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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고 삶 쓰기

라면을 끓이다(이재무)

작성자이계양|작성시간21.03.03|조회수176 목록 댓글 1

라면을 끓이다(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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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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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아 | 작성시간 21.03.03 어쩌면 이렇게도 집요하게, 치밀하고 단단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탄탄하고 완벽하게 라면 끓이기를 담아내는가. 세상 면기 중에 가장 라면 담기에 딱인 그릇을 만난 듯한 흥분, 정말 부럽고 존경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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