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상망(長毋相忘)(이형민)
조선시대 제주도의 유배(流配)는 곧 죽음의 여정이었으리라. 유배가 풀려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다시 돌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싣고 거친 풍랑과 싸우면서 유배지 제주까지 살아서 도착하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모진 풍랑을 헤치고 제주에 도착한 추사가 ‘백 번 꺾이고 천 번 꺾여서 온 이곳’이라 했을까.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추사에게 제주는 가혹한 형벌의 땅이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도의 서남쪽에 위치한 대정현성 동문 안쪽(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위리안치 되었다고 한다. 위리안치(圍離安置)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나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주위에 가시나무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던 추사에게 위안을 준 것은 사랑하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이 늘 푸른 송백(松柏)처럼 변함없는 정성으로 보내오는 서책이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절망감과 고독으로 힘겨웠을 유배생활 중에도 수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주저앉는 정신을 곧추세우고 추사만의 고유한 서체(書體)인 ‘추사체’와 한국 문인화(文人?)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세한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도 볼 수 없는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 갇힌 유배지의 고독과 절망 속에서 김정희는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秋史體)’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
세한도(歲寒圖)는 무려 9년이란 세월을 유배지 제주 대정현성 동문 쪽 안에서 지내는 동안 고난 속에 있는 스승을 위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보인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추사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건넸다는 그 유명한 그림이다.
빈 집 한 채의 양 옆으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세한도’는 감정을 절제하면서 내용을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하고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겨두어 고독한 유배생활에서 느낀 비애의 감정을 한결 고결한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 그림이다.
수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논어에 나오는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는 공자의 말씀을 발문에 적은 것이리라.
이상적은 역관(譯官)이었다. 그는 스승인 추사가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중국에 가면 아무리 값비싼 책이나 벼루, 먹이라도 사서 제주로 보냈다고 한다.
추사는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義理)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세한도라는 길이 남을 작품을 그려 보냈다고 한다.
가장 어려울 때 추사를 생각해 준 사랑하는 제자에게 추사는 세한도를 주면서 요즘말로 가볍게 ‘영원불멸(永遠不滅)’이라 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안으로 다스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 애절함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흔들고 있다.
개인의 일생에 있어 유배란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니겠으나, 추사에게만은 제주의 유배생활이 자신의 삶과 예술을 되돌아보며 비로소 독자적인 사상과 예술의 세계로 승화(昇華)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로 잊지 말자‘ 이 말은 세한도에 인장으로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말이다. 장무상망은 추사가 먼저 쓴 것이 아니라 중국 섬서 성 순화에서 출토된 와당(瓦當)에서 발견된 글씨라고 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말처럼 살아있는 것은 모두 쓰러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이 나눈 그 애절한 마음은 이렇게 오늘도 살아서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두어 명은 있어야 인생을 헛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