이에 있는 무덤을 파가게 하였다(중략). 주자가 남강에 있을 때에 염계 서당을 잊지 못하였다 하니 대체로 옛날에 이름 높은 어른이 사시던 곳은 늘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그 어른들의 빛난 자취를 인멸하게 하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정자 터는 우리 선조께서 사시던 곳인데 그 후손들이 어찌 감히 소루하게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옛일을 상고하여 보아도 율곡 선생의 화석정이나 우암 선생의 쌍청당을 모두 중수하여 옛 모양을 되찾았다 하니, 이런 일로 미루어 보면, 오늘날 우리 종중에서 옛 어른의 정자를 중수하는 이 큰 일은 또한 율곡 선생이나 우암 선생의 일을 추모해서 더 한층 결심을 굳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정자터가 허허 벌판에 있어서 금호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은 정자 아래의 마산 사람에게 부탁해서 나무꾼이나 마소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더니, 옛날의 민둥산이 이제는 제법 울창하게 되었다. 이점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종중과 마산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두호하면 될 것이다. 내가 이 일로 여러 번 정자터에 올라갔는데, 그 근처 마을 사람들이 이 정자를 '송강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적고 대부분이 '죽록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처음 듣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자세히 물어 보았더니 그 사람들의 대답이 정자 터는 본디는 송강정이겠지만 옛날부터 오랫동안 '죽록정'으로 널리 불려 왔다는 것이다. 또 정자터 아래에 개울이 있는데 이 이름이 죽록천이로 들 이름도 죽록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 뒤 본현의 음지를 참고하여 보았더니 거기에도 송강정은 창평현의 서쪽 죽록천 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좀더 철저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봉암 재종씨께 편지로 물어 보았다.

그 답장이 기암공께서 서울에 계시면서 나의 고조 할아버지 되는 곡구 부군께 부친 편지에 "죽록정을 잘 보호하라"고 쓰이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하면 죽록정은 송강정의 딴 이름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이 새로운 사실을 안 것만도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이 사실의 전말도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송강과 우계 두 어른의 운을 따서 변변하지 못한 글을 지었다. 대체로 주자가 말한 "집은 아직 짓지 못하였지만 시만은 이미 지었다." 는 뜻을 본받은 것이다.

우리 종중이나 동지께서 글을 몇 편 지어 주시면 이 정자의 산 전고가 되어서 더욱 빛나는 일이 될 것이다. 이 역시 율곡이나 우암 두 어른을 본받은 처사라고 하겠다. 그러니 보시는 분들께서도 너그러이 이해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 정자 주위의 경치나 멋은 이 글에서 논할 겨를이 없으므로 뒷날에 다시 별도로 기록하고자 한다.

숭정 기축 10월 3일

문정공 육대손 재는 삼가 씁니다.


이렇게 중수된 오늘날의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 옆이 마루로 되어 있다.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 시비가 서있고, 뒤편에는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얕은 담처럼 둘러져 있다. 언덕 전체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광주로부터 송강정을 찾아가려면 망월동 공원묘지를 지나 담양가는 국도 15번을 타고 승용차로 10여분 달리면 쌍교가 나오는데, 다리를 건너지 않고 바로 다리앞에서 좌회전하면 송강정이다. 실제 도로에서 송강정이 보이지 않으므로 쌍교 옆의 커다란 주차장을 찾아가는 것이 편리하다. 바로 그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송강정에 오를 수 있다. 주차장에서 송강정의 거리는 불과 50여m에 불과하다.

담양읍으로부터 송강정을 찾아가려면 887번 지방도를 따라 광주 쪽으로 2.4km 가면 봉산지서 앞에서 15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15번 국도를 따라 우회전해 광주 쪽으로 1.8km 가면 쌍교를 넘게 되고, 다리를 건너면 곧 오른쪽으로 6번 군도로가 나온다. 군도로를 따라 20m쯤 가면 왼쪽으로 송강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 근처에는 대형버스 10대 정도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으며, 바로 맞은 편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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