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말 태양의 말(정지아)

작성자이계양|작성시간26.06.08|조회수45 목록 댓글 2

​바람의 말 태양의 말(정지아)

 

어머니와 아래윗집에 산다. 하루 두 끼 밥을 차려 어머니 집으로 간다. 겨우내 어머니의 첫마디는 한결같았다. “아이, 안 춥냐?”

쉰 넘으면서 수시로 열이 치솟는 갱년기 증상에 시달리는 중이다. 몇 년째 사라지지 않는 열감 때문에 죽을 맛이라고 수백 번 말을 했지만 아흔일곱 된 어머니는 그 말은 까맣게 잊고 내 옷차림에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안 춥다는 말을 매일 두 번씩 백 번도 넘게 했다. 참다 못해 어느 날 내가 말했다.

“엄마, 추운 날 어떤 사람이 옷을 얇게 입었어. 그러면 세 가지쯤 이유가 있겠지. 첫째,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는 바보다. 둘째, 추운데 가난해서 입을 옷이 없다. 셋째, 안 춥다. 나는 어느 쪽이겠어? 엄마 딸이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는 바보겠어, 옷 사입을 돈이 없겠어? 안 춥다니까. 안 춥다고!”

이런 게 나의 말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 논리정연한 말, 명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 나는 그런 말이 좋은 말이라 믿었고, 그런 말을 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어머니의 말은 다르다. “하긴 근다이. 글긴 해도 혹시 오늘은 추울랑가 모릉게.”

그렇긴 해도 혹시 모른다니. 내가 하룻밤 새 바보가 될 리도 없고 있던 옷이 없어질 리도 없지 않은가. 요즘은 거의 줄었지만 어머니를 모시기 시작한 초반에 나의 말은 어머니의 말과 늘 부딪쳤다. 두 시쯤 잠든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물었다. “아이, 먼 일이 있냐? 밤늦도록 불이 안 꺼지등마. 먼 일이 있는가 싶어 나가 밤새 잠을 설쳤다.”

어머니 걱정할까 싶어 그날은 착한 어린이처럼 열 시에 불을 껐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 먼 일이 있냐? 웬일로 일찍 불이 꺼징게 먼 일이 있는가 싶어가꼬 나가 밤새 잠을 설쳤다.”

이게 말인가 막걸린가. 어이가 없어 내가 되물었다. “자, 시간을 딱 정합시다. 내가 몇 시에 자면 걱정을 안 할 거야? 열한 시에 자면 걱정을 안 할 거야? 열두 시에 자야 걱정을 안 할 거야?”

똑부러진 내 말에 어머니는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호강에 초 치는 소리지야? 하도 걱정할 것이 없응게 안 그냐. 다 니 덕이다. 니 덕에 잘 묵고 펜히 상게 나가 요새는 참말로 아무 걱정이 없어야.”

걱정에 밤잠 설쳤다면서 내 덕에 아무 걱정이 없다니, 그야말로 모순적인 말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모순덩어리 말이 내 차가운 가슴을 녹인다. 어머니 말은 정확하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그저 막연한, 근거 없는 걱정뿐이다. 그 걱정은 나를 향한 오롯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추우면 추울까 걱정, 더우면 더울까 걱정, 안 풀리면 안 풀려서 걱정, 잘 풀리면 저러다 방심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 사랑하면 당연히 걱정이 된다. 사람의 마음도 일도 똑부러진 내 말처럼 똑부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말이 엉성한 어머니 말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햇님과 바람’이라는 이솝 우화에서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바람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도 바람의 말이 아니라 태양의 말이다.

아직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욱더 내 말은 바람의 말이었다. 한 학생이 어떻게 하면 문장을 잘 쓸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차갑게 되물었다. “문장을 잘 써야 문창과를 오는 거 아닌가요?” 학생은 무참한 얼굴로 달아났고 다시는 내 곁으로 오지 않았다. 나는 기억도 못 하지만 냉정하고 정확한 내 말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틀리지 않았다고, 정확하다고 좋은 말이 아니다. 좋은 말은 사람을 숨 쉬게 하고 살게 한다. 어머니의 말이 그렇다.

태양처럼 세상 어디나 구석구석 따스이 내리쬐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어머니 곁을 오래 지키다 보면 어머니의 말이 나의 말을 녹여주지 않을까, 매일매일 그런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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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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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취원 | 작성시간 26.06.08 아흔다섯 내 엄마의 모순덩어리 말들, 태양의 말이 맞네요. 저의 바람같던 말들이 자취를 감춰가고 있어요.
    엄마의 사랑을 자식이 감히 이길 수 있겠습니까.
  • 작성자leehan202 | 작성시간 26.06.09 맘을 녹여주는 태양같은 말.
    그러고싶습니다.
    바람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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