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과 충서(忠恕)/ 가톨릭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 오 프란치스코 수사
공자의 근본정신을 홀로 후세에 전했다고 알려진 증자는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논어 이인 15)”라고 하였다. 충서가 공자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이다. 이때의 충(忠)은 중심(中心)이요 서(恕)는 여심(如心)이다. 중심은 속으로 들어가는 마음이요, 여심은 옆으로 같아지는 마음이니,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하느님을 만나고, 옆으로 같아지면 이웃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이웃을 통해서 만나게도 된다. 그러니까 ‘충’은 중심을 지닌 마음, 흔들리지 않고,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도 않는 마음을 나타내며, ‘서’는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남을 대하면서 살아가는 마음이다. 공자는 이것을 ‘하나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라 했고, 예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루가 10,42)라고 했다.
논어의 중심 사상이 ‘인과 충서사상’이라고 한다면, 신약성경의 중심 사상은 곧 ‘황금률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고 나에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다. 진리는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다. 바로 여기에서 공자의 충서사상이 나오고 예수의 황금률사상이 나온다.
공자의 인생 이상은 ‘인(仁)의 실천’이다. 이른바 ‘인’이란 자기가 사회에서 자립하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도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이 일마다 성공하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도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니, 이것은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원칙이다. “내가 서려고 하면 남도 세워주고, 내가 도달하려고 하면 남도 도달시켜준다(논어 옹야 28)”는 것은 적극적인 방면에서 말한 것이다. 반면에 소극적인 방면에서 말한다면 곧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면에서 말한다면, 공자의 제자 자공이 평생 행동의 준칙으로 삼을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대답하기를 “아마도 서(恕)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논어 위령공 23)”고 하였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 ‘인’의 기본 원칙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서려고 하면 남도 세워주고, 내가 도달하려고 하면 남도 도달시켜준다(논어 옹야 28)”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그의 제자 증자에게 “내 도(道)는 하나로써 꿰뚫었다(논어 이인 15)”라고 말했는데, 다른 제자가 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증자에게 묻자, 증자는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논어 이인 15)”라고 대답하였다. 공자는 자기 학설에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기본 사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증자의 해석을 빌리면, 그 기본 사상은 곧 ‘충서’이다. ‘충’이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도울 때, 자기의 진심과 성의를 다하는 것이고, ‘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일이관지’의 관념은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도덕규범이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에는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황금률’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과 공자가 말한 “내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말은 뜻이 서로 통한다. 예수가 가르치는 성경의 골자 또한 공자의 ‘충서사상’과 아주 흡사함을 볼 수 있다.
그들 중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5-40)
여기에서 예수는 황금률을 새롭게 각색한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다른 모든 사람이 제시한 규정은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하는 규범은 이웃에게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행해야 하는 사랑이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 차이는 단지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그릇된 일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바라는 모든 선(善)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예수는 인간의 ‘자기애(自己愛)’를 이웃 사랑의 규범과 척도로 세운다. 그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포용하는 것으로써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대학』에서는 ‘혈구지도(絜矩之道)’라고 한다. 여기서 ‘혈(絜)’은 헤아린다는 뜻이요 ‘구(矩)’는 잣대라는 뜻이니, 흔히 목수들이 사용하는 곡척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반듯한 자로 헤아리는 도(道)’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기 마음을 깊이 헤아려서 가족들에게 베풀면 그로써 집안의 기틀이 잡힐 것이고, 위정자가 자기의 선한 마음을 헤아려서 그 마음을 미루어 국민들에게 베풀면 그로써 나라의 기틀이 잡힐 것이고, 자기 마음을 헤아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면 그로써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헤아림의 근거는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구(矩)는 곧 마음의 잣대이다. 목수는 물건을 재는데 잣대를 잣대로 삼고, 군자는 사람을 헤아리는데 자기 마음으로 잣대를 삼는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인간한테 있다. 그러기에 문제를 풀 열쇠 또한 인간이 아닌 다른데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열쇠를 지금 내가 쥐고 있다. 그 열쇠는 사랑의 열쇠다.
논어 38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