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성주의 본향 안동 제비원

작성자장두강|작성시간11.09.29|조회수250 목록 댓글 0

 

 

성주풀이의 고향

 

하회마을 명성에 묻힌 '성주풀이'의 본향

 

- 제비원 미륵불을 만나다 -

 

▲ 제비원미륵불 


8월의 하늘이 아침부터 굵은 비를 뿌린다. 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시내에서 불과 자동차로 5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제비원 마을.

도로 옆 소나무 사이로 보기에도 웅장한 마애불이 우뚝 그 기상을 자랑하고 있다. 바로 높이 12.4 미터의 제비원 미륵불이다.


하회별신굿놀이가 고증작업을 통해 알려지고 영국 여왕이 다녀가는 등 하회마을이 전국적 명성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양반선비 문화를 대표하는 도산서원과 함께 민중문화의 뿌리가 담긴 이 제비원미륵불이 안동을 상징하는 양대 문화재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제비원미륵불은(지금은 아쉽게도 행정구역의 이름을 따서 '이천동석불상'이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보물 제115호로 거대한 화강암 석벽에 조각된 불신위로 불두를 제작해 올린 특이한 형식의 마애불로 파주의 용머리마애불, 선운사 도솔암마애불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마애불 중 하나이다.


불상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초승달 모양의 깊은 눈썹, 날카롭게 우뚝한 코 등 얼굴의 강한 윤곽과 불신의 세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형식으로 1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성주풀이'로 알려진 성주(城主)의 본향

 


국도변에 차를 세우고 멀리 제비원미륵불을 바라보다가 좀 더 가까이서 보고싶은 마음에 우산을 받쳐들었다. 미륵불 바로 옆에 자리잡은 연미사는 절이라기에는 너무도 자그마한 그래서 여느 시골집 같은 분위기를 주는 암자였다. 열 계단 남짓한 낮은 입구에 초라한 시멘트 석등이 나란히 섰고 조각돌로 소원을 빈 신도들의 희망이 소복하다. 미륵불의 위용에 비해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은 모습에 내심 당황스럽다.


"성주 본향이 어드 메냐 / 경상도 안동땅 / 제비원이 본일러라 / 제비원에 솔씨 받아 / ..."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주풀이에서 성주의 본향을 따지는 사설 대목이다.


바로 제비원미륵불이 위치한 이곳이 성주의 본향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성주(城主)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의 일상사에 가장 중요한 집을 지키는 가신(家神)으로 민중의 삶과 그 역사를 함께 하고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 문화유산이다. 이는 불교문화로서 제비원미륵불이 갖는 의미에 앞서 상고사이래 긴 우리의 역사와 민중의 내면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연미사 마당을 지나자 한길 바위 아래 한 뼘이 채 될까말까한 작은 불상들이 이색적이다. 미륵불 입구에도 수백의 화려한 불상들이 유리관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고, 미륵불 바로 옆에도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촘촘히 적힌 작은 불상들이 2000이 넘어 보였다. 불상의 숫자만으로는 가히 제비원미륵불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걸맞다는 생각을 해보니 씁쓸한 위로가 된다.


가까이서 마주한 미륵불은 멀리서 보던 느낌과 너무도 달랐다. 우선 자연석에 조각된 불신의 옷자락은 살아있는 듯 웅장하고 그 위로 올려 보이는 미륵불의 표정은 너무도 근엄한 모습이었다. 때마침 비가 그쳐 우산을 내려서일까.


법당 옆 작은 채에서 연미사 정기철 사무국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비원미륵불의 역사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사학자들은 고려시대로 보지만 미륵불에 얽힌 여러 가지 전설을 종합해 보면 사실 신라시대로 볼 수 있지요"라며 말문을 연 정 국장은 " 여러 가지 전설 중에서도 연이낭자의 전설이 가장 유력하고 많이 알려진 전설"이라며 그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은 그 전설의 내용이다.

 

▲ 가까이서 올려다본 미륵불

연이낭자 전설

신라시대, 고창이라 불리운 이 곳에는 여관(당시에는 院이라고 했다)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여덟 살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심부름을 하는 "연(燕)이라는 예쁜 처녀가 있었다.


