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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이율배반

작성자다다|작성시간08.11.18|조회수166 목록 댓글 0



"This is not a pipe." The Treachery Of Images (La trahison des images) LA,아트뮤지엄 소장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 작,

슈레알리즘의 초현실주의의 논쟁을 일으킨 작품이다.

 

 



René Magritte The Son of Man, oil painting, 1964

 

 



Gonconda. 1953. Oil on canvas. 81 x 100 cm. The Menil Collection, Houston, TX, USA.

 

 

 

 

René Magritte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작은 마을 레시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가족이 여러번 이사하였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을 여러 다른 장소에서 보냈다.  아버지는 양복점을 경영하였고, 결혼 전에 양장점과 제모점을 경영하였던 어머니는 1912년 샤틀레의 샹부르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영향은 20년대 후반의 몇몇 그림에서 느껴지는데 - 중심의 역사(1927), 사랑하는 사람들(1928) - 이 그림들에 나타나는 천으로 덮혀진 인물들의 머리는 강으로 인양되었을 때 셔츠로 얼굴이 덮혀 있었던 어머니 시신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의 가족은 다음해 샤를르루와로 이주하였으며  그 도시에서 조제트 베르제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1920년까지 만나지 못하다가 1922년 다시 만나 결혼한 후에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다.

 

 



Memory. 1948. Oil on canvas. 59 x 49 cm. Patrimoine culturel de la Communauté français de Belgique.

 

 

어린 시절 마그리트는 여름 햇빛이 한창일 때 친구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붙어 있는 어두운 납골당을 자주 가곤 했다고 회상한다. 납골당 출구 가까이에 있는 포플러 나무에 투영된 화가의 이미지는 막연하게나마 회화의 계시적인 힘을 가진 마술적 요소와 같다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출발은 1916년에 들어간 브뤼셀의 미술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어러마 후 이탈리아 미래파 화가들의 작품, 특히 키리코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게 되나 그 시대의 다른 여러 화가들처럼 처음에는 인상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20년대 초반 마그리트는 피터스 라크로와 가(家)를 위해 색종이 디자인을 하고 광고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다.  동시에 그와 함께 벨기에 초현실주의를 현성하게 되는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도 가지게 된다.  피에르 브르조아, E.L.T. 메젠느, 카미유 괴망스, 마르셀 르콩트, 폴 누제, 앙드레 수리 등이 그들이다.

 

 

20년대 중반 그는 대상의 외향을 아무 꾸밈없이 차갑게 재현하기 위해서 전통회화기법과 색상의 대비를 미련없이 포기하였다.  원칙적인 시각효과로서 대상들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는 앞으로 제작될 그의 작품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의 전 창작 시기동안 계속하여 나타났다.  1927년 브뤼셀의 엘 센타우르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때 이미 이러한 그의 작품관이 정립되어 그림에 나타난다.  마그리트와 그의 부인은 3년 동안 파리 근교의 페로 쉬르 마른느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여기에서 파리에 화랑을 연 괴망스의 중재로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화가드르과 접촉을 시작하였다.  마그리트는 이들과 함께 - 막스 에른스트, 장아프로, 미로, 달리 - 1928년 그의 친구이자 가까운 유대관계를 지속해 온 괴망스의 화랑에서 주최된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모든 활동에 가담하였고 "초현실주의 혁명"의 출간에도 힘썼으며, 이 잡지의 마지막 호에 자신의 회화적 이상을 확실하게 선언한 '단어와 이미지'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The Red Model. 1934. Oil on canvas. 183 x 136 cm. Museum Boymans-van Beuningen, Rotterdam, Netherlands

 

 

 

비록 뜨겁지도 소원하지도 않은 관계였지만 마그리트는 죽을 때까지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는 자신의 회화관에 충실하여 그의 회화적 독자성을 지켜갔다.  회화적 일관성이 너무나 독보적이어서 그의 작품을 통해 시대 구분이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1930년에는 다시 브뤼셀에 정착하였으나 파리의 그룹과는 계속적으로 접촉하여 1934년 "초현실주의는 무엇인가"라는 브르통의 책 표지에 '폭력'이라는 작품을 실었으며, 또 1937년 '미나타우로' 10호의 타이틀 표지에 작품을 실었다.  또한 여러 다른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에도 참여하여 뉴욕에서 그의 첫 전시를 개최한다.

