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功行賞(논공행상)(김전호)
論功行賞(논공행상)
-공로를 의논하여 상을 준다.
-공적이 많고 적음에 따라 알맞은 상을 내림.
이 말은 「한비자(韓非子)」 ‘팔설(八說)’ 에 “공을 따져 상을 주고 능력을 가늠해 일을 주어야 한다(計功而行賞 程能而授事).” 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논공행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을 논하고 수고를 계산하는데, 일찍이 한 번도 법률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論功計勞 未嘗失法律也).” (「관자(管子)」 ‘칠법(七法)’)
“공을 논하고 상을 주는데, 소하의 공이 가장 컸다(論功行賞 蕭何功最盛).”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운 데에는 개국공신들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후(後)에 그는 공적(功績)의 많고 적음에 따라 깍듯이 예우해 주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인 것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지략은 낚시꾼 출신인 강태공(姜太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으므로 그를 제(齊)에 봉했다. 또 많은 공신과 왕족을 제후(諸侯)에 봉함으로써 주(周)나라는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게 된다.
항우(項羽)는 진(秦)을 멸망시킨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했다. 총 18왕(王)을 봉했지만 불만을 품지 않은 자(者)가 없었다.
그중 가장 불만이 많았던 자(者)가 유방(劉邦)이었다. 결국 항우(項羽)를 타도하고 한(漢)을 세우니 잘못된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왕조가 바뀐 사례이다.
당태종(唐太宗 : 李世民)은 아버지 이연(李淵 : 唐高祖)을 도와 수(隋)나라를 무너뜨리고 당(唐)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혁혁한 공(功)을 세운 사람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었으므로 고조(高祖)는 왕위를 큰 아들 이건성(李建成)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극도의 불만을 품은 그는 마침내 변을 일으켜(玄武門의 變)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삼국시대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조예(曹叡)를 황태자로 정하고,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조진(曹眞)과 조휴(曹休), 유학과 법에 정통한 진군(陳群), 그리고 원로인 사마의(司馬懿) 등 네 사람에게 뒷일을 간곡히 부탁했다.
문제(文帝)가 죽고 명제(明帝) 조예(曹叡)가 그 뒤를 이은 지 석 달 후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군대를 이끌고 위(魏)나라의 강하군(江夏郡)을 공격하자 태수인 문빙(文聘)이 이들과 맞섰다.
조정에서 응원군을 보내 문빙(文聘)을 지원하려 하자 명제(明帝)가 말했다.
“오(吳)나라는 전통적으로 수전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을 올라온 것은
우리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文聘)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공수의 판도가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과연 얼마 뒤 손권(孫權)은 후퇴하고 말았다.
오(吳)나라 장군 제갈근(諸葛謹)과 장패(張覇)도 양양(襄陽)으로 침략했지만 무군대장(撫軍大將) 사마의(司馬懿)가 이것을 격파하고 장패(張覇)의 목을 벴다. 조휴(曹休)도 심양에서 오(吳)나라의 별동대를 격파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위(魏)나라 조정은 각자의 공적에 차이를 두어 상을 내렸다.(論功行賞各有差.)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명제기(明帝紀))
241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은 전종(全琮)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위(魏)나라를 치기 위해 회남(淮南)에 출병시켰다. 전종(全琮)은 위(魏)나라 대장 왕릉(王凌)과 작피(芍陂)에서 격돌했는데 싸움에 대패하고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의 장수가 죽었다.
당시 고담(高譚)의 아우 고승(顧承), 장휴(張休)는 수춘(壽春)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구원하러 가서 왕릉(王凌)의 공격을 막아 냈다.
당시 전종(全琮)의 조카 전서(全緖)와 전서(全瑞)도 장군이었는데 위군(魏軍)의 공세가 늦추어진 틈을 타 반격해 들어가 물리쳤다.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데 적을 막은 공을 크게 인정하고 적을 물리친 공을 작게 인정하여(時論功行賞 以爲駐敵之功大 退敵之功小), 손권(孫權)은 고승(顧承)과 장휴(張休)를 정장군에 임명하고 전서(全緖) 형제를 부장군에 임명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고담전(高譚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