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되어준 사람 (1)

작성자취원|작성시간26.06.16|조회수29 목록 댓글 2



해가 되어준 사람 (1)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 사는 일이라고 했던가.
24년 전, 전혀 예기치 않는 일로 남편이 실직을 했다. 한 땀 한 땀 구슬땀 흘려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내려앉아 허사가 됐다. 순풍에 돛단 듯 유유한 삶에 제동이 걸렸다.
설상가상, 뇌출혈로 1년여 혼수상태였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심신의 피로가 겹친 난 생물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그레이브스병에 걸렸다. 그레이스병의 뚜렷한 병징이 눈과 온몸에 나타나 드러눕고야 말았다. 병이 깊고 합병증까지 수반되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실직은 단지 일자리만을 잃는 게 아니었다. 남편은 방향 잃은 돛이 되어 우두커니가 되었다.
숨이 멎은 듯 고요하기만한 집안의 정적은 중 1년 딸, 초 6년 아들에게서도 활기를 거둬갔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중압감은 해결의 실마리 없는 그를 더 표류하게 했다.
우린 모두가 앓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춘기에 있는 딸이 걸렸다.
표면적으로 딸은 평소와 다름없이 제 시간에 등하교를 하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나갔다.
몇 달 사이에 철이 부쩍 들게 느껴졌다.

그날도 딸은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다.
배웅을 한 후 딸 방문을 열었다. 늘 하던 대로 환기하고 정리 정돈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항상 심란을 일으켰던 방이 아주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평소 잔소리깨나 들었던 방 정리 정돈이었다. 울컥했다. 엄마의 빈자리를 용케도 잘 채워가고 있는 게 대견하기보다 아팠다. 책상 위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언뜻 책상 위에
“아빠! 힘내세요”
라고 쓰인 분홍색 봉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빠를 염려하는 중1 딸의 깨알 같은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였다. 누구의 위로도 격려에도 마음 젖지 못한 남편이었다. 고작 14살 어린 딸은 생의 고갯길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빠의 외로움을 알았던 것이었다.
딸은 제 몫으로도 충분치 않은 사랑을 풀어 아빠의 허허로운 마음을 쓰다듬어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아빠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갚음이었을까~
그 후로 딸은 100통의 편지를 쉼 없이 썼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아직도 차마 물어보지 못한 채 뭉클한 가슴만 안고 있다. 때론 아빠 머리맡에 때론 우체통에 때론 서재에 일곱 색깔 무지개로 아빠를 응원했다.

아빠에게 햇빛이 되어 아빠를 햇빛 같은 사람이 되게 한 딸이다. 이 100통의 편지는 아직도 가슴에 따뜻한 햇빛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남편은 고백한 바 있다.
딸이 아빠에게 그랬듯이 남편 또한 외롭고 아프고 춥고 힘든 사람들에게 따스한 햇빛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주위를 살피며 살아가고 있다.

해는 만고에 지는 법이 없으리니.
누구에게나 누구든지 해는 뜨고 해가 될 수 있는 일.
서로에게 해가 되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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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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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아 | 작성시간 26.06.16 참으로 훌륭한 따님을 두셨네요.
    눈물 떨구며 읽었습니다.
  • 작성자leehan202 | 작성시간 26.06.16 실직은 단순히 매달 들어오는 수입만 잃은것이 아닌줄 압니다.
    네가족 모두가 실의에 잠겨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눈시울이 더워지고 절로 한숨을 내쉽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이겨내고 오늘날 굳건히 일어선 교수님이 자랑스럽습니다.
    하하의 나침반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주시는 교수님을 비롯 가족 모두에게도 고개숙여 예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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