 

2차 세계대전은 상승일로의 화가에게 잃어 버린 시간과 같았다.  전쟁이 끝날 부렵 그는 벨기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30년대에 두 번이나 이 단체에 참가하였으나 예술적 문제에 있어서의 반동적인 입장은 그로 하여금 곧 탈당하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하여 벨기에의 옛 초현실주의 동료인, 노지 스쿠테네르와 마리엔과 같이 공동 작업하여 현실 참여적인 초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회복하였다.

 

   1943년과 1948년에 그의 작품에 있어서 기존 작품과는 단절을 보이는 두 시기를 맞게 된다.  그 하나는 르누아르 시기이며 또 하나는 바세 또는 투박한 사대라 불리우는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에는 르누아르의 마지막 시기에 그려진 여성 누드의 양식에 가까운 회화적이고 붓자국이 잘 드러나는 양식의 몇 작품을 완성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매끄럽고 차가운 관습적인 특성을 무시하면서 큰 붓질로써 기본적인 형태를 그린 25점의 작품이 이 시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은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되지 않고, 20년대 후반부터 발표되었던 그만의 양식으로 곧 되돌아온다.

 

 

 

The Large Family. 1963. Oil on canvas. 100 x 81 cm. Private collection.

 

 

 

 

 1950년대에는 브뤼셀의 왕립 극장 회랑의 천장이나 - 1952년 파울 델보와 함께 그의 그림을 전시한 장소이기도 하다 - 크노케 르 쥬트의 카지노 응접실을 장식하는 등 여러 벽화와 장식 제작이 눈에 띈다.  1954년 브뤼셀의 "미술 궁전"에서의 대회고전은 그를 벨기에 최고의 현대미술가로 만들어 주었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잡지 제작에도 협력하였고 1957년부터 조제트와 그의 친구들이 출연하는 몇몇 단편 영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1967년 사망 직전까지 뉴욕의 현대 미술관의 대회고전을 포함한 많은 국제적인 전시를 개최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이미지는 모든 현대 미술의 뛰어난 특징들 사이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그리트는 1927년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기 이전부터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 벨기에 화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작품들은 20년대 초에 알게 된 키리코의 작품이었다.  

 

 



L'Avenir des statues. 1932. Oil on plâtre. 33.5 x 16.5 x 19 cm. Wilhelm Lehmbruck Museum, Duisbourg, Germany.

 

 

 

파리 초현실주의 예술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문필가인 브르통, 아라공, 에르와르, 아르쿠르에 의하여 구성되어졌고 그 중심적 내용은 꿈과 욕망의 세계를 해방시킴으로써 예술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채택하였다.  초현실주의 회화는 시인들에 의해서 여러 실험을 통하여 개척된 길을 따라갔다.  가장 힘든 것은 자동기술법적 과정들이 조형 예술가들에게는 가능성의 한계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이 과정을 포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화가들은 그들의 회화작업의 중요한 원천으로서 프로이드적 무의식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였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꿈과 욕망이 그의 회화의 기원이 아니었으며 일상 현실에 대한 내용의 역전을 통해 낯설은 현실을 지성적으로 모색했다.  아마 이 때문에 그와 브르통 - 다시 말해서 교조적인 초현실주의 - 과의 관계는 항상 미약했으며 거리감을 두었으나 한번도 완전한 결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Black Magic. 1933/34. Oil on canvas. 73 x 54.4 cm. Musée Royaux des Beaux-Arts, Brussels, Belgium

 

 

 

마그리트의 회화는 친숙한 대상들과 재현된 대상들 사이에 비정상적인 관계를 이룩하면서, 객관적인 방법에 의한 세부 묘사에 따라 재현된다.  이런 선회는 단순한 탈문맥성에서 출발 가능한 다양한 메커니즘으로부터(공 모양, 또는 나무 손잡이로 형성된 숲, 하늘을 날아다니는 종) 갈등적인 연상방법으로(가슴은 눈으로, 성기는 입으로 형성된 얼굴이자 동시에 누드 토르소), 또는 모순적인 방법에 의해(열려진 문 위에 걸려 있는 구름, 재현된 실제 풍경과 그려진 풍경과의 혼돈) 창출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그리트는 마치 광고언어처럼인접성과 유사성에 의해 대상들 사이에 세워진 연상작용에서 모든 가능한 조자가을 뽑아 내어 이개념적 조작을 점점 더 조탁하고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근접성에 의하거나 또는 대립에 의한 사물들이 가지는 관계성을 지속하면서, 사과나 태양과 같은 둥근 모양으로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게 하거나, 나뭇가지처럼 나뭇잎의 잎맥 위에 새들을 앉힌다든지 하여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엉뚱한 결합을 통해 다른 사물로 대상들을 변형시킨다.

