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몰락-어느 쪽이 진정한 폭력인가(밥쌤)
- ‘우상의 눈물’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여러모로 닮은 꼴이다. 두 작품 모두 성인사회를 작은 교실로 축소시켜놓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저항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하지만 소재가 같다고 해서 내용과 주제의식까지 동일하지는 않다. 두 작품을 비교해 봄으로써 어느 면에서 유사하고 어느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상의 눈물
‘우상의 눈물’은 전상국이 1980년에 발표한 소설로서 야만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이 보다 치밀하고 지능적인 폭력에 의해 길들여지고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 속에서 ‘나’로 등장하는 이유대는 임시반장이 되어 메스껍게 굴었다는 이유로 최기표가 이끄는 재수파 패거리에게 집단린치를 당한다. 기표는 악의 화신으로 ‘교활한 자들이 가끔 보이는 거짓 착함’ 마저도 없는 인물이다. 기표의 폭력에 굴복한 ‘나’는 반장자리를 사임하고 대신 친구 ‘형우’를 반장으로 추천한다. 형우는 치밀하고 선량해 보이는데다 통솔력까지 갖춘 인물로 요령껏 반을 이끌며 최기표를 길들이려 한다. 그러나 컨닝을 통해 기표의 성적을 올려주려는 그의 시도는 오히려 기표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고 결국 ‘나’와 마찬가지로 린치를 당하게 된다. 하지만 형우는 가해자에 대해 끝가지 입을 열지 않아 친구들 사이에서 일약 의리파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 사건으로 기표의 심복들을 떼어놓는데 성공한 형우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표와 재수파를 미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기표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어머니를 돌보는 효자로, 재수파는 각자 돈을 모아 기표네의 생활비를 도와준 의리 깊은 친구들로 둔갑한다. 형우에 의해 조작된 미담은 학교 밖까지 퍼져 사회각처에서 성금과 위문금이 들어오고 기표의 이야기를 영화화하자는 제안까지 나오게 된다. 쏟아지는 주위의 관심 속에 독기가 다 빠져버린 기표는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로 변화되고 영화사 관계자들과 만나기 직전 ‘나는 무섭다. 무서워서 살수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우상의 눈물’에서 기표는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폭력을 상징한다. 이것은 법에 앞선 주먹이며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다. 반면 반을 ‘자율성’이라는 명목아래 그 위로 군림하려는 담임과 선하고 의리 있는 척 하면서 결국 계획했던 대로 기표를 망가뜨리고야 마는 형우는 조직화된 지능적인 폭력을 상징한다. 결국 야만적인 폭력은 지능적인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형우라는 인물은 처음에는 완벽한 선의 화신처럼 등장하지만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 음흉한 속셈을 드러낸다. ‘나’ 앞에서는 적대감을 내뿜으며 하던 기표의 이야기를 반 아이들 앞에서는 오직 우의와 신뢰만을 가득 담아서 이야기할 정도로 위선적이다. 그는 신이 자신의 완벽함을 드러내기 위해 악마를 이용했듯이 그렇게 기표를 이용했던 것이다. 기표네에게 끌려가서 린치를 당한 것도 사실은 그 ‘고난’을 이용해서 잠시 죽었다가 빛나는 영웅으로 부활하려는 형우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마치 예수가 십자가 고난을 받고 3일후에 부활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계획에서 희생된 것이 바로 ‘유다’요 ‘사탄’인 기표였던 것이다.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는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작품 중에서-
작가는 작품 곳곳에 기독교적인 선악대립의 모티브를 드러낸다. 우선 ‘나’의 이름이 ‘이유대’라는 것부터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선과 악으로 철저히 대립하는 형우와 기표를 보아서도 그렇다. 고등학생답지 않게 ‘~냐’ 또는 ‘~다’로 끝나는 딱딱하고 현학적이며 조숙한 등장인물들의 말투도 흡사 ‘데미안’을 보듯 종교적인 엄숙성을 암시한다. ‘교실’이란 세계의 축소판에서 벌어진 작은 아마겟돈은 결국 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한 선인지 작가는 슬쩍 돌려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선을 가장한 폭력, 아니 선이기 때문에 가차 없는 폭력은 거칠은 폭력보다 얼마나 더 잔인한가.
