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 독후감(이선)
청주외고 ; 이선
방학 중 나는 좀 특별한 책을 읽고 싶었다. 여기서 특별함이란 것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가치관이 뚜렷해졌을 때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그런 책을 의미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내 준 '휴가 중 권장 도서 목록'을 살펴봤다. 내가 읽은 책들도 있었고, 제목만 들어보았던 책들도 있었고 전혀 새로운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란 제목에 눈이 멈추었다. 나는 이 채의 제목을 처음 접해 보았다. 그런데 유난히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제목이 오래도록 나의 눈길을 잡고 있었고, 결국 그것은 내 독서 목록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매우 동화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의 일부만을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은 낭만적인 동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느꼈다. 해피 앤딩의 아름다움, 씩씩함이 이기는 것이 아닌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이 책이 아닌 필독도서 목록의 다른 책으로 독후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나는 이 책을 이해하고 독후감을 쓸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아직 좀 어려운 책인 것 같았다.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 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기법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추상화되어 있는 표현들을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 책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그 내용을 모두 완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는 없었지만, 나름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가슴이 많이 아팠고,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 등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나의 시각에 많은 변화가 왔다. 나는 그 동안 그들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을 가졌을 뿐이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게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이 책을 읽고 가슴이 아파 왔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나의 머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일고, 모차르트를 듣고 눈물을 흘려도 바로 가까운 이웃의 아픔에는 무심한 사람들'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반성의 글을 쓰고있는 것일까? 아니면 가들을 또 다시 동정하고 있는 것뿐일까? 나는 정말 모르겠다. 난쟁이 아버지는 지구에서 행복을 포기하고 달나라를 꿈꿨다. 이 세상에서 정말 그는 행복해 질 수 없었던 것일까?
우선 이 소설들이 각각 독립적인 단편인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장편소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소외 계층인 빈민들이 모여 사는 낙원구 행복동은 전혀 낙원이 아니다. 행복도 없는 곳을 낙원구 행복동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상황과 대비되는 주소를 설정하여 역설 법을 사용한 것이다.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외 계층의 아픔을 더욱 강조하여 나타내 주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부터 에필로그가지 경제, 인권, 소득 분배, 교육, 소회, 노동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누적되어 있다. 요즘에도 가끔 TV를 보면 철거민들에 대해 방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99년을 사는 현 시점에서 난쟁이는 아직도 공을 쏘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영희가 "아파트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저희예요."라고 말할 때, 난쟁이 아버지가 "그들 옆에는 법이 있다."라고 말 할 때, 영수가 끝이 뾰족한 사각형을 그려놓고 "우리는 이 맨 밑이에요. 우리에겐 잡아먹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 위에는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무엇이 세 층이나 있어요."라고 말할 때 난 책을 잠시 밀어 놓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 머리는 여전히 책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의 아픔이 절절히 그려져 있다. 사회에서 소외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칼날에서 신애가 한 말 "저희들도 난쟁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 이예요."라는 말이 잠시 나를 멈추게 했다. 순간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것이나를 흔들었다. 그랬다. 우리 모두약자인 이 현실 속에서 정상인에 비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난쟁이와 우리는 다를 바가 없다.
처음 나는 이 소설을 그 당시의 시대 고발적 성격이 짙은 사실적 소설이라고 해석했을 따름이었다. 누군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을 글로 써낸 거시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한 자료를 찾아 주셨다. 그 자료를 읽고 나서 내 생각이 참으로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현재 교과서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있었다. 그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보다는 시대를 먼저 읽는 것이 나도 모르게 나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소설은 단지 고정된 70년대만이 아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사고는 지나간 논리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해결해야 할 삶과 복지의 문제들도 그 70년대와 똑같이 산적해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우리 시대는 첨단 미래사회를 향한 교두보를 탄탄히 다져놓은 듯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문화적으로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에 비해, 우리의 의식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 발 맞추어 변화한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덩치만 커지고 체력은 떨어진 거인의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급한 경제 논리는 아직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며, 빈익빈 부익부의 상황이 당연시되고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곳곳에는 또 다른 난쟁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 속에 나온 노도 환경이 더 이상 은폐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 환경은 열악하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중산층화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뵌다. 그리고 만족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치 노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에서 만족을 얻는 것은 울의 의식이 서서히 경제 논리화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 인간의 삶이 경제성으로 순위 매겨지거나, 모든 일에 경제적 가치부터 따지려고 드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왜소한 거인의식이다. 난쟁이가 경제 논리와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희생당한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스스로 거대한 난쟁이, 혹은 왜소한 거인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과연 진정한 거인의 시대는 올 것인가의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에 살고 있다. 단순한 경제 논리로 개개인의 다양한 삶을 재단하는 일은, 그 불행했던 70년대의 오류를 내면적으로 되풀이하는 일에 불과하다. 탐욕스러운 중도적 상류층이 아니라, 소박하고 여유 있으며 삶의 근본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중산층 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거인의 모습일 것이다. 거인이 두드러지는 것은 난쟁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거인인 시대. 모두가 삶의 개별적 가치에 눈뜰 수 있는 시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직설적이 충고인 듯하다.
나는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미래에 다시 이 책을 익어 볼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