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5일
오래된 물건
하나둘씩 오래된 가전제품을 떠나보내고 있다. 20여 년 동고동락을 한 전우들이다. 냉장고를 20년 넘게 사용했다. 가전제품은 살 때 좋은 것을 산다. 김치냉장고도 처음 산 제품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모델은 구식이지만 아직도 신선하게 김치를 보관해 주는 고마운 친구다. 사용하는 게 조금 번거로울 수 있지만, 여전히 김장김치와 소주와 맥주 보관으로는 최고의 성능을 발휘한다.
텔레비전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요즘 보기 드문 뒷배가 불룩 튀어나온 덩치가 산만 한 불곰 같은 친구다. 가족이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잘 나오니까 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거실에 턱 하니 버티고 있던 텔레비전은 레트로 촬영 소품으로 사용하면 좋을 만했다. 요즘은 빈티지 소품으로 사용하는 귀한 존재가 되었다. 불곰 텔레비전이 “찌지직” 소리를 내면서 화면이 흔들리다가 멈춰버렸다. “아직도 이런 텔레비전을 쓰는 집이 있군요.” 하면서 놀라던 기사님의 표정이 생각난다. 덩치가 산만 한 불곰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 나가는 데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하나씩 우리는 이별하고 있다.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도 우리 가족의 성향이다. 아이들이 어려서 갖고 놀던 장난감을 중학생이 될 무렵에 버렸는데 장난감이 삭아서 형태가 변한 것은 있었지만, 크게 망가진 장난감이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을 함께 키웠던 이웃들이 아이들이 장난감을 깨끗하게 갖고 논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붙박이장 하나에다 아이들의 역사를 모아두었다. 처음으로 쓴 그림일기부터 손에서 놓지 않고 갖고 놀던 미니 자동차. 종이 딱지, 구슬, 보라돌이 인형, 달마시안 강아지 인형까지 계절마다 보물창고를 환기한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괜히 시무룩해지는 날에는 보물 창고를 열어서 한 번씩 상자마다 열어보면서 위로받고 소진한 기력을 충전한다.
작년에는 냉장고를 새로 장만했다. 냉장고도 20년 넘게 사용한 정이 들 대로 들어버린 친구다. 냉장고에서 물이 새서 거실에 물이 흥건한 적도 있었다. 냉동실이 얼어서 얼음을 드라이기로 녹이던 여름도 있었다. 수리하러 온 기사님이 “이제는 그만 보내주세요.” 시처럼 이야기하면서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물어볼 걸 그랬다. 혹시 시인이냐고 말이다.
베란다를 통해서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정말 서운했다. 주방에서 나랑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하루에도 수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닫으면서 오늘은 무엇을 해 먹지? 맛있는 것은 전부 냉장고에 있었다. 제일 인기 많은 친구였다. 새로 산 냉장고는 멋진 청년의 모습이다. 진한 회색으로 강해 보이면서 세련된 도시적인 느낌의 냉장고다. 앞으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낼 친구다. 오래된 친구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멋진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이 소리만 나고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나오지 않으니까 뭔가 허전했다. 그럭저럭 한 달 정도를 보냈다. 이대로 그냥 살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남편이 “내일 집으로 선물이 갈 거야, 텔레비전 보냈으니 잘 받아두세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싶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마음을 내준 남편이 고마웠다. 가장 아쉬운 것은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았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아쉬움이 컸다. 그 마음을 챙겨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거실이 영화관으로 바뀐 기분이다. 화면도 최신형이라 그런지 눈도 피로하지 않고 음질도 선명하고 피로감이 덜하다. 저녁에 가끔 한편씩 영화를 보는데 영화관 분위기를 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쉽게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을 칭찬하고 싶다. 알뜰하게 생활하고 남에게는 베풀면서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아들이 쓰던 스탠드를 아직도 사용하는데 엊그제 ‘이웃집 백만장자’ 프로그램에 나온 주인공이 창원의 대형 병원 원장님인데 아들이 쓰던 스탠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랑 똑같은 스탠드이었다. 스탠드를 요즘 새로 나온 멋진 것으로 바꿀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서재에는 작은아들이 사용하던 연필깎이도 보이고 큰아들이 경주 수학여행에서 사 온 나무로 만든 연필꽂이도 보인다. 성인이 된 아들은 집을 떠나서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 몸은 떠났지만, 엄마는 아들이 사용하던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서 사각사각 글을 쓴다. 그래서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