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신두원/국문학박사)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이 구절을 들으면, 강남의 신흥 부유층들의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어 뜯은 젊은 시인 유하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한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이 시집의 독특한 제목은, 그러나 사실 지난 1986년에 발표된 양귀자의 단편소설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의 패러디(parody)인 셈이다.
부천시 원미동이라는 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변두리 인생들의 기구한 삶의 내력과 애환을 담아낸 연작 소설집인 『원미동 사람들』 중의 한 편인 이 작품에서 우리는 매우 정직하게 살아가는 한 집수리공을 만나게 된다. 양귀자의 작품 세계 전반이 일단 작가 자신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민중적 삶에 대한 연민적 감정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변두리에서 살고 있을망정 집을 소유하고 있고 샐러리맨으로 그런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고 있는 중산층 인물인 ‘그’의 눈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서울의 한 회사에서 사보를 편집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에서 전세살이를 전전하다가 얼마 전 부천시 원미동의 연립주택을 하나 사서 이사해온 그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집의 하자 보수공사에 시달리다가, 이번에는 목욕탕에서 물이 아래층 집으로 새는 사건에 맞닥뜨린다. 이웃사람의 소개로 임씨라는 인물에게 공사를 맡기는데, 그가 사실은 연탄배달부로서 여름 한철에만 이것저것 잡일을 하는 어설픈 막일꾼이라는 것을 알고는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그의 기분이 언짢아진다. 더욱이 보조일꾼으로 데리고 온 젊은이의 약빠른 태도는 영 그의 눈에 차지 않으며, 임씨의 반지빠른 말솜씨조차 그에게는 영악스럽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미덥지 않게 보인 인상과는 달리 임씨는 그런대로 일을 진척시켜 어느새 물이 새는 부분을 찾아내고 일은 다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알려준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애초에 임씨가 올린 견적서의 공사비에 비해볼 때 일이 너무 수월하게 끝날 것으로 보이자, 아내가 억울해하기 시작하고 그 역시 수상쩍어하는 눈빛을 거두지 못한다. 게다가 온갖 직업을 다 겪어 보았다는 임씨의 내력을 듣고서도 그는 “견적에서 돈 남기고 공사에서 또 돈 남기는 재주는 임씨가 막판에 배운 못된 기술”일 거라고 의심한다.
어쨌든 목욕탕 공사는 여섯시쯤에 마무리되지만, 임씨는 남은 시멘트로 손볼 다른 데가 있으면 마저 일을 해주겠다고 하여 내친 김에 그간 심각하지는 않아 미루고 있었던 옥상 방수공사까지 하게 된다. 젊은 보조일꾼이 일찌감치부터 사라지고 나서는 그 역시 임씨의 일을 거들며, 의외로 시간을 끈 옥상 공사는 여름밤이 이슥해서야 마무리된다. 이처럼 늦게까지 옥상공사를 마무리하는 임씨의 일솜씨와 철저함을, 같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겪고 나서야 그는 앞서 품었던 의심을 어느 정도는 거둔다. 하지만 옥상 공사까지 시켜놓고도 돈을 다 내주기가 아깝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아내 앞에서 임씨는 애초에 목욕탕 전체를 뜯을지 몰라 18만원으로 올려 쓴 견적서에서 이것저것 제하고는 7만원만 주시면 된다고 한다. 옥상 공사는 ‘서비스’였다고 덧붙이면서.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가라고는 겨울에 연탄을 자기 집에서 대어달라는 것뿐이었다.
결국 일꾼들이란 영악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그와 그의 아내의 일반적인 기대를 집수리공 임씨가 보기 좋게 저버리는 것이 이 작품의 골자인 셈이다. 마흔이 되도록 지하 셋방에 살며 온갖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아이들에게 곰국 한번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임씨의 직업의식이 이와 같이 정직함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임을 그는 깨닫게 된다.
정직하게 살면 이처럼 세상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임씨가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일을 마친 뒤 구멍가게에서 맥주를 한잔 하면서 임씨가 그에게 털어놓은 사연은 이러하다. 쉐타 공장하던 사장에게 일 년 내 연탄을 대줬는데 그가 연탄값을 떼먹고 야반도주를 해가지고는 가리봉동에 가서 더 큰 공장을 차렸다는 것, 비오는 날이면 일거리가 없어서, 아니 일거리가 없는 비오는 날이라야 그 돈 80만원을 받으러 줄창 찾아가지만, 그 사장은 온갖 핑계를 대며 결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씨는 드디어 술이 취해 부르짖는다. “어떤 놈은 몇 억씩 챙겨먹고 어떤 놈은 한 달 내내 뼈품을 팔아도 이십만 원 벌이가 달랑달랑한데, 외제 자가용 타고 다니며 꺼덕거리는 놈, 룸싸롱에서 몇 십만 원씩 팁 뿌리는 놈은 무슨 재주로 그리 사는 거야? 죽일 놈들. 죽여! 죽여!” 그리고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죽일 놈들’ 속에는 자신도 섞여 있는 게 아니냐는 자괴감이 들어 임씨를 달래지 못하고는 울적한 마음으로 취한 임씨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짤막한 단편이지만, 이 작품에는 한 순박한 막벌이꾼의 정직한 세상살이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하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그러면서도 정직함을 잃지 않는 주인공 임씨의 모습이 결코 과장적이지 않은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작품은 우리에게 되묻기도 한다: 우리들은 임씨가 말하는 저 ‘죽일 놈들’ 속에 과연 끼지 않을 것인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