 

 



La Thérapeute. 1941. Gouache sur papier. 47.6 x 31.3 cm. Private collection.

 

 

 

마그리트의 이미지는 마치 은유와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이은유는 시적인 본성을 지진다.  이미지들은 가끔 불안정하지만 달리, 에른스트와 다른 초현실주의자의 이미지처럼 무섭게 소름끼치는 것은 아니다.  마그리트의 회화는 어떠한 비극적 파토스도 현실과 신비 사이의 경계 없는 연속에 의해 와해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제작한 광고 그림에서처럼 방관자로서 느끼는 중성적인 형태로 재현되어져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의 조형적인 표현력의 부재와 관련된다.  이러한 선택은 마그리트 회화의 개념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키며 그림에 나타나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와 마그리트의 작품에서 보이는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성격을 근접시키고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차가운 회색조의 단조로움 안에는 사물들과 우리 사이의 연게성의 존재와 부재에 대한 모든 암시의 힘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는 20세기 예술에 있어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회화적 사조보다 개념적 사조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지성적인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The Natural Graces.1967. Bronze. H:107 cm. Patrimoine culturel de la Communauté français de Belgique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르네 마그리트 전시회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서울 시립미술관 공동으로,

내년 4월1일까지 국내 전시

 


날아가는 새와 알이 있는 둥지를 대비한 대표작 ‘회귀’(1940년). 르네 마그리트는 익숙한 사물들을 배치해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ADAGP,Paris,2006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뭔가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낯익은 형상들을 결합한 그림인데도 이미지나 느낌은 낯설다. 그림과 관객의 역동적 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철학자 미셀 푸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닮음과 비슷함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세계와 우리 자신들이 전혀 새롭게 존재하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바로,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다. 그는 20세기 초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빛의 제국’ 연작 등으로 관습적으로 각인되어 온 사물의 존재 방식을 깨는 그림들을 제시했다. 철학적 사유의 화가로 통하는 그는 “그리기의 예술은 사유의 예술”이라고 했다.

그 마그리트가 한국에 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벨기에 왕립미술관과 함께 19일∼내년 4월 1일 ‘르네 마그리트’전을 마련한다. 마그리트 전시회가 아시아에서 대규모로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갤러리 현대의 도형태 대표는 “마그리트 작품들은 개인 소장품이 많아 모으기 어렵다”며 “마그리트 전시회는 전시 기획의 끝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전시에서는 ‘빛의 제국’ ‘회귀’ ‘신뢰’를 비롯한 유화 대표작 70여 점과 드로잉 판화 등 120여 점. 작가의 사진이나 친필 서신도 함께 선보인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무의식 꿈 판타지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드러난 몰인간성에 기겁한 일단의 예술가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무의미를 추구한 다다이즘의 뒤를 이어서 초현실주의가 나타난 것.

마그리트는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추구해 온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달리, 사과 돌 새 벨 등 낯익은 대상을 엉뚱한 환경에 배치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으로 충격과 함께 신비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물을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고립’, 이질적 사물을 결합하는 ‘사물의 잡종화’,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을 한 그림에 넣은 ‘패러독스’ 등이 그의 기법이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선수’(1927년). 수수

전시작은 마그리트 작품 중 정말 수수께끼 같은 ‘보이지 않는 선수’, 날아가는 새와 알의 둥지를 대비한 ‘회귀’, 신사의 초상에 파이프를 갖다 둔 ‘신뢰’, 평야에 직육면체의 거대한 돌덩이 구조물을 그린 ‘대화의 기술’ 등이다. ‘고문당하는 여사제’ ‘신은 성자가 아니다’ ‘두려움의 동반자’ ‘곤충들의 삶’도 선보인다. 문제작 중 하나로 기존 언어와 그림문법에 대한 반성을 호소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29년)는 해외 다른 곳에서 전시되고 있어 오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언어(문자)로 진술되거나 형상을 통한 이성의 사고를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으며 이 시도는 결국 신비와 환상과 미스터리를 자아냈다. 광고 디자이너로 일한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가상 현실을 다룬 영화 ‘매트릭스’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종래 언어 관습이나 형상을 부정하지만, 그 작품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은 문자로 된 제목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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