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박상우(旅浪)

작성자이계양|작성시간17.05.07|조회수64 목록 댓글 0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박상우(旅浪)

 

밤 열시가 가까워질 무렵부터 우리는 조금씩 지쳐 가기 시작했다. 취한 게 아니고 그것은 분명히 지쳐 가는 거였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비워 낸 생맥주 잔의 개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음주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취기와는 종류가 다른 것이었다.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긴장감이 오히려 가중된 것인지도 혹은 모를 일이었다. 마시다 남겨 둔 생맥주잔 언저리에 말라붙은 허연 거품과 재떨이에 수북하게 쌓인 담배 꽁초가 쾌연하지 못한 좌중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연대의 벽두, 그리고 21년 만의 폭설을 빙자해서 만나자는 전화를 맨 처음 걸어 온 사람이 우리 중 누구였던가. 돌아보고 후회할 때는 언제나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때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새로워질 게 없는 시간. 낮은 조도의 갓등 밑에서, 우리 모두의 의식은 그 갓등의 조도만큼이나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가무러져 가고 있을 뿐이었다. 피곤함과 안온함,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 맑은 것과 탁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위 묘한 감정적 기류들이 좌중에서 은밀하게 교차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잠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대단히 묵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그때부터 우리는 아무런 뜻도 없는 눈길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기 시작했다. 언어 뒤의 허무,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케 해주는 언어 이전의 공감대. 출입문 바깥쪽에서는 여전히 주먹만 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날 페기 리의 노래를 들으면 좋을 텐데.... 출입문 바깥쪽의 탐스런 눈송이를 내다보던 우리 중의 하나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굵고 탐스런 눈송이가 녹아, 그의 눈빛을 빈틈없이 촉촉히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쟈니 기타? 부유스름한 허공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던 다른 하나가 물었다. 퇴폐적이야. 페기 리를 생각하고 있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묵묵히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또 다른 하나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끼여들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항상 그렇데 단정적이야 할 필요가 어딨어? 그만둬.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하나가 듣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자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하나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놀란 눈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무엇인가, 얘기가 간신히 맥락을 되찾아갈 듯하다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우리가 자리를 함께 한 이후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었다. 좌중의 하나가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자신이 좌중의 답답한 분위기를 자진해서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감하군.... 좌중의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의 주인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중얼거림에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난감해 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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