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庶幾中庸 勞謙謹勅(서기중용 노겸근칙) ① (백운)
【本文】 庶幾中庸 勞謙謹勅 서기중용 노겸근칙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공로(功勞)에 겸손(謙遜)하며 삼가고 경계(警戒)하라.
【訓音】
庶 무리 서 幾 거의 기 中 가운데 중 庸 떳떳할 용
勞 수고할 로 謙 겸손할 겸 謹 삼갈 근 勅 삼갈 칙
【解說】
지난 장에서는 맹자(孟子)가 본성(本性)을 돈독히 했음을 밝힌 맹가돈소(孟軻敦素)와 강직(剛直)한 성품의 소유자인 사어(史魚)가 바름을 견지하여 직간(直諫)을 했다는 사어병직(史魚秉直)에 대하여 공부했는데, 이번 장에서는 중용(中庸)의 길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서기중용(庶幾中庸)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부터 알아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서(庶)는 엄(广) + 의 회의자(會意字)로, '엄(广)'은 '지붕'을 뜻하고,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은 그릇 속의 것을 불로 찌거나 끓이는 형상이며, '자(煮)'의 원자(原字)라고도 하고, 옥내를 그슬러 해충을 제거하는 뜻이라고도 합니다. 가차(假借)하여, '여러'의 뜻으로 사용합니다.
또는 '엄(广)'은 '지붕'을 뜻하고, ''은 고문에 의하면 '광(光)'의 뜻으로, 지붕 밑에 등불이 많이 빛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붕 밑에 등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는 생각에서 '여러, 많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기(幾)는 유(幺幺) + 수(戍)의 회의자(會意字)로, '유(幺幺)'는 자잘한 실의 상형(象形)이고, '수(戍)'는 '지키다'의 뜻입니다. 전쟁시에 수비병이 품는 미세한 마음씨의 상태로부터, '희미하다'의 뜻과 '위험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근(近)'과 통하여, '가깝다'의 뜻을 나타내며, '기(祈)'와 통하여, '바라다'의 뜻을 나타내며, 가차(假借)하여, '어느 정도'의 뜻도 나타냅니다.
중(中)은 구(口) + 곤(丨)의 지사자(指事字)로, 사방을 두른 담[口] 안에 물건을 넣는 모양[丨], 또는 어떤 물건의 한가운데를 뚫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안, 속'을 나타내며, 화살이 과녘 한가운데를 맞춘다는 뜻에서 '맞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용(庸)은 경(庚) + 용(用)의 형성자(形聲字)로, '경(庚)'은 양손에 절굿공이를 든 형상이고, '용(用)'은 종(鐘)의 상형으로, '사용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종이나 절굿공이 등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다, 집어 들다, 사용하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전(轉)하여, '일정하게 변치 않다'의 뜻을 나타내며, 가차(假借)하여, 반어(反語)인 '어찌'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또, 경(庚) + 용(用)의 회의ㆍ형성자(會意 形聲字)로 보아, '경(庚)'은 '경(更)'과 같이 일을 고쳐 바꾼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새롭게 고쳐 바꾸어 소용에 이바지한다는 데서 '쓰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서기중용(庶幾中庸)은 '중정(中正)의 바른 길인 중용(中庸)의 길 바란다면'으로 새겨집니다. 또는 '바라건대 현인(賢人)의 길 중용(中庸)의 길이어니'로도 새겨집니다. 여기에서 '서기(庶幾)'를 '바람, 바라건대'로 새겼습니다.
또, '서기(庶幾)'는 '가까움'을 뜻합니다. 그래서 서기중용(庶幾中庸)을 '중용에 가까워지려면'으로도 새깁니다.
'서기(庶幾)'는 또 현인(賢人)을 뜻합니다. 공자(孔子)께서 그의 제자 안회(顔回)를 일컬은 데서 유래합니다. 안회가 도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회는 공자께서 가장 아낀 제자입니다.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안씨의 자식이(顔子) 그 도에 거의 가까운져!. 착하지 않음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함이 없으며, 착하지 않음을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하지 않았다.(顔氏之子, 其殆庶幾乎! 有不善, 未嘗不知, 知之, 未嘗復行也.)" 라고 한 데서 온 말입니다. 《繫辭傳下》
중용(中庸)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름을 말합니다. 즉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늘 변함없는 도리를 말합니다. 중용은 인간의 본성(本性)으로서 중(中)은 마음의 근본실체를 말하고, 용(庸)은 마음의 평상적인 작용을 말합니다.
