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론'의 '돼지'와 '배 안의 사람들'에 대하여 (남주미)
'필론의 돼지? 무슨 이런 제목이 있지...' 한참을 난감해 했다. 기상천외한 소설 제목이 많다지만, 필론은 누구의 이름일까? 돼지는 그의 가축? 아님 식량... 이런 잡다한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쳤다. 하지만 책의 맨 마지막 장을 읽고 난 지금의 내 심정을 말하자면-과연 이 표현이 여기에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씁쓸함'이라고나 할까?
<...필론이 한 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위의 에필로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에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먼저 부조리한 폭풍우의 현실에서 폭력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 검은 각반의 현역들은, 다른 제대병들과는 달리 '수많은 특수훈련과 거친 생활에 단련된' -아마 내 생각에 영창에 갔다 온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아님, 정말 특수부대 요원일지도...-권위의 폭력으로 묘사되는 이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물질적으로 해를 끼치는 사회의 필요악으로 묘사되고 있다. 자신의 향락과 만족을 위해 뭇 사람들을 그 희생양으로 만드는 제국주의적 성향의 무리들. 그러나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했던가.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존엄을 상실한 채, 자신들의 짓밟고 올라섰던 그 희생양들에 의해 또 다른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형님들 살려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쾌락을 위해 손을 벌린 그들의 또 다른 일면, 생존을 위해 무릎을 꿇는 나약함 그리고 비굴함.
그와 반대로 권위의 폭력에 짓밟혀 자신들의 휘두르는 폭력의 진정한 의미가 뭔지는 모르는 채 그저 억울하게 눌려 온 것에 대한 분풀이로 울부짖는, 무차별의 폭력으로 묘사되는 제대병무리가 있다.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항거하지 못하면서 그저 폭력과 협박에 움츠린 채 뒤에서만 수군대다가 일종의 선돌이 일면 한꺼번에 폭발해 버리는 눈 먼 증오와 격앙된 감정의 소유자들.
<제대병들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살기등등한 그들을 보며 그는 문득 섬뜩한 상상에 빠졌다. 만약 이 검은 각반들이 죽는다면?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 먼 증오와 격앙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
흡사 이문열의 또 다른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엄석대의 행위를 묵인하고, 그에 순응하던 아이들의 막판의 배신, 욕설, 손가락질.
다음은 그러한 사회혼란 속에서도 부지런히 현실 극복의 뗏목을 엮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는 정의를 위해 일어섰다가 자신의 실리를 찾아 폭력에 타협하는 기회주의자와 명분 없는 권위에의 폭력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그러나 맞서 대항할 힘이 없는 지식인과 무지하고 소박하지만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정열과 희생의 의지를 가진 독립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들을 구원해 줄 뗏목을 엮었을까? 기회주의자는 변절자라는 오명으로 치부되고, 지식인의 비판은 그보다 더 현실적인 폭력으로 마무리 지어졌으며, 독립인이 의지는 타협이라는 극복안 대신 또 다른 사람을 폭력의 감옥 안에 구속하는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는 결국 폭풍우 속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법과 진리의 도착이 언제나 늦은' 현실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맑게 갠 하늘과 선선히 부는 바람, 잔잔한 물결 없이는 순탄한 항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그저 현실이 안정되길, 모든 불안적 요소가 사라지길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 중에는 순박했지만 각박한 현실을 살면서 허세와 과장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법을 배운, 그래서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분명히 알기에 폭풍우가 가실 때까지 묵묵히 앉아 기도하는, 홍덕동으로 묘사되는 이와 그런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은 남들과 다르기에 그런 치졸하고 잔인하고 난폭한 상황에 말려 들 대의가 없다며 방관하면서 그들을 비웃고, 또 그런 상황을 마무리 지을 힘이, 능력이 자신에게 없으면서 그들을 비웃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라는 사람이 있다.
<"정말 3년 동안 더러운 것만 배웠군...." 그는 거의 자신들 걷잡지 못한 채 내쏘고 말았다. 홍은 피식 웃었다. "깨끗한 거 배운 사람도 별 수 없더마. 이형이 낸 거나 내가 바친 거나 다같이 백 원짜리 동전잉께. 너무 그러들 마소.">
명분이야 어떻든 그들을 서로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기 안일을 위해 자리를 피한 홍과 대의 없는 소동에서 벗어나 '그' 현자인 필론 역시 아수라장인 배 안에서 결국 할 수 있었던 건, 돼지처럼 잠을 자는 것이었으니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 속해 있을까. 그 속에서 어디까지 생각하고, 무엇을 행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폭풍우를 피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제 1회 EBS 신세대 독후감 우수작 으뜸상: (북평여고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