기표가 도망칠 정도로 무서워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형우와 담임의 이러한 소름끼치는 용의주도함이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표의 지적능력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의 인식이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 버티고 있는 형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자격미달의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위의 갑작스런 사랑과 기대가 못 견디게 부담스러웠고 결국 악 그 자체였던 자기자신마저 잃어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기표는 사건의 배후에서 팔짱끼고 내려다보고 있는 힘의 정체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커다란 손에 가로막혀 우왕좌왕하는 개미처럼 자신의 두려움을 표면적인 현상에 투사시킨 것이리라.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총에 맞아 절뚝거리는 맹수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안쓰러움을 기표에게서 느끼게 된다. 신의 힘, 정의의 힘, 법과 제도와 질서의 후광을 입은 힘. 그 힘이 폭력으로 돌변할 때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우상의 눈물’과 마찬가지로 학교 내에서의 폭력을 모티브로 삼았다. 주인공 ‘나’ 한병태는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서울에서 시골학교로 전학을 온다. ‘나’는 엄석대라는 카리스마적인 급장이 지배하는 반분위기에 반감을 느끼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무사안일주의에 젖은 담임은 나의 신고를 믿지 않고, 폭력에 길들여진 반 아이들은 한통속이 되서 나를 따돌린다. 여러 번에 걸친 도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지쳐버린 ‘나’는 엄석대에게 굴종하고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다. 하지만 새로 온 담임선생님에 의해 엄석대의 비리는 낱낱이 밝혀지고 그는 교실을 떠난다. 30년이 흐른 후 우연히 만난 석대는 경찰에게 연행되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에서는 기표보다는 형우쪽이 폭력의 주체로 그려진데 반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에서는 엄석대쪽이 폭력의 주체로 그려진다. 여기에 일견 유사한 캐릭터로 보이는 최기표와 엄석대 사이의 상이점이 존재한다. 최기표가 그저 무서운 동네건달이라면 엄석대는 작은 왕국에 틀어 앉아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독재정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엄석대는 최기표의 악함과 형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우상의 눈물’에서 형우가 기표를 길들이기 위해 위선을 이용했듯이 엄석대는 전학 온 한병태를 길들이기 위해 폭력뿐만 아니라 친절을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물을 떠다 바치라는 자신의 명령을 병태가 듣지 않자 ‘그래 그게 그렇게 힘들었니?’하고 빙긋 웃어보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런 위선을 엿볼 수 있다. 주변 아이들을 조종해서 ‘한병태’를 괴롭히고 능청맞게 구원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물리력이 먹히지 않는 상대에게는 반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제도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한병태가 유리창을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유리창의 상태와 관계없이 합격과 불합격은 급장인 엄석대의 마음상태에 달려있다. 3번이 퇴짜를 맞은 끝에 가까스로 합격을 받은 ‘나’는 허물어지며 엄석대에게 굴복한다. 그리고 그가 베풀어주는 ‘하해와도 같은’ 은혜에 감격해 한다. 그것이 원래는 내것이었던 것을 빼앗았다가 돌려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작품 속에 현실사회를 도식적으로, 또 우화적으로 그려내었다. 독재정권과 4.19혁명등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은 소설속의 축소된 상황들과 일대일로 톱니가 착착 맞아 돌아간다. 반의 효율적 운영 때문에 묵인되는 엄석대의 폭력과 비리는 곧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정부의 독재 비리를 상징한다. 엄석대의 비리를 폭로하는 나에 대해 담임이 ‘짐작은 간다. 하지만 석대가 반 아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이곳의 방식이다. 설령 네가 옳더라도 나는 석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우리는 곧바로 박정희 정권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나’가 석대의 용서를 받는 것도 그저 무릎을 꿇음으로서가 아니라 ‘샤프’라는 뇌물을 바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로부터 미루어볼 때 엄석대가 독재정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폭력의 몰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상의 눈물’에서는 담임의 개입이 기표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하지 못하는데 반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외부세력의 개입, 즉 새로 온 담임선생님에 의해 엄석태가 몰락한다. 엄석태가 감찰권과 처벌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상 ‘내부’에서 그를 무너뜨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으로부터의 혁명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자신의 권리를 찾는 일마저도 누군가가 던져주는 선물로써 감지덕지해야 한단 말인가? 작가는 여기에 대해 ‘힘과 의지는 담임에게 빚졌어도 형식적으로나마 그 주체는 우리였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이 다소 구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식적이고 작위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현실과 대응을 이루던 소설이 혁명의 대목에 이르러서 4.19라는 역사적 사실과 달라지는 것은 대중에 대한 작가의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작품 속에서 작가는 비난의 화살을 엄석대 뿐 아니라 반 아이들 모두에게 퍼붓고 있다.
‘내’가 엄석대에게 저항할 때는 권력에 빌붙어 나를 박해하던 인간들이 새로 온 담임선생님에 의해 사태가 역전되자 몰락한 힘의 쓰러진 등을 짓밟으며 되려 ‘나’에게 비겁자라느니 배알도 없다느니 질책한다. 한때 폭력의 앞잡이였던 자들이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고개를 들고 다닌다. 이 작품을 느끼면서 우리가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권력자의 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소시민적인 대중들의 기회주의적인 근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상의 눈물’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은 모두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실안에서 절대적인 폭력의 몰락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과연 어느쪽이 진정한 폭력이냐에서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우상의 눈물’은 기표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형우의 선을 가장한 지능적 폭력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엄석대의 절대적 독재 권력을 진정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폭력에 대한 대처방법에서도 서로 다르다. ‘우상의 눈물’에서는 폭력에 대해 더 지능적인 폭력으로 대처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외부력에 개입에 의해 사건을 해결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폭력이 단순히 폭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커다란 힘은 어쩌면 국가를 상징할 것이다. 두 작품의 작가들은 그런 거대한 폭력 앞에 몰락하고 저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폭력의 정체를 까발리고 있다. 더 강한 자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 한없이 강해지는 폭력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