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2
10. 닳아지는 살들(이호철) 줄거리
5월 어느 날 저녁, 밤 열두 시에 돌아온다는 맏딸을 언제나처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조용하고 썰렁한 집 안에는 은행에서 은퇴한 늙은 주인, 며느리 정애, 그리고 막내딸 영희가 소파에 앉아 있다.
어디서 '꽝 당 꽝 당'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정애는 이 집 맏딸의 시사촌 동생인 선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상기시킨다. 선재는 죽은, 영희 어머니가 몹시 아끼던 청년이다. 마침 이층에서 내려온 성식은 왜들 그러구 앉아 있느냐고 가시 돋친 말을 한다. 바짝 야윈, 파자마 차림의 오빠를 영희가 비꼰다.
술에 만취된 선재가 들어오자 영희가 그를 부축하고 올라가고 성식도 이층으로 올라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정애는 까닭없이 불안해지고 갑자기 조급해지는 것을 느낀다. 영희는 선재가 쓰는 초라한 방에서 선재의 품에 안기어 쇠망치 소리를 혼자 감당하기 힘들고 무섭다고 말하며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녀는 오빠의 방을 찾아가서 '오늘 밤 지금 막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하나 성식이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희는 쓰디쓴 웃음을 보인다. 점점 열두 시는 가까워지고 늙은 주인은 푸념을 하는 어린애처럼 코의 사마귀를 만지며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모두의 시선이 시계와 노인의 얼굴로 향하는데,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기묘한 웃음을 띤 식모가 나타나 변소에 갔었다고 말한다. 영희는 식모를 가리키며 언니가 정말 왔다고 소리친다.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린다.'꽝 당 꽝 당'하는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는 온밤내 이어진다.<사상계>(1962)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배경 : 시간(5월 어느 날 저녁). 공간(어느 실향민 가정의 응접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표현 :실향민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이 분단의 비극에서 비롯됨을 그려 냄
주제 : 전쟁이 가져다 준, 가족의 내면적 파탄의 비극.
전후(戰後)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가족의 권태와 비극.
분단 상황의 사회적 모순과 인간의 역사적 소외 의식
등장 인물
아버지 : 은행에서 퇴직한 백치가 다 된 70세의 노인. 이북으로 시집간 맏딸을 기다림. 정적 인물
영희 : 막내딸. 노처녀로 가족들의 의미 없는 삶에 불만을 토로함. 정적 인물
성식 : 영희의 오빠. 아내와의 애정이 결핍된 채 이층 방에 칩거하는 작곡가 지망생.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패배주의적 정적 인물
정애 : 성식의 아내. 남편에게 무감각하며 시아버지 모시는 일밖에 모르는 며느리 정적 인물
선재 : 이북으로 시집가서 20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이 집 맏딸의 시사촌 동생. 영희의 연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산가족의 아픔과 정신적인 무기력을 반복되는 망치 소음과 병치시킴으로써 그 문학적 기법의 탁월성을 인정받았다.주요 인물은 반 백치가 된 아버지, 말없이 안경알만 번쩍이는 성식과 그 아내 정애, 항상 불안하게 지껄이는 영희 등의 일가족과 영희의 실제적 약혼자인 선재, 그리고 식모 등이다.그리고 공간적 배경은 이들이 사는 집 안, 특히 거실로 한정되어 있다.
영희 일가족은 늘 거실에 모여 앉아 이북으로 시집가서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며 그녀가 열고 들어올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그 문을 열고 집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집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인물은 일상적 생활에 젖어 있는 선재와 식모뿐이다. 더군다나 이 집에 새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쇠붙이를 두드리는 날카로운 소음으로 작품의 마지막까지 들려온다.
이 소설의 기본틀을 '기다림→기다림의 좌절→기다림을 재촉하는 쇠붙이 소리'로 본다면 이 가족은 또다시 끝없는 기다림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세월 속에서 가족간의 유대감은 점점 마멸되어 제목 그대로 '살이 닳아지는' 아픔만이 남게 될 것이다-<참길 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