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아우를 위하여 VS 이문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아랑)
작가에 대해서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글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예의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성사를 먼저 해야 할 듯싶다.
'황석영, 그와 그의 작품들'이란 서평 주제를 잡고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변변한 고민조차 해 보지 않은 나의 게으름이 첫째. 기껏해 봐야 그의 단편 몇 작품 읽은 게 전부라는 사실이 둘째. 거기에 더 알지도 못하는 이문열까지 제목으로 끌어들인 점이 셋째 고해(告解)다.
▶ 들어가기에 앞서...
기자(記者)는 버리기에 익숙해야 하는 직업이다. 100을 취재했다면, 90은 버리고 그 나머지 10 속에서 좋은 기사를 만들어 낸다. 100을 다 담으려 하다가는 정말 중요한 10마저 놓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글쓰기의 유혹이 그리 만만한가? 이것을 담고 있노라면 또 저것을 담고 싶고, 저것을 담고 있노라면 또 이것을 담고 싶은 글쓰기의 유혹. '스티븐 킹'의 그 유혹을 조금이나마 뿌리치기 위해 어쩌면 나는 <아우를 위하여>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일단, 분량이 짧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황석영이 탐미주의적 예술지상주의 경향을 청산하고, 굳건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중적 차원의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객지>(1971)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아우를 위하여>가 1972년 작품이니 그가 리얼리티를 추구하던 시절 초기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목 <아우를 위하여>가 말해주듯, 형식은 주인공 김수남(형)이 군대에 간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글 내용 속에 아우는 없다. 그저 주인공의 초등학교 시절 1년간의 기억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 왜 <아우를 위하여>인가?
이 글 속에 '아우'는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칭하는 말이 아니었나 싶다. 전체주의에 물들고, 파쇼적 독재 밑에서 안정을 추구하던 기회주의적 사람들. 하지만, 소박하기 그지 없으며, 그 마음속 어딘가에 정의감 하나만큼은 잃지 않았던 우리네 말이다.
사건은 김수남(주인공, 형)이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시작된다. 전학 후, 일제고사에서 1등을 차지한 김수남. 그렇지만, 반 아이들에게 그런 것은 이미 관심거리가 아니다. 단지 힘의 논리만 있을 뿐이다. 첫째 가다('어깨'의 일본식 어휘로 깡패와 비슷한 말) 장판석, 둘째 가다 임종하, 셋째 가다 박은수를 중심으로 한 권력 구조. 그리고, 그 속에 나석환(반장)은 단지 허수아비 노릇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영래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권력 구조는 급속하게 개편된다. 이영래에게 당한 장판석은 하루 아침에 몰락하고, 김수남과 나석환 등 몇몇을 제외한 모든 반 아이들은 '장판석'에서 대상만 바뀐 '이영래'의 똘마니(?)가 되고 만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영래. 그 안에서 '찍' 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반 아이들. 그러나, 새롭게 온 교생 선생님의 출현은 조금씩 반을 변화하게 만들었고, 김수남에게도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정의(正義)를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김수남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그 권력(이영래와 임종하 무리들)을 향해 저항을 하게 된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 형은 아우에게 이 말을 전한다. '여럿의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짓밟히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거야.' '우리는 너를 항상 기억하고 있으며, 너는 우리에게서 소외돼버린 자가 절대로 아니니까 말야.'
▶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하, '우일영')이 머릿속에
오버랩되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대목이기도 한데, 이문열은 <우일영>(갑자기 '방일영' 前 조선일보 회장이 떠올르는 것 왜일까? ^^)을 쓸 때, 이 소설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글 내용이나 전체의 시간적 흐름을 놓고 볼 때 상당 부분 달랐지만, 글에서 담고 있는 소재들에서 있어서는 분명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우일영>에 '엄석대'가 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는 '이영래'가 있고, <우일영>에 '한병태'가 있다면 <아우를 위하여>에는 '김수남'이 있다. 또, 전체적인 구조도 많은 부분 맥락이 통했다. 그러나, 황석영과 이문열이 작품 속의 인물들을 대하는 관점은 분명 다르다. 이문열은 가치중립적 세계관 속에서 다소 허무주의 경향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황석영은 공존적 세계관 속에서 끈끈한 인간애로 바라보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영래'의 변화된 모습(이영래 스스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은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일영>에서 '엄석대'의 몰락과는 대비되는 모습니다.
물론, 이문열은 복합적 성격을 지닌 '한병태'를 이용하여, 독재자(엄석대)의 말로라는 뻔한 스토리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이문열의 문학적 힘이 아닌가 싶다.
▶ 황석영의 <동인문학상> 거부
소설을 다 읽고, 때마침 소모임 게시판에 노익장 님께서 올려 주신 황석영의 <동인문학상>
거부 관련 글 세 개를 다시 읽어보았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우연찮게 황석영, 이문열, 강준만 세 사람의 글이 함께 있었다는 게 조금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황석영이 다시 문단에 복귀하게 된 것은 1970년 <탑>이 조선일보에 당선되면서부터다. 어찌 보면, 자신에게 고마운 존재일지도 모르는 조선일보를 그렇게 거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정도(正道)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문열의 인터뷰 내용에서는 그의 철저한 시장주의 감각을 읽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가 지금의 위치에 있게된 것은 '독자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즉, 시장에서 다수에 의해 선택되어진 그것이 어떠한 문제가 있느냐는 식이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시장주의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찬성이다.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는 이상, 현재로서 그나마 정답에 가까운 것이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돈을 창출하는 구조', '빈(貧)이 빈(貧)을 가중케 하는 제도'. 더욱더, '그 시장이라는 것마저 권(權)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지금 우리의 '시장주의'이다.
이문열. 그가 이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어쩌면 현실과 그렇게 타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는 <나를 위하여>, <그대를 위하여>, 혹은 <이문열을 위하여> 던지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 글을 마치면서...
글을 쓰다보니, 다소 황석영에 대한 옹호적 시각이 많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 <아우를 위하여>가 나를 썩 만족시킨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이영래'의 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 반전은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짧은 소설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담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측면, 일견 이해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어릴 적 기억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쁨도 얻었다. '일제고사', '줄반장', '분단장', '기율부장' 등등의 단어 속에 혼자 쓴웃음을 지어보기도 하고, 한편으로 '정말이지, 군사 정권을 쏙 빼닮은~ 나의 학창시절이었구나' 하는 새삼스런 생각도 떠올랐다. '노깡', '상둣도가', '관솔'과 같은 그 당시 어휘들은 작품을 그대로 느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음성모음을 많이 쓴 것도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다. '너도'를 '너두', '그런 일로'를 '그런 일루', '~하고'를 '~하구'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맞춤법에는 맞지 않지만, 이러한 황석영의 의도적 문체가 친근감을 주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었다. 겨우 20쪽 남짓한 편안한 소설을 대하다 보니, 글쓰기에 있어서도 너무 동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 쉽게 글을 적어 내려갔다는 생각에 겸연쩍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