연이는 인물이 예쁠 뿐 아니라 빨래까지 빨아주는 연이는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자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글을 익히고 내일은 어떻게 하여 손님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도와드릴까 하는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불심도 대단하여 새벽에 일어나 청소를 마치고 염불을 해서, 지나가는 과객들로 하여금 그 알뜰한 정성과 고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원의 이웃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성미여서 거지를 보는대로 내쫒는 고약한 위인이었다. 이렇게 인심이 고약한 김씨 집의 총각도 연이에게 장가들고 싶은 마음이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이 총각이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염라대왕이 명부를 뒤적이다가는 "아니 자네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왕 왔으니 인정이나 좀 쓰고 갈 마음이 없느냐?" 고 묻는 것이었다.


대왕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이봐, 총각! 자네는 세상에 적악한 사람이라 다음에는 소로 환생할 것이다. 그러니 자네가 사는 건너 마을의 원에 살고 있는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창고에 많은 재물이 쌓여 있은 즉, 그걸 좀 꾸어 여기서 인정을 쓰고 가렸다." 이 말에 그 총각은 다시 살아서 돌아간다는 기쁨에 연이의 재물을 꾸어 쓰고는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돌아온 즉시 총각은 연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재물로 갚았다. 이에 연이는 거저 생긴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리라 마음먹었는데 마침 석불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어, 도선국사로 하여금 석불을 중심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했는데 이 공사가 막대한 것이어서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법당을 짓던 마지막 날 기와를 얻던 와공이 그만 잘못하여 높다란 지붕으로부터 떨어지니 온 몸뚱이가 마치 기왓장이 깨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되었고, 혼은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이에 이 절을 "제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 부르고 이 곳을 제비원 또는 연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연이는 그 나이 서른 여덟 되던 그 해 동짓달 스무 사흘날에 처녀의 몸으로 죽게 되었다. 그 날 저녁은 온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큰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돌부처가 생겼다고 한다.


돌부처는 연이의 죽은 혼이 변화하여 생긴 것이라 전한다.


 

이제는 소외감마저 드는 민중의 문화재

 

연이낭자 전설로 정 국장과의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보살님이 내어준 감주 한 그릇으로 냉정을 되찾으며 향후 이곳의 홍보와 개발계획에 대해 물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빨리 마무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연미사는 1년동안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백중기도' 중이라 많이 바쁘다고 했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시에서도 봉정사, 도산서원, 하회마을과 함께 이곳을 유불교문화권으로 묶어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최근에 추진되고 있는 개발 계획을 설명한 정 국장은 "부디 이러한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어 소중한 우리 민중의 문화유산이 제대로 알려지고 잘 보존되어지길 희망한다"는 간절한 바램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보면 "봉정사나 하회마을의 빠른 진행에 비해 여기는 아직도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느낌"이라며 소외감을 감추지 못했다.

 

▲ 전국에서 보내오는 기와들

 

법당 뜨락으로 다시 비가 내린다. 우산을 펴고 연미사를 나서는데 마당 한켠에 쌓여있는 수십 꾸러미의 기와장들이 발을 잡는다. '소원성취 어느 고장 아무개', '무사증축 무슨 동네 개똥이'.


수천년을 넘나들며 계속되는 민초들이 쓰는 역사는 과연 쉼이 없는 것인가? 답답한 마음에 위안의 물음을 스스로 던져 본다.

 

 

安東 성주풀이

 


안동은 유림(儒林)의 본고장으로서 한때는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고 인근제향(隣近諸鄕)을 다스리던 발권지(發權地).


낙동강의 상류와 그 지류가 합류하는 곳이고 삼면을 산들이 활 모양으로 둘러싼 아늑한 분지다.


도산(陶山)ㆍ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고 이 퇴계(李退溪)ㆍ유 성룡(柳成龍) 같은 대학자와 대정치가를 배출한 곳이라서 이곳과 연(緣)이 없는 나그네에게는 언뜻 생각하기에 완고한 고장으로만 알았다. 이 생각은 반상(班常)의 별(別)이 엄하리라는 것이었고 따라서 민중의 가슴에서 응혈져서 생기는 민요가 봉건성에 매여서 맥을 못 추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이「성주풀이」를 비롯하여「놋다리밟기요」「윷놀이요」등 이 고장 특유의 민요가 풍성한 데 놀랐다. 오히려 반상의 구별이 엄격하면 할수록 하층계급이 갖는 저항이나 반발은 한결 더 하다는 사실을 찾아 냈다. 쉬운 예로 중과 양반을 풍자한 하회가면극(河回假面劇)이 여기서 생겼다는 것이 흥미 있는 일이 아니가.