중용(中庸)은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용(中庸)》은 본래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 수록되어 있는 편명(篇名)인데 후에 독립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중용(中庸)의 진리를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이 전해지는 것을 잃을까 근심하여 지은 것이라 합니다.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제27장(第二十七章)」에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용의 덕은 지극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 덕을 소홀히 한 지가 오래되었구나."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중용(中庸)은 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이성(理性)으로서 치우치지 않도록 바로잡는 덕입니다. 그런데 이 지극한 덕을 사람들은 소홀히 하여 이를 행하는 이가 드물음을 공자께서는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中)이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고, 용(庸)은 마음의 평상적인 작용을 말합니다.(中者無過無不及之名也 庸平常也)
공자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반(反)한다(君子中庸 小人反中庸).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맞게 하는 것이요(君子之中庸 君子而時中),
소인의 중용은 소인으로서 꺼리는 것이 없다.(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
하였습니다. 군자는 중용의 도리를 행하나 소인은 늘 소인짓을 하기에 중용과는 거리가 먼 반대로 행하면서도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중용의 도는 지극한 것인데도 이를 행하는 이는 지극히 드물기만 합니다. 이에 공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셨습니다.
"중용의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나는 알겠다.
앎이 많은 자[知者]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愚者]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용의 도가 밝아지지 않음을 알겠다.
어진 자[賢者]는 지나치고 못난 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서 이르기를,
"희ㆍ노ㆍ애ㆍ락(喜怒哀樂)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이란 천하의 대본(大本)이요,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는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은 제대로 자란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인간의 정(情)을 흔히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라 하여 칠정(七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말했습니다. 이 정(情)이 발하지 않은 것을 이러 성(性)이라 하는데, 이 성(性)이 편벽되거나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 합니다. 정(情)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정의 바름이라 하고, 어긋나지 않기에 화(和)라 하였습니다. 정(情)이 발하여 중(中)에 의해 잘 조절된 것이 화(和)입니다. 그래서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라 하고, 화(和)는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니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하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각기 제자리에서 제대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중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천지만물은 조화를 잃어 엉망이 되는 것이니 중화로 천지가 존재하고 중화로 만물이 화육(化育)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유교의 중용(中庸)은 마음의 감정이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평상(平常) 그대로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희노애락에 대하여 지나치게 치우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이런 중용의 마음가짐은 악(惡)을 버리고 선(善)으로 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의 차이
유교(儒敎)에 중용(中庸)이 있다면 불교(佛敎)에는 중도(中道)가 있습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는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 같은 것이 아니냐 하는 분도 있고, 사상적이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중도(中道)란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유(有)와 무(無), 생(生)과 멸(滅) 등의 양변(兩邊)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그 중간도 아닌 절대 진리의 도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의 양 극단을 떠난 올바른 수행법도 중도라 합니다. 여기서 '중(中)'은 '정야(正也)'이니 '바르다'는 뜻입니다. 적절히 조화된 '가운데'가 아닙니다.
중도(中道)는 양변(兩邊)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融合)는 사상입니다. 선(善)과 악(惡), 유(有)와 무(無) 등 상대적인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도입니다.
이는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가리킵니다.
중생은 늘 '있다 - 없다', '좋다- 나쁘다', '나다-너다' 등 상대적 양변에 집착하여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곤 합니다. 이 양변에 집착하면 번뇌만 낳을 뿐입니다. 세간의 법은 모두 상대법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법은 독립적으로 이루지지 않아 상대에 의지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같은 상대법은 생멸법(生滅法)인데 생멸법은 불교가 지향하는 법이 아니어서 구경(究竟)에 가서는 버려야 할 법입니다. 그래서 양변을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번뇌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생깁니다. 무명(無明)은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하게 하는 동인(動因)입니다. 양변을 떠나라는 것은 이런 무명(無明)으로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디. 무명을 벗어나 생사로부터 해탈시키고자 하는 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유교의 중용(中庸)은 천명(天命)을 따르는 군자가 갖추어야 하는 덕으로 언제나 중정(中正)을 잃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는 덕목이라면, 불교의 중도(中道)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중도(中道)를 중생으로 하여금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깨닫게 하고자,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는 팔정도(八正道)를 행하여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실상(實相)을 보는 눈[眼]을 뜨게 하고, 지혜를 증득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여읜 적정(寂靜)의 세계, 열반(涅槃)으로 이끌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과 중도(中道)는 이런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중도(中道)로 세상을 바라보면 일체 만법이 불교가 아닌 것이 없으니 중용(中庸)도 중도(中道)에 융합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일 중용(中庸)도 이루지 못하면 어찌 중도(中道)를 행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상으로 중용(中庸)과 중도(中道)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천자문으로 돌아와서 중용(中庸)은 마음의 감정이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평상(平常) 그대로 항상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을 이룸을 말합니다. 그런데 서기중용(庶幾中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뒤에 이어지는 노겸근칙(勞謙謹勅)입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이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