 성주본(本)이 어디메냐

 성주본(本)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의 솜씨 받아

 소평대평(小坪大坪)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

 소부동(小拊棟)이 되고

 대부동(大拊棟)이 되고

 청장목이 되고

 황장목이 되고

 도리기둥이 되었구나.

 에라만수.


영주로 가는 길을 따라 시오 리쯤 가면 오른편 산허리 암벽에 신상을 새기고 그 위엔 다른 돌로 머리를 얹고 그 위엔 또 다른 돌로 육개(肉蓋)를 얹은 너그러운 미소의 여래입상(如來立像)을 보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제비원 미륵암 대불(大佛)이다. 마애불(磨崖佛)이라 함이 옳을 듯하다.


이곳에 옛적엔 울창한 솔밭이 있었다고 하며, 이조 세종께서 손수 보시고「대부송(大夫松)」이란 호를 하사했다는 노송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성주풀이」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란다.


성주는「성조(成造)」의 와음(訛音)에서 생긴 것이라 하며, 따라서「성주풀이」란「집짓는 재료를 풀이한 노래」또는「집지키는 신을 위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천자풀이요」따위에 직접적인 비교를 하기에는 약간 다른 면도 있지만 광의(廣義)로 볼 때에는 일종의 어희요(語戱謠)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가락은「경복궁타령」과「개성 난봉가」의 어느 한쪽씩을 닮은 것만 같다. 그만큼 밝은 가락이다.


암자를 지키던 만허(萬虛)라는 법명(法名)을 가진 김 봉래(金鳳來)씨는 승직(僧職)도 있었는지 노래에 춤까지 얹었다. 그러고는 자꾸 잡가라고 했다. 흥겹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잡가라고 했는데, 장가라고 할 때에는 이에 대위(對位)되는 정가가 있어야 할 것이고 또 그 정가가 없는 때에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여겨졌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성주풀이」는 3백 80년쯤 전 권 여제(權麗濟)란 사람의 소작이라고 한다. 확실한 근거를 따졌으나 대답을 피하는 걸 보면 애매한 구전이 유일한 단서인 것 같았다.


솔씨를 받아 뿌려서 그것이 집을 이루는 재목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엮은 것이 위에 든 대목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소산(小山)에 올라 대목(大木)을 내고

 대산(大山)에 올라 대목(大木)을 내고

 원근산의 칡을 끊어

 궁글뜷여 떼를 모아

 양구양천(楊口兩川) 흐르는 물에

 이리두덩실 띄웠네.


이 대목은 그 재목감을 도끼로 찍어 떼를 모아 물에 띄우는 과정을 엮은 것이다. 제비원 근처는 큰 강이라곤 없는데 떼를 모아 띄운다는 것은 어디서 둘러댄 것인지 아리송했다. 그저 과장벽(誇張癖)에 너무 치우친 느낌뿐이다.


또한「소산에 올라 소목을 내고」라야 다음의「대산에 올라 대목을 내고」와 대구 구실이라도 하겠는데,「소산에 올라 대목을 내고」한 것은 뒤의 것과 어떻게 가사가 어울리는 것인지 그 교(巧)를 짚어 볼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이 대목을 벗어나면 성주풀이는 반드시 재목감이나 또는 집 지키는 신을 위한 노래만은 아닌 대목이 너무나 많았다. 그만큼 가사는 결구적으로 흠을 지키고 있었다. 가사가 장황하고 보면 별의별 허구적 사실이나 무용의 표현을 마구 잡동사니로 담게 되는 것은 민요가 피할 수 없는 한 생리였었던지도 모른다.


「둘이 부는 피리소리 쌍봉황(雙鳳凰)이 노니는 듯 소상반죽(瀟湘班竹) 젓대소리 사람의 흥을 자아내고」라든가,「술이나 안주 많이 싣고 강릉 경포대 달구경 가자」는 따위가 그 좋은 예이다. 여기 오면 이미 집짓는 재료라든가 집을 지키는 신과는 전혀 아랑곳없는 가사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